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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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베리타스 DB |
교수 생활 16년간 유일한 낙은 종강과 방학이었다. 자유시간의 여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된다는 사실이 늘 고마웠다. 그래서 이즈음 교수사회가 빡빡해지고 숨통을 조인다는 한숨과 푸념에도 불구하고 이 직종은 여전히 특권층 같다. 물론 그 여유를 활용하는 방식이 교수 개인마다 천양지차다. 학교 행정의 보직을 맡아 그 권세를 앞세워 기염을 토하는 ‘little polifessor’가 흔하고, 각종 사회봉사, 언론활동을 통해 얻은 유명세에 나라와 민족의 미래에 대단한 비전과 언사를 보태 출세를 도모하는 ‘big polifessor’도 있다. 저 좋아하는 공부에 몰두하여 학기중이든, 방학중이든, 도서관과 실험실에서 불을 밝히는 학구파 교수도 있지만 항간의 풍설에 의하면 이 범주에 해당되는 이들은 전체의 20%가 채 안 된단다. 나머지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어중간한 부류거나 ‘레저’를 탐하며 각종 취미활동에 소요하는 한량스런 이들도 꽤 많아 보인다.
종강의 한숨과 함께 깃드는 이 ‘레저’(leisure)는 호화요트에 골프, 스키 등과 함께 떠오르는 말이지만, 이 말은 그 뿌리에서 오염된 원죄로 인해 많이 오용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 세태가 짐짓 못마땅하다. 이 말의 희랍어 어원은 ‘스콜레’(scholē)로 오늘날 학자(scholar)와 학문(scholarship)을 뜻하는 말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며 제자들을 양육하던 ‘두란노 서원’의 그 ‘서원’에 해당되는 어휘가 바로 이 ‘스콜레’이다. 성서에 그 용례가 희소한 만큼 중요한 이 어휘는 아쉽게도 국내의 한 출판사가 그 표현을 통째로 독점함으로써 그 형이상학적 함의를 논할 틈새도 없이 쉽게 녹슬어버렸다.
‘스콜레’라는 말로써 ‘여유’와 ‘학문’이 맺어진 어원론적 인연의 내력을 풀어보면 적잖이 심오하다. 학문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 이를테면 배움, 공부, 토론, 독서, 글쓰기 등은 예외 없이 여유의 산물이다. 먹고사느라 빠듯한 현실 속에서 저런 활동의 범주는 다수 민중들에게 사치이거나 특권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유 예찬론자에 가깝다. 여유라는 게 객관적 삶의 조건, 특히 한 사람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해 크게 영향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와 함께,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 그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의 지향점과 밀접히 연관된 것 같다. 말을 바꾸면 여유가 다분히 제 삶을 주체적으로 조율하려는 의지의 문제이고 제 몸을 체계의 수동적 부속품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는 모진 결단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은 여유를 갈망하면서도 좀처럼 그 여유를 제 것으로 누리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꽤 많은 학자(scholar)들은 종강과 방학의 객관적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스콜레’를 제 몫의 향유로 챙기지 못한 채 헛된 바람으로 메말라가거나 시름시름 앓는다. 정치의 소용돌이에 쉽게 휘말려 줄서기에 익숙한 학자, 목사, 글쟁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오죽하면 이 땅에서 가장 반개혁적인 골수집단이 대학과 종교, 언론이라고 하겠는가.
함께 하는 학문도 있겠지만, 공부하고 독서하고 글 쓰는 일로 짜이는 이 분야는 대체로 혼자서 고독하게 감당한다. ‘스콜레’라는 여유의 세계가 끼리끼리 어울려 마냥 흥청대는 세속적 ‘레저’의 천국이 아닌 것이다. 도마복음에 예수가 고독한 자가 되라고 말한 내력이 ‘스콜레’의 이러한 특징을 암시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겨울산에 오르니 나무들이 고독하게 떨고 있다. 그 야윈 가지들 사이로 ‘스콜레’의 여유도 풍만하게 느껴진다. 겨울나무에서 기도와 명상의 포즈를 읽어내고 구도자의 기상을 통찰하는 것은 시인의 영감일 테다. 그러나 그것을 제 일상의 향유적 조건으로 숙지하고 살아내는 것은 빼곡한 업무를 비집고 헐렁한 바람구멍을 내고자 하는 이들 각자가 누릴 만한 고유한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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