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2001.12.16
성서본문
이사야 62:1-12, 누가 1:46-55
설교문
1. 들어가는 말:
성탄절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거리에는 캐롤이 들리지 않습니다. 흥청거리는 소비의 축제분위기가 사라진 것은 다행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예 새로운 미래에 대한 꿈마저 상실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1세기 첫 번 성탄절을 앞두고 있는 우리의 마음은 희망에 부풀어 있다기보다는 불안과 좌절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21세기 첫 해에 우리는 '9.11 테러'의 충격을 받았고, 또한 테러를 응징하겠다는 미국이 수행하고 있는 이른 바 '더러운 전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빈 라덴을 체포한다는 구실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인 아프카니스탄을 초토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이 시간에도 아프카니스탄 국민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IMF사태는 종식되었다지만 우리가 느끼는 경제적 체감온도는 여전히 영하권에 머물러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경제활성화를 위해 소비를 권장하지만 소비할 여유와 능력을 지닌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풍년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오히려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고 아우성입니다.
정치권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더욱 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인들의 권력투쟁과 부정부패는 정치에 대한 혐오감만 자극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모처럼 조성되었던 남북화해 분위기도 얼어붙고 있어 평화통일에 대한 꿈도 실현가능성이 의심받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국내에서 개봉되는 영화들마다 온통 폭력배들의 폭력을 미화하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분위기 조성은 남한사회 자체 안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성탄절을 기다린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2. 제3 이사야의 예언: 나는 침묵할 수 없다!
이사야서 62장은 바벨론 포로들이 귀환하여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재건하던 시기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신세에서 해방되어 그처럼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폐허가 된 땅을 재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황폐화된 것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을 외면하고 침묵을 지키고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다시금 구원받은 도성으로 회복시켜주시리라는 꿈을 선포합니다.
예언자는 지금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침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시온의 공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시온을 격려해야 하므로, 내가 잠잠하지 않겠고, 예루살렘이 구원받기까지 내가 쉬지 않겠다."(1)
예언자는 지금 절망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성취될 것임을 믿고 신뢰하도록, 그래서 꿈과 희망을 갖도록 촉구합니다. 예루살렘이 구원받은 도성이 되리라는 희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약속을 기억하시어 예루살렘 주민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을 이루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예루살렘 공동체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유대인들의 신앙 사이에 큰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개인의 구원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우리의 종교적 업적에 의해 구원을 쟁취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신앙관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성서적 신앙의 모델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언자는 지금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6) 그래서 그는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워 밤이나 낮이나 잠잠하지 않게 하였다고 합니다. (6-7절은 매우 난해한 구절이어서 성서학자들의 견해가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일인칭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예언자 자신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파수꾼은 하나님께 대하여 '기억을 일깨우는 자들'의 역할, 즉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항변하면서 하나님께 그분의 약속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파수꾼은 예언자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고 예언자와 함께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신앙인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예루살렘 공동체가 그처럼 갈망하는 구원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갈망하고 있는 구원은 흔히 죽음 이후에 천국에서 영원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8절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예루살렘의 구원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의 식량으로 내주지 않겠다.
다시는 네가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 사람들이 마시도록 내주지 않겠다."
즉 "곡식을 거둔 사람이 곡식을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거둔 것을 먹"을 수 있는 상태(9)가 구원받은 상태로서 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할 것입니다. 지금 예언자가 꿈꾸는 예루살렘의 구원상태란 다름 아니라, 강대국 점령군들에 의한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예루살렘 주민들이 경작지와 포도원에서 힘들여 수확한 것들을 수탈당하지 않고 스스로 누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언자와 예루살렘 시민들이 그처럼 갈망하는 구원상태가 우리의 관심사와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에 대하여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구원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유대인들은 죽음 이전의 구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적인 구원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유대인들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구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주도하는 관심이 유대인들의 신앙전통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예언자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신앙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대국이 휘두르는 폭력의 희생자들이 된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그는 그들의 고난에 대해 침묵하시는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뜨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해 행동하실 때까지 침묵하지 않도록, 즉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구원의 약속을 상기시켜드리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미리암의 꿈
우리가 경청한 '마리아의 찬가'는 바로 이러한 유대인들의 신앙의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마리아는 자신의 몸을 통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그가 아기를 잉태한 사건에 대하여 "주께서 자비를 기억하셔서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다(54)고 찬양합니다.
