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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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베리타스 DB |
중년의 반고비 생을 넘어가면서 정의의 감각이 달라지는 걸 실감한다. 구호나 거대담론으로서의 정의가 멀리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그것보다 실생활로 경험하는 다양한 인간관계의 지형에서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작은 정의에 민감해지게 된다. 또 그것이 정의의 실현이란 차원에서 중요하다는 판단도 생긴다.
가령, 내가 섬세하게 추구하는 작은 정의의 항목은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다. 천재지변의 사안이 아니면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선약을 중시하는 것이다. 관계의 충실성과 극진한 일관성을 견지하면서 상대방이 시간과 신체의 이동을 통해 보이는 정성에 의로운 기준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연약하고 불완전하여 실수로 약속을 못 지키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부득이한 사정을 미리 전달하여 예의를 갖춰 사전에 충분히 해명하고 최선을 다해 뒷수습을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일을 시켰으면 정확하게 노동의 대가를 계산하여 품삯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이나 글로 먹고사는 이들에게 말과 글의 노동을 청탁했으면 강사료/원고료를 정확하게 지급하는 것이다. 공짜 강연이나 원고를 기대하고 그 노동의 결과로 발생한 수익으로 조직의 구성원이 월급을 받아먹으면서 그 수익의 창출자에게 아무런 예우를 하지 않는 것은 좀 심하게 말해 파렴치한 일이다.
시킨 일에 대한 예우는 최대한 관대하게 하면서 작은 차이를 최대한 정밀하게 계산하는 것이 내 작은 정의의 기준이다. 가령, 내가 주도하는 일과 관련하여 초청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사례금은 어디서 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서울이나 부산에서 전주까지 오는 시간과 소요되는 교통비 등을 고려하여 인근에서 오는 사람들과 10만 원 정도 차등해서 사례한다. 그런데 서울에서 이런 유사한 일로 사람을 불러 일을 시킬 경우 이런 세밀한 차이에 대한 작은 정의가 작동하는 조직은 국가기관 외에 아직 보지 못했다. 물론 나의 경우 여기에도 플러스 요소가 고려된다. 공공의 의로운 일에 종사하며 헌신하는 분들에게는 통상적인 경우와 달리 주관적인 기준으로 소정의 격려금이 보태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손님을 대접할 때도 변변한 직업이 있고 웬만큼 잘 사는 사람의 경우는 5000원 짜리 칼국수나 콩나물국밥으로 메뉴를 짜고, 좀 거친 노동에 찌들려 살거나 순정한 열정으로 헌신하는 삶을 업으로 삼는 이들한테는 10만 원짜리 한정식으로 대접한다. 아울러, 내가 은혜를 입은 적이 있어 한층 더 극진한 예의가 필요한 경우에는 예외적인 사치를 남발할 때도 있다. 굳이 범박한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더 사소한 예를 한 가지 추가하자면 잡된 페이스북 글에 댓글로 칭찬, 공감, 격려해주는 성의어린 말들을 공대하면서 한두 마디 답글로라도 반응을 보이는 것도 내 작은 정의의 목록에 속한다.
이런 게 하찮은 개인적 취향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정의의 감각이 마이클 샐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행시킨 공리주의적 정의의 이상이나 그것을 변용하여 이 땅의 더 가난하고 불우한 자들에 대해 일부러 치우친 균형감각을 환기시킨 구조적 정의의 기치보다 뭇 생활인들에게 더 실팍하고 살뜰한 감각으로 정의를 경험하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정의가 개인의 생래적 욕망과 만나지 못한 채 목표로서만 부유한다면 그것은 그림속의 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의는 지극히 가난하거나 소외된 특정 부류의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에게 두루 필요한 미덕이기 때문이다.
이런 쪽으로 머리가 굴러가다 보니까 종교적 신앙의 경우도 대형집회나 공공의 예배보다 사적이고 은밀한 자리, 사소한 경험을 통해 경건의 참뜻을 새길 때가 많다. 가령, 차 한 잔 마시면서 고요히 묵상하는 일이나, 홀로 조용히 뒷동산을 산보하거나 한두 명의 벗들과 어울려 소박하게 담소하는 자리, 시선이 머문 그림 속으로 아득한 상상의 여행을 하거나 어쩌다 진한 감성이 꽂혀 반복해 듣게 되는 음악 한 곡에 극진한 몰입과 함께 신성의 임재를 느끼게 되더라는 것이다. 한 지인은 이런 걸 일러 ‘작은 종교’라 이름 붙인 적이 있는데, 그것을 달리 새겨보자면 일상화된 신앙의 담담한 경지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어제도 모처럼 소담한 눈이 온종일 내려 주변의 산들이 온통 하얀 치장을 한 것을 모른 척하기 어려웠다. 오후 늦게 기린봉을 찾아 오르는데, 수없이 많이 오른 곳인데도 좌우로 생경한 풍경이 다가왔다. 족히 200년은 넘을 것 같던 오동나무가 뿌리째 뽑혀 쓰러져 있었고, 계류는 어느 때보다도 신선하게 감촉되었다. 무엇보다 나무와 메마른 덤불을 덮은 백설이 차가운 기운을 마구 뿜어대면서 실내의 온실에 순치된 내 의식을 두드려 야생의 감각을 되살려주었다. 순간 나는 시베리아의 설산을 표류하는 백두산호랑이라도 된 것처럼 씩씩거리며 허연 입김을 토해냈다.
그러다 한바탕 설풍이라도 몰아쳐 불어오면 난 오싹해지는 몸을 더 웅크린 포즈로 내 발자국을 따라온 하나님의 숨결이 날개를 단 것처럼 비상하는 자태에 가느다란 눈길을 던지곤 했다. 그 현빈지곡의 겨울골짜기에 작은 종교, 세밀한 신앙적 열망의 촉수가 눈밭에 고개 내민 복수초처럼 피어오르는 순간이 그 무명의 공간에 가물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익명의 시간, 무명의 공간에서 작은 종교의 경험은 섬세한 장소감과 함께 거대한 조직에 순치된 신체의 종교성을 털어버리고 거듭나는 것이다.
큰 것도 작은 것들이 뭉쳐서 이루어진다는 상식을 헤아리면 정의나 종교 역시 그 구현의 맥락이 크다고 가호 잡으며 허세 부릴 게 아니고 작다고 주눅들 것도 없다. 오히려 물량주의의 거대함으로 빚는 거품의 후유증으로 생명들이 쉬 지치는 풍조를 반성하다 보면 작은 종교, 작은 정의의 효용성과 가치도 무시할 게 못된다. 손에 닿지 않는 거창한 이념이나 막연한 갈망에 적잖이 시달리는 세태 속에서 이런 자잘한 것이라도 재발견하면서 소박하게라도 실천하는 일상의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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