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2000.12.31
성서본문
미가 6:6-8, 사도행전 6:1-7
설교문
1. 들어가는 말: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번 성탄절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화이트 크리스머스'였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머스는 맨 첫 번 성탄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흰눈이 온 세상을 맑고 깨끗한 빛깔로 변화시킨다는 점에서는 상징적으로 성탄의 의미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머스는 경제적으로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성탄의 축제적 분위기도 끝나고 이제 우리는 2000년 마지막 날을 맞이했습니다. 희망과 기대로 가득찼던 2000년 한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2000년 마지막날 우리는 우리의 희망과 기대도 종말을 맞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좌절과 절망은 단순히 한해를 보내는 일시적인 감상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일 떠오를 새해의 태양을 바라보면서도 더 이상 희망과 기대를 간직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전도서의 증언처럼 "태양 아래 새것은 없다!"는 사실만을 깨닫게 될 것 같습니다.
정녕 그렇다면 대체 성탄절은 하나의 행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만일 성탄절이 단순히 하나의 종교행사에 지나지 않는다면 성탄절 절기를 한 해를 마감하는 시간대에 배치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성탄절의 축제분위기는 곧바로 암울한 종말의 분위기에 의해 무효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탄절 절기는 동지와 새해 첫 아침의 사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하필이면 성탄절 절기를 이렇게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태양을 중심으로 작성된 태양력의 새해 첫 아침은 1월 1일에 시작됩니다. 반면에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성탄절이 새해 첫날인 셈입니다.
우리는 태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새로운 시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한 해의 마지막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새로운 시간의 시작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밑의 우울함은 더 이상 우리의 정서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새롭게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시간 안에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희망과 기쁨에 참여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과 기쁨은 하나님의 은총과 약속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세상이 암담하여도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에 의하여 새롭게 변화되리라는 기대를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희망과 기대를 증언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요청: 제의가 아니라 바른 삶!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인간이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기원전 701년, 유다왕국은 강대국 앗시리아의 침략으로 전국토가 파괴되었습니다. 유다왕국이 앗시리아에 예속된 것은 하나님의 무능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유대인들을 괴롭혔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을 갈망하던 유대인들의 희망은 비참한 패배의식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치적 경제적 고난 가운데에서 절망한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의 죄를 고발(미가서 6:2)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을 어떻게 구원하였는지 상기시키십니다(6:4-5).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고난가운데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회개하도록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어떤 댓가를 치러야 할지 묻습니다:
"내가 주님(야훼)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미가서 6:6 -7)
이 질문은 매우 진지한 종교적 질문입니다. 고난의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숙고하는 사람들은 늘 이러한 종교적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적인 업적을 쌓음으로써 신들이 베푸는 축복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경건한 신앙인들은 종교적 제의들과 제물들을 통하여 신들을 자신들의 수호자로 삼고자 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앙인들은 전능한 신들의 도움으로 국가안보는 물론 개인의 평온한 삶을 보장받기를 원합니다. 특히 시대가 어려울수록 경건한 신앙인들은 종교적 제의와 업적을 쌓으려고 노력합니다. 신앙인들은 신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온갖 소유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심지어 자식까지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언자는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대답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요청을 전합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G te: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서 6:8)
여기에서 하나님은 예언자 미가를 통하여 일반 종교인들이 섬기는 신들과 다른 신으로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예언자 미가는 하나님께서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말씀하셨음을 환기시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청하시는 내용을 다시 요약하여 제시합니다: 사회적 생활영역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일, 대인관계에서 한결같이 사랑을 즐겨 행하는 일,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걷는 일! 여기에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가 각각 선포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종합적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신앙인들은 고난 속에서 종교적인 질문을 제기했으나, 하나님의 대답은 철저히 비종교적인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히브리 신앙인의 질문은 성전을 향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대답은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신앙인은 성스러운 예전에 관심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일상적인 삶에 관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유대인들에게 제시하신 이 요청들을 경청하기보다는 종종 멋대로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거나 잘못 추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과 사회의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은 데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려 하기보다는 우상들에게 뇌물을 바침으로써 난국을 회피하려 시도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회개하지는 않고 신들의 비위만을 맞춤으로써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부적이 유행하고 있고, 점쟁이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대형교회에는 헌금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뇌물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실로 요청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그리고 진지하게 경청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만 탐하면서 성전의 종교적 제의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들이 철저히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방향전환(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한국이 진정으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대통령과 정치가들, 경제인들,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어떤 '새로운' 정책도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정치판을 새롭게 짜고, 아무리 새롭게 투자하고, 아무리 새롭게 제사를 지내도 모든 것이 헛되이 끝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요청하십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
