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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진] 심판: 전태일과 박정희

윤응진·한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

대학교회설교
2000.11.12.
심판
- 전태일과 박정희 -
(이사야 14:3-15, 마태 5:3-12)

1. 역사의 심판

지난 11월 6일자 {한겨레신문}에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실렸습니다:

- 일본인이 세계 역사를 이끌어 온 '최우수 민족'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일본 고고학자가 고대유물을 날조했다.
- '전태일 열사 30주기 추모사업위원회'는 서울 평화시장 인도에 전태일을 기리는 추모표지판을 설치했다.
- '5.16 쿠데타 발상지'에 세워진 박정희의 흉상이 34년 만에 시민단체 회원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첫 번 째 기사는 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를 날조하기까지 하는 일본 우익세력의 어리석음을 폭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진실은 조작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려는 자는 역사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진리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두 번 째 기사와 세 번 째 기사입니다. {한겨레신문}에서는 두 기사를 대조시켜 편집하면서 '역사의 엇갈림'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30년 전인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쟁하다가 "근로기준법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청년 전태일은 당시에 대통령이던 박정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평화시장의 어린 노동자들이 기본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 저항하여 자신의 몸을 불사른 전태일은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젊은이였습니다. 반면에 박정희는 헌법을 바꾸면서까지 세 번씩이나 대통령의 권좌에 오른 최고 권력자였습니다. 그는 그 후에도 9년 가까이 더 독재정치를 감행하였습니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그는 초법적인 온갖 특권을 누리며 이 땅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새 천년의 첫 해가 마감하기도 전에 두 사람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뒤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제야 비로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삶에 대한 평가가 올해처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전태일을 추모하는 표지판은 평화시장을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 반면에, 문래공원에 세워져 있던 박정희 소장의 흉상은 일장기에 싸여 철거되고 만 것입니다. 박정희 흉상을 철거한 시민들은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친일파이며 독재자인 박정희 기념관을 건축하려는 정부에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정부당국은 국민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의식에도 못 미치는 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착취당하는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킨 한 톨의 작은 밀알이었습니다. 그는 죽었으나, 70년대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저항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의 몸을 불사른 작은 불꽃이 군사독재체제를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반면에 박정희는 79년 10월 26일 부하에 의해 살해당함으로써 이 땅의 사회정의 실현과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대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그들에 대한 평가는 철저히 뒤바뀌어지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 되었지만, 다른 사람은 잊고 싶은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역사인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이러한 역사적 평가 배후에서 우리는 역사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2. 하나님의 심판

우리는 흔히 악한 자들이 승리한다고 절망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죽고 난 후에 지옥에라도 가서 심판을 받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짐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악한 지배자들의 종말이 비참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이사야서 말씀은 권세가 하늘을 찌를 것 같던 독재자의 죽음을 조롱하는 시인의 노래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으면 애도를 표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독재자가 죽으면 환호를 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박정희가 살해되었을 때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지금 성서기자는 독재자의 죽음에 직면하여 기뻐 노래부릅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노래이면서 동시에 독재자에 대한 조롱의 노래입니다. 여기에서 조롱받는 왕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면서 고통과 불안을 안겨주었던 강대국 바빌론의 왕을 지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기쁨에 차서 노래합니다:

"웬일이냐, 폭군이 꼬꾸라지다니! 그의 분노가 그치다니!
주(야훼)께서 악한 통치자의 권세를 꺾으셨구나. 악한 통치자의 홀(왕의 상징인 지팡이)을 꺾으셨구나(무력통치의 종말).
화를 내며 백성들을 억누르고, 또 억눌러 억압을 그칠 줄 모르더니,
정복한 민족들을 억압해도 막을 사람이 없더니,
마침내 온 세상이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구나.
모두들 기뻐하며 노래부른다."(이사야 14:4-7)

하나님께서는 폭군의 무력통치에 종지부를 찍으십니다. 마침내 독재자는 거꾸러졌습니다. 폭군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은 억눌린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대자연도 함께 기뻐합니다. 향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도 '네가 엎어졌으니, 이제는 우리를 베러 올라올 자가 없겠구나'하며 기뻐한다(8)는 것입니다. 실제로 정복자들은 피정복지의 삼림까지 마구 베어갔던 것입니다.

