선교

[호소문] 희망을 버려서는 절대 안 됩니다

2013년 계사년 희망의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깊은 슬픔에 빠져있습니다. 희망 뒤편의 그늘진 곳,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곳에서 노동자들이 절망으로 줄이어 목숨을 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잃은 라헬이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했던(렘 31:15) 바로 그 절망적인 슬픔이 이 땅 구석구석에 쌓여가고 있습니다.

지난 몇 해 동안 해고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숱하게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렸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벌써 23명이나 죽어 나가는 등 절망적인 죽음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대선이 끝난 뒤에도 4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죽음은 열심히 삶을 일구려 애쓴 가장들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더 큰 충격이자 슬픔입니다. 이 나라는 죽음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나라 대한민국을 이만큼 잘살게 만든 산업역군이며, 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국민들입니다. 그들은 이 대한민국 어느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남편이며,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신앙을 가진 누군가의 가족입니다. 줄 이은 그들의 죽음은 그래서 우리 이웃의 죽음이며, 우리 교인들의 죽음이며, 나아가 우리 사회의 죽음, 곧 우리 자신들의 죽음입니다.

격변의 한국사회에서 민주화를 외치거나 노동운동을 한 사람들이 모진 고문에 죽은 경우는 있었습니다. 시위를 하다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돌에 맞고 몽둥이에 맞아 숨을 거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진리라고 믿는바 그 뜻을 알릴 방법이 없어 분신한 사람들도 있었고,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여 자결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절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는, 그것도 줄 지어 목숨을 버리는 경우는 초유의 사태입니다. 살기 위해 애썼던 그들이 목숨을 내버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절망입니다. 사방 어느 곳도 빛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절망 때문입니다. 이 사회에서는 희망을 꿈꿀 여지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사라진 나라, 그것은 무너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이 나라가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해도 더는 계층상승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거나, 그래서 ‘개천에 용 나는 일’은 앞으로는 없을 것이라는 자조 섞인 한탄이 회자된 것이 몇 년 되었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양극화가 심화되었을 뿐 아니라, 고착되었다는 반증입니다. 하지만 용이 되지 않아도 사람 대접 받으며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우며 큰 욕심 없이 행복하게 사는 일은 가능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 이 나라는 그런 꿈마저도 꿀 수 없게 만든 모양입니다.

그들의 바람은 재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고된 직장에 복직하고, 민주노조를 회복하고, 살인적인 손배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기업이 어려우면 정리해고,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쌍용차나 한진중공업처럼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정리해고도 있습니다. 당연히 노동자들은 반발할 것이고, 이에 대한 반발은 현행법으로는 불법이니, 노사 간에 타협이 이루어져 파업이 끝난다 하더라도, 회사는 노조나 노조 간부들을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을 벌이고, 월급과 조합비에 가압류를 거는 것입니다.

현재 기업들이 노동자들에게 청구한 손해배상액이 1,000억 원 대에 이른다고 합니다. 한진중공업은 연 조합비가 1억인데, 회사가 158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했다 합니다. 단순계산해서 158년을 갚아야 합니다. 홍익대학교는 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에게 2억 8천만 원의 손해배상소송을 했습니다. 그 노동자들의 월 급여는 100만 원 안팎이라고 합니다.

오랜 싸움 끝에 어렵사리 복직을 해도 손해배상 소송으로 월급을 가압류당한 사람들은 손에 월 삼사십만 원을 쥐게 되고, 게다가 파업기간에 늘어난 빚과 이자에 시달린다니, 그 지경에 이르러도 절망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정부는 기업 프렌들리를 내세우면서 노동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법원은 사람보다 법조문의 문자를 중시하고, 기업은 그나마 온당한 법원 판결조차 이런 저런 핑계로 따르지 않는 이 나라의 현실은 노동자들의 희망을 뿌리째 잘라내는 절망의 땅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목숨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목숨은 천하보다 귀한 것이고, 생명은 모든 희망의 근거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이라고 믿는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간절히 부탁합니다. 신앙인 이전에 이 나라,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아니 사람으로서 부탁합니다. 제발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추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목숨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의 목숨이 희망입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이 희망입니다. 여러분을 지켜보는 동료들이 희망입니다. 또한 우리의 이 가슴 아픈 슬픔이 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평화로 채우실 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희망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는 슬프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1. 기업주들은 한 기업이 성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부의 지원, 노동자들의 땀, 그리고 국민들의 헌신이 있었는지를 기억하고, 노동자들을 단지 이윤 창출의 도구가 아니라, 이 나라의 같은 국민으로, 이 사회의 동역자로 여겨야 합니다. 따라서 최대한 정리해고를 자제하고, 함께 살 길을 모색하며, 보복적인 거액의 손해배상소송 등으로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지 말아야 합니다.

2.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는 ‘국민’ 행복시대를 약속했습니다. 말 그대로 기업의 노동자들은 다수 ‘국민’입니다.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런 기업행태가 시정되도록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랍니다. 특히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육박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제 지역감정이 아니라 더 많이 부를 쌓는 사람들과 절망으로 내몰리는 사회적 약자 사이의 문제입니다.

3. 국회는 노동 유연성을 추구하는 현행 법체계를 수정하여, 노동자들이 절망으로 내몰리는 이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을 하루 속히 입법화해야 합니다. 이 일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4. 법원은 법률을 엄정히 적용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법의 근본정신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법전의 문자 너머에서 벌어지는 이 절망의 현실을 직시하고 관련 사건 재판에서 사려 깊은 판결을 내려 줄 것을 당부합니다.

5.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 사회에서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마리아 사람’을 보고서도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과오를 참회합니다. 그들의 죽음을 남의 일처럼 여긴 잘못을 회개합니다. 그들의 절망은 우리의 안일함과 무관심 아래서 생겨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절망의 죽음을 멈추어 주시도록 우리 함께 간절히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부탁합니다.
 

2013년 1월 3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김근상

총무 김영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손달익

기독교대한감리회 임시감독회장 김기택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나홍균

한국구세군 사령관 박만희

대한성공회 의장주교 김근상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장 김원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장 박성배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장 이영훈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장 엄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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