마리아는 지금 그가 아기를 잉태한 사건은 다름 아니라 저 예언자가 그처럼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려 했던 바로 그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한 징표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비천한 자신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시작됨을 감격해 합니다. 마리아가 스스로에 대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다(48)고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드러낸 것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 당시 사회적 상황에서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는, 로마식민지에 불과한 유대 땅의 한 시골처녀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명문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의 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난하고 비천한 한 시골처녀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마리아의 찬가에 포함된 시골처녀의 꿈은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51-53)
마리아는 그가 잉태한 아기를 통해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마치 그것이 이미 실현된 것처럼 과거형 시제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노래를 당시의 로마 황제나 헤롯대왕이 들었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요? 분명히 마리아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백인 미녀 마리아의 이미지가 산산조각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는 나약하고 순종적인 마리아의 모습대신에 혁명적인 여전사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늙지 않는 백인 미녀 마리아의 모습은 서구 신학자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이 창조해 낸 가공인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대인 마리아는 당시에 미리암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유대인 미리암의 피부는 따가운 햇볕에 그을러 있었을 것이고, 가난에 시달린 식민지 땅의 시골처녀는 결코 잔잔한 미소만 짓는 여신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그는 지금 그의 조상들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혁명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꿈은 결코 현실화된 적이 없지만, 몽상은 아니었습니다. 그 꿈은 히브리성서(구약성서)의 신앙인들이 꿈꾸던 바로 그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인간이 이룰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서 이루고야 말 바로 그런 꿈이었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꿈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현실화되어야 하는 꿈이었습니다.
메시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교만한 자들,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들, 즉 제왕들과 부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반면에 메시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시고 굶주린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 이것이 미리암의 꿈입니다. 이 꿈에는 히브리 신앙인들의 오래된 꿈이 서려 있으며, 미리암과 동시대인이던 유대민중들의 꿈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미리암이 기다린 성탄은 바로 히브리 신앙인들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구원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교만한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서 기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정치지배자들의 몰락과 억눌린 사람들의 인권회복, 그리고 부자들의 사유재산 박탈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일용할 양식 분배로 구체화되는 하나님의 혁명의 시작으로 기대되었습니다.
성탄을 기다린다는 것은 바로 유대 땅의 시골처녀 미리암의 '이' 꿈이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리암의 이 꿈에 연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성탄을 기다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리암의 이 꿈을 외면하고는 성탄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4. 성탄: 하나님의 혁명의 시작!
오늘날 우리가 저 예언자의 꿈에, 무엇보다도 미리암의 꿈에 연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 까요? 미리암과 함께 성탄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저 '더러운 전쟁'을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수행하고 있는 부시행정부는 결코 미리암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미리암의 꿈은 부시행정부 자체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이 대강절에 우리는 그들의 교만함을 심판하러 오시는 메시야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아프카니스탄 민중들의 눈물을 씻어주기 위해 오시는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부패한 정치인들과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재벌들, 그리고 부당이익과 불로소득을 취한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아님을 확인합니다. 미리암과 함께 우리는 그들을 심판하러 오시는 메시야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노동의 대가를 누릴 수 없는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눈물을 씻어 주기 위해 오시는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한반도를 영구분단으로 몰고가려는 세력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아님을 확인합니다. 미리암과 함께 우리는 그들을 심판하러 오시는 메시야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이산가족들과 양심수들의 눈물을 씻어주기 위해 오시는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과 폭력을 미화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임을 확인합니다. 미리암과 함께 우리는 그들을 심판하러 오시는 메시야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폭력의 희생자들을 위로하시는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탄절은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시간이 됩니다. 아기 예수의 성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일방적으로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명백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성탄을 기다리는 계절은 꿈과 기대로 가득 찬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꿈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꿈이 아니라 불가능해 보이지만 가능하게 될 꿈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정치적, 경제적 현실자체를 철저히 변화시킴으로써 그 꿈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탄을 기다림은 역사를 변혁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철저히 신뢰함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성탄을 기다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한 결단과 준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은 성탄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탄을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혁명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리암의 꿈이 우리의 꿈이 될 때, 성탄절은 우리에게 첫 번 성탄의 감격과 기쁨을 안겨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시골처녀의 설레임이 우리의 설레임이기를 빕니다.
대강절 기간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그리고 세계의 역사 속에 미리암의 꿈을 현실화시켜 주시기를 갈망하는 소망의 계절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