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2000.12.17
성서본문
이사야 32:1-8, 누가 1:67-79
설교문
1. 2000년 한국 겨울의 풍경
올해도 성탄절은 다가오는데 거리에는 캐롤송이 들리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는데,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오히려 신문에는 "민생불안과 민심이반이 위험수위에 다가서고 있다"는 보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불과 3년 만에 또 다시 경제위기의 긴 터널과 맞닥뜨린 '민초'들은 불안을 넘어 분노와 절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조조정 한파로 인하여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경제개혁을 명분으로 자행되는 정리해고는 가진 자에게는 '명약'으로 작용하지만, 힘없는 이들에겐 '극약'처방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공장과 상점들은 소리 없이 간판을 내리고 있고, 재래시장이 몰락하고 있습니다.
한 농민은 빚에 시달려 선친의 무덤 앞 소나무에 목을 매었습니다. 농민 총궐기대회에 참여하여 시위하였던 그는 그때 사용한 플래카드로 목을 매었습니다. 어느 농민의 증언에 따르면, 5톤 트럭에 배추를 실어 팔면 53만원을 받는데 운임료 27만원, 인건비 25만원에 쓰레기 분담금 등을 내고 나면 오히려 손해라고 합니다. 이 증언은 농민들이 처한 암담한 현실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국세청의 특별세무조사에 의해 드러난 부유층의 호화생활은 서민들에게 '정서적 공황'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골프 및 스키용품 판매업체 사장은 한 세트 당 2천만원짜리 수입골프채를 팔아 고수입을 올리며 지난 3년 간 가족들과 160차례의 해외여행을 하는 등 사치생활을 해왔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삼성의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은 95년부터 98년 말까지 4조원의 재산을 상속받았는데도 세법의 허점을 악용하였으므로 국세청은 단 16억만을 증여세로 추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조세제도자체가 분배정의를 세우는 장치이기는커녕 구조적인 부정의를 합법화해주고 또한 유지해주는 구실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한겨레신문은 우리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2000년 겨울, 김대중 정권의 지난 3년을 시행착오라 하기엔 서민의 신음이 너무 크고 '가진자'의 생활이 너무 화려하다. '20대 80'의 사회로 가고 있다는 전망은 서민을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다."({한겨레신문}, 2000.12.4., 제1면)
"부자들은 안녕하지만 노동자들은 불안하다. 개혁은 표류 중이다."({한겨레신문}, 2000.11.30. 제1면)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방문 등 남북화해무드가 조성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고, 수구반공세력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국방부는 여전히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남한은 약 15조원, 북한은 약 5조원을 국방비로 소비하고 있습니다. 2000년을 보내고 있는 우리의 사회현실을 바라보면 사회정의만이 아니라 평화정착도 요원한 것 같습니다. 이 계절에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2. 메시야 시대의 현실
이사야서 32:1은 장차 한 왕이 나타나 공의(정의, Gerechtigkeit)로 통치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심으로써 전개될 메시야 시대의 현실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는 지금 이스라엘을 다스린 역대 왕들의 통치가 하나님의 뜻에 상응하지 못했음을 통찰하고 있습니다. 역대 왕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다스렸지만, 하나님의 뜻을 현실화시키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왕들만이 아니라 왕의 위임을 받은 지배자들도 백성들을 법에 따라 공평(Recht)하게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왕들과 귀족들은 사리사욕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므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그 결과 부정과 불의가 판을 쳤고 백성들은 가난과 억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시대에도 히브리 신앙인들은 결코 신앙의 이름으로 역사로부터 도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암담한 역사적 현실에 개입하여 새로운 역사를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예언자는 이상적인 왕인 메시야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킬 미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통치합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시대에는 백성들을 통치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공평하게 통치할 것입니다.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와 그의 일꾼들인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법과 정의에 따라서 통치함으로써, 각 사람이 받아 마땅한 몫을 각 사람에게 돌려줄 것입니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더 이상 백성들을 착취하거나 억압하는 특권계급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을 보호하는 견고한 요새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통치자들은 백성들에게 고통과 파멸을 안겨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때가 오면, 통치자들은 오히려 백성들에게 외부로부터 불어닥치는 폭풍우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의로운 통치자들은 마치 메마른 땅에 파놓은 관개수로처럼 백성들의 생명을 보전할 것이며, 사막의 큰 바위처럼 그들을 보호하는 그늘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2절).
지금 통치자들의 눈은 멀었으며, 백성들의 요청을 들을 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오면,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의 눈이 멀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요구를 듣는 통치자의 귀가 막히지 않을 것"(3)입니다. 메시야의 시대에는 지배자들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현실을 바라보고, 백성들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억눌려 지내는 힘없는 백성들은 경솔하게 판단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합니다.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때가 오면, 그들은 분별력을 얻게 되어 사려깊게 행동할 것이며, 그들이 의도한 것을 분명하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4) 그 때에 백성들은 통치자들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깨달을 것입니다. 또한 주눅이 들어 말을 더듬던 사람들도 더 이상 더듬지 않고 유창하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정의로운 세상이 되면 민중들은 분별력을 얻게 될 것이며,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하나님과 이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은(=하나님을 모독하는) 지배자들을 귀족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며, 간교한 자(=악한자들)들을 존귀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5). 메시야의 시대가 오면, 지금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면서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는 자들이 더 이상 고상하고 존귀한 자로 행세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앙과 불의가 지배하는 사회는 타락한 사회입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어리석은 자와 우둔한 자들이 귀족행세를 하고 명망가 행세를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말과 행위로 하나님의 섭리에 저항합니다. 동시에 그는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이웃의 요구를 철저히 무시하고 맙니다. 우둔한 자도 악하여 간계를 꾸며서 힘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파멸로 이끕니다.