지나간 성탄절은 친히 인간의 몸으로 인간들을 찾아오신 하나님, 곧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오심을 축하하는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유대인들과 동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성탄절 사건은 멀리 높은 곳에 있는 절대자와 인간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던 제사장들의 존재 필요성을 거부한 사건입니다. 성탄절의 사건은 제의종교의 종말을 고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낮아지셨으니 더 이상 사제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제의 존재 자체가 바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거부하는 종교적 관습일 뿐입니다. 종교는 사제들의 존재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신을 인간으로부터 멀리 떼어놓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은 이러한 종교적 관습을 거부하십니다. 종교는 제물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제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인간과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시작된 새 천년운동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서 실천하려는 평신도 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늘로 도피하려는 종교운동이 아니라, 이 땅 위에 하늘의 뜻을 현실화시키려는 사회혁명운동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평신도 운동이던 바리새파 운동과 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선생님)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인간들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직접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사제들의 역할이 필요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랍비 예수는 종교적 실권을 장악했던 대제사장에 의하여 처형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권위와 권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평신도 운동의 싹을 잘라버려야 했습니다. 당시 종교적 실권을 장악했던 대제사장과 사두개파는 예수를 처형함으로써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던 평신도들은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면서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러한 평신도 운동으로 탄생한 것이 초대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사도들은 있었으나 사제들은 없었습니다. 이제 모든 평신도들이 제사장처럼 살아가도록 요청받았습니다(베드로전서 2:9-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민족이요, 왕의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국민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더 이상 사제들의 도움없이 직접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사도행전의 말씀에 의하면 초대교회가 점점 성장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말을 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곧 교포출신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토박이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 것입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경건한 사람들은 노년기가 되면 거룩한 도시인 예루살렘에 묻히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왔습니다. 그들을 따라 예루살렘에 왔던 부인들은 남편들이 죽으면 부양해줄 가족이나 친척이 없었기 때문에 빈민구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유대교는 체계적인 빈민구제조직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아마 초대교회도 독자적인 빈민구제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디아스포라 출신 과부들이 소홀히 취급받고 있다고 불평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표준새번역성서는 "매일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네 과부들이 소홀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과부들이 구제에 더 적극 참여하려 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이점에서 공동번역의 번역이 더 옳다: "... 그들의 과부들이 그 날 그 날의 식량을 배급받을 때마다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열두 사도는 초대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빈민구제 활동에 전념할 일꾼들을 뽑아줄 것을 요청합니다. 사도들은 말씀선포와 빈민구제활동을 모두 감당하기에 역부족했음을 시인하고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습니다. 신앙공동체 회원들에 의해 선출된 일곱 사람을 우리는 초대교회 집사들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집사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절에 등장하는 '구제'라는 말이 원문에는 희랍어로 '디아코니아'(봉사)로 되어 있습니다. '집사'란 희랍어로 '디아코노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뽑힌 일곱 사람은 봉사, 곧 빈민구제활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일하도록 부름받은 집사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집사들은 신앙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전념하기 위하여 부름받은 평신도들이었습니다. 빈민구제는 저 미가서에 제시된 것처럼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구체적인 형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집사들은 가장 모범적인 평신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의 운동에 적극참여한 참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의 말씀선포와 집사들이 실천하는 빈민구제의 봉사를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성장해갔습니다.
4.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실천을 위하여
기독교가 제도화되고 교회가 조직체계를 갖추면서 초대교회가 지니고 있던 생동감있는 모습들이 많이 퇴색되어 갔습니다. 평신도들 대신에 새로운 사제계급이 등장하였고, 교회는 사제들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보다는 종교적인 제의가 강조되고 사제들은 절대적인 권위와 권세를 누렸습니다. 기독교가 성서적 신앙전통을 거부하고 종교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중세교회의 타락에 대한 거부로 시작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중세 카톨릭 교회에 저항하여 성서적 신앙의 전통을 회복하려 투쟁하였습니다. 그는 사제들의 도움없이도 모든 인간이 직접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성서의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만인사제설을 통하여 모든 평신도들이 제사장과 같다는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현재화시키려 했습니다. 개신교에는 사제대신에 목사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목사란 제사장이 아니라 사도의 전통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예배에서 말씀선포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성장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종교개혁 전통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문화방송의 이 다룬 일부 대형교회들의 헌금유용 사건과 목사직 세습문제는 한국교회가 얼마나 성서적 전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목사들은 사제들이 되었고, 교회들은 성전이 되었고, 예배는 제사가 되어버렸습니다. 거대한 교회들은 점점 더 세상과 담을 쌓고 종교생활에만 몰두하도록 평신도들을 길들입니다. 집사들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곧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기보다는 교역자들을 하나님처럼 섬기면서 순종하고 희생하도록 강요받습니다. 개신교 교회마저도 성직자 중심의 계급구조 속에 갇혀서 또 다시 중세 카톨릭이 저지른 범죄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또다른 부패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래도 종교개혁의 전통을 되살려 성서적 신앙을 계승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이 한국교회 안에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국 목회자 정의 평화실천협의회 소속 목회자들을 비롯하여 뜻 있는 목회자들 스스로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려는 평신도 운동단체들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희망을 지니게 합니다.
기독시민사회연대 평신도협의회는 지난 28일, "문화방송 방영 '한국의 대형교회'를 보고"라는 성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한국교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였습니다: "목사는 평신도 위에 일방적으로 군림하고, 평신도는 묵묵히 복종함에 따라 교회 내부의 목회자 일인의 지배체제가 구축돼 헌금유용, 부자 세습과 같은 부당행위가 저항도 없이 저질러질 수 있다. ...이런 권위주의 지배구조를 통해 교회는 점점 부패하게 되고, 일단 생겨난 비리는 교회 내부의 정당한 비판의 결여로 인해 개선되지 않아 점점 더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협의회는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재정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예산 집행과정에 평신도를 참여시킬 것, 절대권력으로 인한 비리를 줄이기 위해 목회자와 장로직을 임기제로 운영할 것, 대형교회주의에서 벗어나 사회적 섬김과 나눔의 책임을 다할 것. 평신도들의 이러한 요청은 정당한 것이며, 현실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들은 지금 교회의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의 주체적인 참여를 통한 교회의 민주화만이 한국교회가 살길입니다.
교회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이유는 바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재점검하고 보다 더 바르게 동행하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것은 세상으로 흩어지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교회가 살아있는 신앙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평신도들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새해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천할 집사님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집사로서 부름받은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일에 누구보다도 솔선하여 동참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들처럼 여러분들은 대학교회와 지역사회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 봉사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봉사의 삶을 통해서 대학교회가 활성화되고 성장할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 자체가 구원받은 삶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된 구원에 참여하도록 초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봉사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공동체가 새해에 더욱 성숙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교우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과 동행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사님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구경꾼으로 남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축복된 새해를 맞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