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아카이브

[윤응진]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메시야

한신대·기독교교육학과 교수

한신대학 신학부 채플 설교
1998. 11. 13.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메시야
(마가 8: 27- 34)

들어가는 말

교정을 덮고 있던 나뭇잎새들이 낙엽이 되어 우리의 발길에 부서지고 있습니다.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고, 우리의 가을 학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갓 대학생이 된 새내기들은 이른 바 '한신성'을 몸에 익히느라 정신없이 한 해를 보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이 바쁜 것은 졸업을 앞 둔 학우들일 것입니다. 졸업반 학우들에게는 이번 가을이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와 닿을 것입니다. 이제 지난 4년간의 충격과 갈등, 그리고 방황과 고뇌의 시간이 막을 내리려 합니다. 동시에 나름대로 완숙한 모습으로 교정을 나서게 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분을 혼란스럽게 하였던 것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늘 또 다른 의미에서 혼란과 충격을 경험하고 있는 사도 베드로의 체험을 증언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어쩌면 그의 체험이 여러분이 겪은, 혹은 아직도 겪고 있는, 아니면 앞으로 겪게 될 혼란의 원인과 의미를 밝혀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1. 제자들의 좌절과 저항

오늘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일종의 여론조사인 셈입니다. 제자들은 유대 민중들의 여론을 전합니다. 당시 일반인들은 예수님을 예언자 전통에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론조사는 제자들에게 아무런 충격이나 갈등을 초래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제기된 질문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제자들의 '신학적 실존'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객관적인 여론조사의 결과로만 대답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자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게 될 것입니다. 이 질문은 첫 번째 질문과 마찬가지로 제자들 전체를 향해 제기되었으나 대답에는 제자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베드로가 대표로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의 증언에는 베드로의 대답이 좀 더 확대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마태 16: 16) 마태의 증언에 따르면 이 신앙고백 때문에 시몬이라는 이름에 '베드로'라는 칭호가 주어졌습니다. 베드로의 희랍어 발음은 '페트로스'( )인데, 이것은 반석을 의미하는 '페트라'( )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이 반석, 곧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이처럼 베드로의 대답에는 제자들의 신앙고백, 더 나아가서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 응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에서 비로소 제자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그리스도인'들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니게 됩니다. 이 고백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은 아직 완벽한 것이 아닙니다. 이 고백은 아직 더 검증되어야만 합니다. 아직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 신앙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철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메시야 이해와 예수께서 지니고 있던 메시야 이해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사건은 이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배척받고,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명백히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바로 예수님을 메시야로서 고백한 그 베드로가 예수께 '항의'하였던 것입니다. 제자가 메시야에게 항의를 하다니! - 우리는 대체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마태는 베드로의 항의를 좀 더 부드럽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마태 16: 22) 누가는 아예 베드로가 예수께 항의했다는 증언을 삭제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수제자인 베드로의 이러한 행위를 후세에 전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누가가 분명히 알고 있었을 이 증언을 삭제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이 사건은 충격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에게 쉽게 비난을 퍼붓기 이전에, 먼저 베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한 그가 강하게 항의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항의는 분명히 이유 있는 항변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으로는 메시야는 고난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원수인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민족해방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고난을 받고 살해당해야 한다는 것은 패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는 항의는 정당한 것입니다. 당시에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마치 그가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대언 했듯이, 이제 동료 제자들의 항의를 대언 하고 있는 셈입니다.

베드로의 항의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책망은 혼란 속에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거나 격려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충격으로 몰아 넣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를 향해 메시야라고 불렀던 사랑하는 제자를 향해 지금 예수께서는 '사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적대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고난만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십자가의 고난'을 요구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실망은 얼마나 컸을까요!

2. 우리가 기대하던 메시야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우리는 능력 있는 메시야를 기대합니다. 과학 공상영화에서는 의례 강력한 초능력을 지닌 존재가 인류를 위기로부터 구하는 구원자로 등장합니다. 슈퍼맨, 배트맨, 그리고 터미네이터 - 헐리웃이 만들어 낸 메시야들은 한결같이 강력한 초인적 능력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설령 일시적으로는 고난을 받을지라도 패배를 모릅니다. 우리는 그들의 강함 때문에 그들에게 매력을 느낍니다. 세속적인 공간에서만 이러한 메시야가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전도지를 통해 선전하는 메시야도 한결같이 '능력 있는' 구세주입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도 고치고, 사업도 성공하게 하고, 대학입학도 보장하는 그런 '능력 있는' 메시야 말입니다. 교회첨탑 위, 그리고 교회당 전면에는 여전히 십자가가 세워져 있지만, 배척받는 메시야, 고난받는 메시야, 더구나 살해되어야 하는 메시야는 더 이상 소개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어떤 교회도 고난받는 메시야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가도록 사람들을 초청하지는 않습니다. 한결같이 '능력'있는 메시야를 받아들임으로써, 성공과 축복의 보장을 받으라고 선전할 뿐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어린이들은 입을 모아 노래합니다: "예수님 권세, 내 권세 ...."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살던 과거에서나 오늘에서나, 세속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기대되고 있는 메시야는 한결같이 강력하고 능력 있는 존재, 그래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 강력한 능력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할 존재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그런 기대를 지니고 예수님을 메시야로서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야를 따름으로써 고난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결코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등극하실 경우에 누리게 될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에 일반화되어 있던 메시야상과 대립되는 이 가르침은 불쾌하고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혼란과 갈등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기대를 확인시켜 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대를 송두리째 꺾어 놓습니다. 그들을 안심시키고 마음의 '평안'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불안과 좌절감을 초래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결코 복된 가르침이 아닙니다. 더구나 "십자가를 지고 뒤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위험한 선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난을 덜어 주러 온 메시야가 어찌 고난의 삶을 살라고 요청한다는 말입니까! 예수의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그를 메시야로 고백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제자들은 혼란과 갈등만이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 환멸과 절망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실존적 위기를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반대중들처럼 결국 그들도 그들이 메시야로 고백한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고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들의 이러한 불신앙과 어리석음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시간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진다는 것을, 고난은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너무 쉽게 공식처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부활절 이전에 서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절박한 형편을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혼란과 좌절, 갈등과 절망을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 역시 고난 없는 영광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고난 없이도 허락될 수 있을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계급적 신분상승을 누리기 위하여 한신의 교정에 들어섰던 것은 아닙니까? 또 고난 없는 영광만을 선전하기 위하여 졸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3. '한신성'의 뿌리