그러나 메시야 시대에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악함이 폭로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오직 고귀한 일, 즉 하나님께 순종하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는 사람만이 고귀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정의의 실현과 이웃에 대한 봉사로 현실화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 때에 진정한 품위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겸손, 그리고 이웃에 대한 봉사의 실천에 의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 신앙인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꾼 것은 다름아니라 바로 부정의가 지배하고 있으며 평화가 파괴된 역사 한복판에서였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 역사 한복판에서 피안의 세계를 꿈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현장이 새로워지기를 꿈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몽상가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꿈을 꿀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야훼를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결코 현실도피적이거나 현실을 방관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신앙 때문에 정치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철저한 변혁을 갈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결코 삶과 구분된 추상적인 종교의 영역에 갇혀있지 않았습니다.
3. 성탄을 기다리는 사람들
신약성서가운데 누가복음은 첫 번 성탄절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1장에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만이 아니라,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그리고 2장에 소개되고 있는 시므온과 안나를 통해서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간절히 메시야의 탄생을 갈망했는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증언은 사가랴의 갈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늦게 얻은 아들 요한의 탄생에 감격하여 메시야 시대의 비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노래에는 유대민중의 갈망이 절절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선 사가랴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름 모르는 어떤 절대자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히브리 성서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자신을 인류 앞에 드러내 보이신 바로 그 야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69절에는 찬양하는 이유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위하여 "권능의 구원자"(그리스어 본문에는 '구원의 뿔'- 싸우는 짐승의 힘을 암시함)를 다윗의 가문에서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갈망에 응답하여 '유대인'의 모습으로 '유대인들의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구체적인 인간들의 고난의 현장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백인의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미국에 오신 것이 아니라, 바로 '유대인'의 메시야로 '이스라엘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유대인들을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유대인들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의 손에서 유대인들을 건져내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개입은 유대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자비(* "조상에게 자비를 베푸시고"로 번역된 부분은 "조상에게 약속하신 자비를 베푸시고"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를 베푸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신실하시어 유대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74-75절에는 약속의 내용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메시야를 통한 구원사건은 원수들로부터 박해를 당하리라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며, 평생동안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의롭게(정의롭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메시야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에베소서 4:24)
사가랴는 자신이 얻은 아들 요한의 사명을 바로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예비하는 예언자로서 이해하였습니다. 메시야의 시대를 앞당겨보면서 사가랴는 마지막으로 찬란한 비전을 제시합니다: "그분(하나님)은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79)
메시야의 시대는 평화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정의 가운데에서 인간다운 삶, 곧 구원받은 삶을 누릴 평화의 시대가 아기 예수와 함께 동트는 것입니다. 지금 사가랴는 유대민중의 꿈을 자신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 메시야, 유대인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시는 이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예수께서는 고난받는 유대인들의 메시야가 되심으로써 또한 우리의 메시야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가랴와 함께 이 기다림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우리는 이 기다림의 노래를 통하여 고난받는 유대인들과 연대합니다.
사가랴가 살던 시대의 현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암담했습니다. 역사에 새로운 징조가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때에 노인 사가랴는 미래가 현재의 삶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가랴와 함께 성탄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세상을 버리시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희망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다림은 확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탄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아무리 암담할지라도 삶으로부터,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현실에 순응하여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새 역사를 기다립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역사에 대한 구경꾼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다림은 우리에게 세례요한처럼 새 역사를 시작하시는 메시야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촉구합니다.
우리는 성탄을 기다립니다. 우리를 실망시키는 정치인들, 우리를 분노케 하는 경제인들, 우리를 절망케 하는 지배자들 때문에, 우리는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성탄을 기다림은 현실의 지배자들에 대한 저항입니다. 동시에 이 기다림은 새로운 역사를 현실화시키려는 투쟁입니다. 이 기다림에서 우리는 오늘의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합니다.
우리는 성탄을 기다립니다. 이 땅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지 못하였음을 고백하면서, 우리는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성장제일주의와 교파주의, 권위주의, 성차별, 분단과 갈등 심화, 교파분열, 그리고 교권주의의 포로가 된 교회들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러 오시는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에서 우리는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던 우리는 옛 관습, 곧 타계적인 신앙을 버립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기다림 가운데서 세례 요한처럼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일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다림은 도피가 아니라 도전이며,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의 몸짓이며, 자족과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부단한 자기비판과 거듭남을 위한 몸부림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성탄을 '기다립니다'. 다시 아기 예수가 우리 가운데에 태어나기를, 그래서 우리의 삶이 송두리째 철저히 새로워지기를 기대하며, 우리는 메시야를 기다리던 그 유대인들과 함께 지금 성탄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만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기를 우리는 간절히 기다립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