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2001.10.21
성서본문
열왕기상 18:17-21, 마태 6:24-34
설교문
1. 들어가는 말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돈입니다. 본래 돈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지만, 이제는 돈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돈은 이제 단순한 교환수단이 아니라 힘을 지닌 우상, 곧 '맘몬'이 되고 말았습니다. 맘몬 지배의 구체적인 형태는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모든 사람들은 돈의 마력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의 가치판단과 행동목표를 결정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질적 이해관계입니다. 한국의 '교육열'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교육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물질획득을 용이하게 하는 특권을 쟁취하기 위한 생존경쟁에 불과합니다. 정치가들이 내세우는 그럴듯한 말들 배후에도 물질적인 이해관계가 숨어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계획하고 실행하는 전쟁들도 인권, 자유, 평화 등의 명목을 내세우지만, 배후에는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를 비롯한 물질획득과 그로 인한 우세한 힘의 확보를 추구하는 음모가 숨어 있습니다. 매일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뉴스들은 거의 대부분이 맘몬을 숭배하는 인간들이 저지르는 범죄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심지어 무소유를 가르친 부처님을 따른다는 불교신자들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메시야가 되신 예수님을 따른다는 그리스도인들도, 불교 사찰만이 아니라 교회들도 맘몬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2. 선택 앞에 선 신앙인
오늘의 말씀은 아합왕이 통치하던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예언자 엘리야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기원전 9세기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아합은 가나안의 신인 바알신 숭배를 이스라엘에 도입하려 시도한 왕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신을 풍요의 신으로서 숭배하였습니다. 바알에게 잘 보이면 농사가 잘되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게 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국가의 풍요를 위해 바알 신전을 세우고 바알을 숭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도 바알을 섬기는 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이 시대에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금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아합의 정책에 대해 저항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는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혀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의 바알 숭배로 인해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아합은 사람들을 풀어 엘리야를 체포하려 하였지만 허사였습니다. 결국 삼 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통을 겪었고, 집짐승들도 마실 물이 없어 죽어갔습니다. 그 때 아합을 피해 숨어지내던 엘리야가 아합 앞에 나타났습니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말합니다: "그대가 바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요?"(왕상 18:17) 아합은 엘리야가 바알의 분노를 일으켜 비가 내리지 않게 되었다고 책임을 추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반박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과 임금님 아버지의 가문이 괴롭히는 것입니다."(18) 여기에서 엘리야는 가뭄의 원인이 아합의 우상숭배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의 배후에는 비를 내려주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라는 신앙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아합과 엘리야의 대화는 가뭄으로 인한 경제파탄의 원인과 책임에 대한 상반된 견해들을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아합의 견해로는 물질적 풍요를 보장한다는 바알의 비위를 거스르게 한 것이 원인이고 따라서 엘리야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엘리야의 견해로는 경제파탄은 역사의 주님이신 야훼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데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아합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어느 신이 비를 내리게 하는지 확증하기 위해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을 시도합니다.
엘리야는 바알 예언자들과의 대결을 보기 위해 모인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야훼)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21)
엘리야는 지금 출애굽의 하나님인 야훼와 물질적 풍요를 보장한다는 바알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이 양자택일의 요청 앞에 서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을 향해 양자택일을 요구했던 엘리야는 지금 우리에게 양자택일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양자택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알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물질적 축복을 얻어내기 위해서 신을 이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질적 탐욕은 신앙심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물질적 성공은 그 과정은 전혀 문제삼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정당화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부자들을 정당화하고 합법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물질적 탐욕에 눈 먼 부자들에 의해 착취받고 고통받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개인적 축복을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기 위해 개인적인 관심사를 포기합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공동체에 주신 선물로 이해합니다. 그리하여 물질적 획득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정당화하기보다는 오히려 함께 나누는 삶을 축복된 삶으로 이해합니다. 이 경우에 부유함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이웃과 나누지 못한 결과 발생하는 스캔들일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물질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요청은 바로 예언자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촉구하였던 요청과 같은 맥락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요청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사실은 물질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하나님과 물질 사이에서 양자택일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물질적 풍요를 보장하는 싼타클로스로 이해함으로써,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 혹은 재물의 신인 맘몬을 숭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우상인 맘몬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께서는 그 이유가 '걱정'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대체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일까요?