동화 '강아지 똥', 그리고 '몽실언니' 등을 쓴 작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권정생 집사님은 그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어느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설교에서 자신의 마지막 소원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감동적인 말씀을 하신 목사님은,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순교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그는 고난을 회피하는 그럴듯한 구실을 찾았던 것입니다. 권정생 집사님은 이 설교에 대하여 분노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의 분노를 표현합니다:

"이 목사님은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아예 잠들어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얼빠진 눈으로 시대를 보고 사회를 보고 설교를 한다니, 하늘이 울고 땅이 통곡할 지경이다.

이런 얼빠진 목사가 설교하는 교회에 무슨 빛과 소금과 사랑이 있단 말인가. 이런 목사야말로 새벽길에서 청소를 하다가 달리는 자동차에 치어 목숨을 잃은 청소부를 봐도 모른 척하는, 여리고로 가는 레위인이나 제사장과 같은 인간이다. 복지원에 수용된 부랑아들이 억울하게 죽어 가도, 아직 때묻지 않은 학생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죽고, 도시 변두리의 강제 철거민들이 추위에 떨어도 그런 건 복음과는 상관없다고 한다.

오직 교회를 증축하고 교인을 늘리고 하느님 이름으로 거룩한 예배만 드리면 되는 것이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둘 다 개천에 빠진다. 이래도 교회는 살아 있는가."(44)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성장을 이룩하였다는 한국 교회들은 과연 '고난받는' 메시야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까? 영광 받는 메시야에 도취되어서 불신앙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배척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으로 부르는 그의 초청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하나님 나라의 선봉대들입니까? 항의하던 베드로처럼 고난 없는 영광만을 기대하는 종교인들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님들의 관심은 어디에 자리잡고 있습니까? 너무나 세속적인 권위, 명예, 물질욕과 성취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고난받는 메시야보다는 영광의 그리스도를 앞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출애굽의 하나님 야훼, 곧 지금 고난받고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메시야는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나세렛 예수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속 한복판에서 고난받음으로써, 고난을 초래하는 자들이 아니라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한 메시야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현실적 고난으로부터 도피하거나, 고난을 초래하는 자들과 타협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유대 청년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서의 증언이 우리의 신앙을 다른 종교의 신앙으로부터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 성서의 증언은 오늘날도, 즉 부활절이후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되기까지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에 관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이 부름이 우리를 다른 종교인들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고난받은 디이트리히 본회퍼처럼 이 기독교의 특수한 메시지와 요청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베드로가 원했던 메시야가 아니라 그가 '원하지 않았던', 그래서 '항의'할 수밖에 없던 그 메시야를 그리스도로서 고백합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것은 그가 원하지 않았던 그 메시야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진 바로 그 베드로입니다. 사람의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부인한 그 베드로입니다. 그가 몸으로 실천한 신앙의 삶에 의하여 그의 신앙고백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 22-24)

이른 바 '한신성'이라는 것은 다름아니라 이 성서적 증언을 현실화시키려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의 투쟁 전통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광을 누리는 전통이 아니라, 이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메시야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전통입니다. 후배 학우 여러분, 여러분은 이 전통의 담지자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느꼈던, 혹은 느끼고 있는 당혹감, 갈등, 두려움들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만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선배들인 교수님들도, 그리고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경험했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지전능하고 승리하는 영광 받는 메시야에게서 우리의 구원자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히려 배척받고 죽임까지 당한 고난받는 종의 모습에서 우리의 메시야를 찾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메시야! 그 분만이 우리에게 참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사렛 예수의 뒤를 따르고자 원합니다.

나가는 말

이 가을, 미련 없이 낙엽들을 버리고 가난해진 나뭇가지들처럼, 우리가 원하던 메시야상들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메시야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고난의 길을 걷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비울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옛 잎새들을 간직하는 나뭇가지들은 새봄에 새싹을 틔울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메시야와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우리의 옛 꿈과 기대들을 버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고난받는 메시야에게서 참 생명의 역사가 시작됨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의 고백에 참여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AI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

옥스퍼드대 수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존 레녹스(John Lennox) 박사가 최근 기독교 변증가 션 맥도웰(Sean McDowell)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간「God, AI, and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여성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도 계승해야"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가 「한국여성신학」 2025 여름호(제101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서방교회와는 다르게 동방교회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극단적 수구 진영에 대한 엄격한 심판 있어야"

창간 68년을 맞은 「기독교사상」(이하 기상)이 지난달 지령 800호를 맞은 가운데 다양한 특집글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1945년 해방 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경재 교수는 '사이-너머'의 신학자였다"

장공기념사업회가 최근 고 숨밭 김경재 선생을 기리며 '장공과 숨밭'이란 제목으로 2025 콜로키움을 갖고 유튜브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