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 신학부 채플 설교
2000. 11.10
성전은 없다!
성경본문
예레미야 7:1-11, 마가 11:15-18
설교문
1. 성전은 없다.
지금 예루살렘에 야훼 하나님을 위한 성전은 없습니다. 기원전 10세기에 솔로몬이 세운(기원전 960-953?) 성전은 기원전 587년에 신흥바빌론 제국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바빌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기원전 515년, 성전을 간소하게 재건립하였습니다. 이 성전은 약 500년 간 존속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에는 희랍제국의 셀류키드 왕조에 의해 제우스상이 성전에 세워지기도 했고, 또 약탈당하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20년, 폭군 헤롯 대왕은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웅장한 규모의 성전을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헤롯 성전은 85년만인 서기 65년에야 완성되었습니다. 헤롯 성전은 참으로 휘황찬란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불과 5년만에 로마제국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에는 성전광장의 서쪽 벽만이 남아 있습니다. 18미터 높이의 이 벽은 '통곡의 벽'이라 불립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유대인들은 이 벽 앞에서 탄식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유대교 성전은 재건되지 않았고, 성전 자리에는 모슬렘교의 성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흔히 예루살렘의 상징물처럼 관광포스터를 장식하는 이 건축물은 흔히 황금사원이라 불립니다. 유대교 성전 터를 점령하고 있는 이 건축물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둥근 지붕을 지니고 있습니다.
황금사원은 메카와 메디나에 있는 사원들에 이어 이슬람의 세 번째 거룩한 장소입니다. 이 사원을 세운 사람은 이슬람 세계의 옴미아드 왕조의 칼리프(모하멧 후계자들로서 정치, 종교 지배자)인 압둘 말리크(Omaijaden-Kalif Abd al-Malik, 685-705)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경쟁자인 Abdallah Ibn Zobeir가 장악하고 있는 메카에 있는 사원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사원을 지으려 했던 것입니다. 사원건축의 근본의도가 신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기보다는 이슬람 세계에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7세기 말(687-691년)에 4년 간의 공사 끝에 세워졌습니다.
이 사원 안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고 알려진 모리아산 꼭대기의 바위가 있습니다. 이곳은 본래 유대교 성전의 제단이 있던 곳입니다. 마호멧 교도들은 이 바위에서 마호멧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습니다.
황금사원 앞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왜 예루살렘에는 유대인들의 하나님 야훼를 위한 성전대신에 모슬렘의 신인 알라신을 경배하는 신전만이 휘황찬란한 빛을 내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무능력하여 자신의 거처조차 마련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오늘 경청한 증언의 말씀들을 통하여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구약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하나님께서는 성전제사를 어떻게 평가하셨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 성전은 도피처가 아니다!
예루살렘 성전 문으로 들어오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주의 성전입니다, 주의 성전입니다, 주의 성전입니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렘 7:4)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성전'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는 말, 곧 '사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곳에 머문다면 그 이유는 그 장소자체가 성스러운 곳이라거나 그 건축물 자체가 성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이 "모든 생활과 행실"을 하나님의 뜻에 상응하게 고치고 실천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3). 여기에서 성전 자체의 의미가 상대화되고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에 상응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거기에 야훼께서 현존하시며, 그곳에 바로 야훼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관심은 이방의 신들처럼 자신을 위한 성전 안에서 바쳐지는 제물의 양에 집중되지 않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관심은 성전 '안'에 바쳐지는 제물에 있지 않고, 오히려 철저히 성전 '밖'에서 행해지는 인간들의 '생활과 행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야훼하나님의 요구는 그 '생활과 행실'을 바르게 고치라는 것입니다. 생활과 행실을 개선할 방향은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웃끼리 정직하게 살 것,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을 것,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을 것,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
여기에서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은 성전 제사의 성실한 수행이 아니라, 성전 '밖'에서 바른 생활과 행실을 '실천'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흔히 성전 '밖'에서는 계명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성전 '안'으로 들어와서는 그들이 행하는 제의를 통해 안전을 보장받으리라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되는 성전 제의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전 제의는 인간들의 죄악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담당할 뿐이었습니다. 인간들은 제의행위를 통해서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저지른 죄악의 대가를 피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들은 성전 제의를 통해 하나님을 속일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십니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습니다."(11)
성전은 도둑들의 피난처가 아니다! 오히려 도둑들이, 범죄자들이 자기합리화를 위해 성전 제의를 이용하고 있는 죄악까지도 하나님은 똑똑히 바라보고 계시다! - 이 선언은 일반 종교에서 일반화되고 있는 제의의 기능을 무효화시키고 있습니다.