히브리 시인은 계속하여 조롱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 속에는 당시 히브리인들의 관념만이 아니라 가나안, 바빌론, 그리고 그리스의 신화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죽은 자들이 모두 땅 밑의 한 장소('스올')에 집결하여 그림자처럼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올'은 심판받은 자가 간다고 여겨지는 '지옥'과는 다른 개념인 것입니다. 이제 폭군은 스올에서도 조롱을 받습니다. 시인은 이제 "한때 세상을 주름잡던 왕들의 망령들"의 입을 통해 폭군을 조롱합니다: '너도 별 수 없이 우리처럼 무력해졌구나. 우리와 똑같은 신세가 되었구나'(10)

12절에서는 폭군이 '새벽별'로 불립니다. 여기에는 '가나안' 지방의 신화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가나안의 신화에 따르면, 새벽별은 구름과 신들이 모이는 북쪽 끝 산에 있는 가장 높은 별들 위로 올라가 자신의 보좌를 설치함으로써 지극히 높은 신에게서 세계의 통치권을 탈취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벽별은 태양신이 떠오르자 바다 속 깊이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13-14절에는 새벽별로 비유한 폭군의 이러한 절대권력 지향적인 속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네가 평소에 늘 장담하더니
'내가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겠다.
하나님의 별들보다 더 높은 곳에 나의 보좌를 두고, 저 멀리 북쪽 끝에 있는 산 위에, 신들이 모여 있는 그 산 위에 자리잡고 앉겠다.
내가 저 구름 위에 올라가서, 가장 높으신 분과 같아지겠다' 하더니..."
그런데 그가 이제는 스올로, 즉 땅 밑 구덩이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교만한 시도는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은 것입니다. 세계를 지배하던 폭군은 신적인 절대권력을 추구했으나 이제는 처참한 종말을 맞은 것입니다. 그의 처참한 종말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는 무덤도 없이 오물처럼 버려져,
칼에 찔려 죽은 군인들의 시체 더미 밑에 깔려 있다가,
지하 세계의 밑바닥으로 내려갈 것이다.
너의 시체를 사람들이 짓밟을 것이다."(19)

폭군은 지옥에 떨어져 비로소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의 비참한 최후는 인간들에 의해 초래된 것이지만, 실상은 그의 종말은 역사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입니다.

히브리 시인이 노래한 이 심판의 노래는 이미 발생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인이 이 노래를 부를 때는, 강대국 바빌론이 유다왕국을 억압하고 괴롭히며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 신앙인은 바빌론의 독재자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절대권력에 도전하다가 파멸하고 말 것임을 앞 당겨 보면서 역사의 어둠을 신앙으로 헤쳐나가려 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폭군에 의해 유대인들은 패망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폭군을 심판하실 것이다! - 이러한 신앙이야말로 암담한 역사 현실 속에서도 유대인들이 굳건히 결속하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바빌론의 무력통치는 종말을 맞게 되고 유대인들은 해방을 경험합니다. 그들은 그 해방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역사를 심판하신다는 신앙을 확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해방 경험을 박정희가 살해되었을 때 체험했습니다. 결코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그의 철권통치가 종말을 고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찬양하는 기념관을 세운다는 것은 대다수의 국민들의 역사의식에 못미치는 것일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만일 정부가 박정희 기념관을 짓고 박정희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일에 동조한다면, 김대중 정권도 역사의 심판을 모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최근에 한국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각종 부조리들, IMF 체제와 재벌들의 해체로 인한 경제 위기, 부정부패와 지역갈등의 뿌리는 박정희의 개발독재 정책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념관을 세운다면 그것은 박정희의 죄악상을 폭로하고 상기하기 위한 기념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새 시대의 심판기준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첫 부분에 있는 이른 바 '8복 선언'은 우리의 통상적인 판단기준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습니다. (이 부분은 누가복음 6:20-26에 있는 '들의 설교'와 비교해서 읽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누가복음의 내용과 비교할 때 정신화시킨 부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마음'이 가난한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기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강한 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온유한 사람,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배부른 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굶주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해친 사람들에게 보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비로운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과 어울려 한세상 보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부정과 부패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웃에 대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복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핵무기로 무장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복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불의와 타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의를 위해 박해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삶의 스타일을 복되다고 하십니다. 세상에서 패배자로 낙인찍힌 사람들, 어리석은 자들로 조롱받는 자들, 심지어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판단하기에 불행한 자들에 속하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하십니다. 복되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약속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지배가 완성되지 않은 곳에서, 사악한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참된 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통치자들이 지배한 세상에서 불행한 사람들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양식 있는 사람들은 박정희가 축복받은 삶을 살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양식 있는 시민들은 그가 지배하던 세상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던 전태일이 오히려 복된 삶, 즉 참된 삶을 살았다고 여깁니다.