3. 걱정하지 말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걱정거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걱정합니다. 의식주에 대해 걱정하고, 병들까봐 걱정하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걱정합니다. 우리는 이런 걱정거리들을 극복하기 위해 '안전'을 갈망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돈이 안전을 보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얻기 위해 출세하려 하고 권력을 추구합니다. 결국 걱정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인 맘몬에게로 이끌고 갑니다. 돈으로 상징되는 맘몬은 현대판 바알인 셈입니다.
그런데 돈은 인간과 하나님을 갈라놓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습니다. 돈은 인간들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만들고, 계급들과 계급투쟁을 만들어 냅니다. 돈은 다툼과 갈등, 심지어 전쟁을 일으킵니다.
돈은 소유의 상징입니다. 돈은 다른 모든 소유물들을 얻는 수단이 되거나 그것들을 손에 넣게 해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권력과 명예와 행복을 갈망하므로, 돈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물질의 소유에 대한 탐욕은 인간의 내적인 빛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과 동료인간들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온갖 걱정거리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에게, 그래서 쉽게 물질적 탐욕의 노예가 되는 우리에게,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그리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서는 걱정이 부질없음을 폭로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마태 6:27)
생명을 선물하고 보호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걱정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골탕먹이는 심술궂은 신이 아니라, 우리의 창조자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생명을 보존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새와 백합꽃을 돌보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그럼 예수께서는 우리가 의식주에 대해 생각하지도 말고, 그것들을 위해 노동하지도 말라는 것일까요? 예수께서는 의식주가 중요하며, 그것을 위해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가 목수로서 노동하면서 가족을 돌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배부른 자들의 한가한 말장난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새와 백합꽃과는 달리 스스로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걱정까지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되는 걱정, 즉 결국 맘몬에게 굴복하는 걱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돌보기 위한 걱정과 배려는 정당한 것이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걱정은 온갖 안전조처들을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안전하게 지키려 하지만, 그런 걱정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만 쓸데 없는 걱정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31-33) 의식주에 대한 걱정은 누구나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미 그것들이 필요함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의식주에 대한 갈망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4.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삶
하나님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부질없는 걱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의 '사적인' 걱정으로부터, 즉 빵과 옷, 거처할 곳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혹은 건강, 삶, 노동, 인생의 진로, 사회적 지위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아마도 또한 운명, 죄책, 죽음 때문에 발생하는 걱정으로부터 벗어나기만을 원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만 우리 자신에 대한 고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일'(Gottes Sache)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혹은 다만 적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며 아버지인 하나님을 결코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소유할 수는 없으며, 다만 그분의 '일'(Sache)과 함께만, 즉 다만 그분의 '나라' 안에서만 그분을 믿을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들에게 의식주를 선물로 주기를 원하십니다. 새와 꽃과는 달리 인간에게 의식주가 고르게 분배되지 않는 까닭은 다름아니라, 인간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만들어 놓은 부정의의 지배질서와 정의롭지 않은 제도 때문입니다. 새가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꽃이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새와 꽃의 삶에는 부정의한 제도적 폭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의식주를 확보하기 위해 할 일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정의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일, 즉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맘몬의 '구조적 폭력'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즉 우리가 세계를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여야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의식주를 위해 걱정하고 안전장치로서 재물을 획득하려 노력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맘몬이 지배하는 악한 질서와 부정의한 제도에 순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하여야 할 일은 각자의 사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물질적 탐욕에 빠짐으로써 맘몬에게 굴복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실현된다면, 우리들 개인에게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의식주가 골고루 배분되기 마련이고 그것들을 확보하려는 걱정도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걱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투쟁하도록 촉구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매우 단호하고 철저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6:34)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투쟁과 헌신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오염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현재'인 '오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촉구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이후'의 영혼구원에 대한 관심 때문에 죽음 '이전', 오늘의 삶의 문제에는 무관심합니다.)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자는 미래도 다스리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삶과 역사를 주관하는 주님으로서 신앙고백합니다. 그러나 걱정함으로써, 우리는 역사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걱정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 때문에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기뻐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인의 표식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사는 한,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도 역시 다만 우리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만 유지하는 한, 우리는 부질없는 걱정거리들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먼저 추구하는 순간, 그래서 우리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순간, 우리는 걱정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걱정만이 우리를 세상의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새처럼 자유롭게 되며, 백합꽃처럼 아름답게 됩니다.
맘몬과 하나님 사이의 양자택일에 직면하여,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 방향전환하여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