3. 성전은 더 이상 필요없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신약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려봅시다. 거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요? 예수께서는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행한 첫 번 째 행동은 성전체제에 대하여 정면으로 저항한 것입니다.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휘황찬란한 면모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요한 2:20에 따르면, 당시까지 성전 건축에 46년이나 걸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전은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체제는 대제사장, 장로들과 사두개파 계열의 율법학자 등 종교적 귀족들의 종교적, 경제적 특권체제를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특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로마 총독이 임명했으므로, 로마의 이익에 상응하게 유다를 통치하도록 요청 받았습니다. 로마의 앞잡이가 된 대제사장은 더 이상, 민족해방을 갈망하는 유대 민중들의 꿈을 실현시킬 지도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은 로마에 대해서는 아부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동족인 유대인들을 향해서는 성전체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막강한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부자들인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해관계와 긴밀하게 얽혀 있던 장로들과 사두개파 계열의 율법학자들도 더 이상 사회변혁을 위해 기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와 물질적인 특혜들을 유지하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유다 사회의 경제가 집중되는 곳이었습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모두 인두세에 해당되는 성전세를 내야 했는데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화폐를 히브리 화폐로 바꾸어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환전상에게 2-4퍼센트의 수수료를 내야만 했습니다. 또한 순례자들과 경건한 사람들은 성전의 바깥마당에 마련된 시장에서 희생제물로 바칠 제물들을 구입하였습니다. 이때에 그들은 비싼 값으로 제물들을 구입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상거래를 통해서 얻는 이익은 종교귀족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이처럼 성전 제도는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종교 귀족들의 재산증식에 크게 기여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성전 뜰에서 장사하고 있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내쫓으면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이제는 '도둑들의 피난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성전을 통해서 민중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항과 비판은 당시의 장사꾼들뿐만 아니라, 그들 배후세력인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귀족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저항은 단순히 성전제의를 갱신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전체제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종교귀족들은 이러한 예수의 저항에 직면하여 예수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고 보도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배후에는 빌라도의 정치적 계산 외에도, 종교적, 경제적 특권을 고수하려던 당시 유대교 종교귀족들의 이해관계가 작용했던 것입니다.
마가 15:38(마태 27:51)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질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성전체제 자체를 무효화시킨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무너진 것은 서기 70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성전을 '거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성전은 로마에 의해 파괴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님 자신이 '이미' 포기하고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성전체제를 거부한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성전체제로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회당 전통을 이어받아 시작되었습니다.
4. 더 이상 성전을 세우지 말라!
그러나 기독교가 제도화되면서 교회당은 또 다른 '성전'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성전을 종교지도자들의 다시 세우게 된 것입니다 -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종교개혁은 베드로 '성전'건축을 위한 모금 운동에 대한 거부로 시작되었습니다. 면죄부는 바로 성전체제를 유지하려던 로마의 종교귀족들이 고안해낸 종교적 사기극이었습니다. 따라서 마르틴 루터의 저항은 교황 중심의 성전체제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종교개혁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 개신교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점점 더 보수화되고 있는 한국교회는 서로 보다 더 큰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도 없는 성전을, 하나님께서 버리셨고, 예수가 거부했던 그 성전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혹은 예수의 이름으로 한국교회가 다시 짓고 있습니다!
아직도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시대착오적 무지의 소치일까요? 아니면 의도된 종교적 사기극을 연출하기 위한 것일까요?
목회자들은 그들의 건축한 '성전'의 크기를 그들의 목회성공의 척도로 삼고 있습니다. 큰 '성전'을 짓는 목회자들은, 그들이 어떤 종교적 사기극을 벌였든 간에, 그들이 교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떠넘겼든 간에, 그들이 그 성전체제를 통해 어떻게 종교귀족 행세를 하고 있든 간에, 훌륭한 지도자로 추앙을 받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세하게 됩니다. - 여러분은 그러한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하나님은 성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디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있는 '삶의 현장' 한복판에, 바로 거기에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현존하십니다. 바로 거기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아니, 온 세계가, 온 우주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던가요? 그런데도 하나님을 인간이 지은 건축물에 유폐시켜 놓으려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요? 인간을 위한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이미 폐기처분한 성전을 종교지도자들은 왜 아직도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성전'이 있어야 '성직자'가 있고, 종교귀족들은 평신도들을 효율적으로 길들일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성전이 있어야 종교귀족들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온갖 특권을 누릴 수 있으며, 온갖 탐욕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 아닌가요?
더 이상 성전을 세우지 마십시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임의 장소는 교'회당'이지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을 빙자하여 평신도들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는 그 평신도들을 위해 성전체제에 저항하였고, 결국 종교귀족들에 의해 십자가에 넘겨졌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인간이 지은 모든 '성전'들을 허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세계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꾸어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제사장의 후예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대제사장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유대 청년 예수의 뒤를 따르기 위해서 여기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