우리는 그동안 복된 삶을 구가한다고 여겨지던 권력가들, 재벌들, 고위직 공무원들, 기타 각종 특권계급에 속하던 사람들이 범죄자들로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복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삶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축복선언에 상응하게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굶주린 사람, 자비로운 사람,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그리고 박해를 받는 사람으로서 사셨고, 또한 그런 사람들과 연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삶이야말로 참으로 복된 삶, 곧 구원받은 삶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뒤를 따르려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주님의 길이야말로 참된 구원에 참여하는 삶이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습니까? 주님의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축복하시리라는 기대감을 지니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현실은 바로 주님께서 축복하신 사림들에게 임한다는 약속을 신뢰합니까?

우리는 박정희의 길보다는 전태일의 길 위에 서 있습니까?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사실상 박정희를 예찬하고 전태일을 버렸습니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박정희의 길을 축복받는 길이라고 선전했고, 전태일의 길은 저주받은 길로 가르쳤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은 이 땅의 독재자들을 축복하였고 전태일의 후예들을 불순세력으로 박해하는 데에 동참했습니다. 소수의 교회만이 박정희에 대해 저항하고 박해받는 사람들과 연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소수의 교회에 속하던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 마저도 전태일의 길을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교회들은 박정희의 개발독재정치가 추구하던 그 '성장'의 논리로 예수님의 복음을 버린 것이 아닌지 철저히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들은 예수께서 축복하신 그 사람들을 축복하면서 그들이 실제로 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바르게 투쟁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박정희를 찬양하고 그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코 예수의 제자일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전태일을 외면하는 신앙인이 있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일 수 없을 것입니다.

낙엽지는 이 계절에 우리는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종말을 맞이하리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낙엽이 지는 것 자체가 슬픈 일이 아닙니다. 낙엽이 나뭇잎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종말을 맞이한다면 그것이 허무한 일입니다.

우리가 점점 더 삶의 종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 슬픈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한계가 주어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어린 배려입니다. 슬프고 허무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참된 삶, 복된 삶, 구원받은 삶을 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는 일입니다.

박정희는 환갑을 넘기고 죽었으나 그의 삶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고통만 안겨주고 말았습니다. 그의 삶은 허무한 종말을 맞았고, 그의 죽음은 억눌린 민중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전태일은 박정희보다 절반의 세월도 살지 못했으나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는 죽었으나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루 하루의 우리의 삶이 이웃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인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절이 되기를 빕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신앙공동체를 형성할 꿈을 안고 시작한 대학교회가 창립 5주년을 맞았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오래도록 이웃에게 기억되는 삶,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함께 노력하고 서로 격려하는 성숙한 신앙공동체를 이루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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