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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진]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한신대·기독교교육학과 교수

한신대학교회 설교
1999. 5. 9.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신명기 5: 16, 마태 15: 3-9.
참고: 잠언 23: 22-25, 에스겔서 22: 7; 막 7: 9-13, 13: 12, 에베소서 6: 1-4)

(* 지오디의 "어머님께"를 듣고 증언을 시작한다)
1. 들어가는 말: 신세대의 '어머니 기억' (G.O.D)

어제는 어버이날이었습니다.

어버이날이라지만 우리는 이 날이 돌아올 때마다 어머니들의 수고와 고난을 먼저 기억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남편 없이 혼자의 힘으로 자식들을 키운 어머니들의 수고와 고난의 삶들이 우리들의 콧등을 시큰거리게 만드는 계절입니다.

이 계절이 되면 우리는 흔히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되는, 양주동이 작사한 "어머니의 은혜"를 목청껏 부릅니다. 나이든 분들은 오래 전에 유행했던 대중가요, "불효자는 웁니다"를 마음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저는 신세대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가 제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방금 들으신 노래, G.O.D가 부른 "어머님께"는 양주동의 노랫말보다 더 가슴아프고,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랫말보다 더 정서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 바치는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머님께 (G.O.D)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몇 번 한 적이 없었고, 일터에 나가신 어머니 집에 없으면, 언제나 혼자서 끓여 먹었던 라면. 그러다 라면이 너무 지겨워서 맛있는 것 좀 먹자고 대들었었어. 그러자 어머님이 마지못해 꺼내신 숨겨 두신 비상금으로 시켜 주신 자장면 하나에 너무나 행복했었어. 하지만 어머님은 왠지 드시질 않았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야이 야아아...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후회하고 눈물도 흘리고, 야이 야아아... 그렇게 살아가고, 너무 아프고, 하지만 다시 웃고"
중학교 일 학년 때, 도시락 까먹을 때 다같이 함께 모여 도시락 뚜껑을 열었는데, 부잣집 아들 녀석이 나에게 화를 냈어. 반찬이 그게 뭐냐며 나에게 뭐라고 했어. 창피해서 그만 눈물이 났어. 그러나 그 녀석은 내가 운다며 놀려댔어. 참을 수 없어서 얼굴로 날아간 내 주먹에 일터에 계시던 어머님은 또 다시 학교에 불려 오셨어. 아니 또 끌려오셨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며 비셨어. 그 녀석 어머님께 고개를 숙여 비셨어, 우리 어머니가 비셨어.
아버님 없이 마침내 우리는 해냈어. 마침내 조그만 식당을 하나 갖게 됐어. 그리 크진 않았지만 행복했어. 주름진 어머님 눈가에 눈물이 고였어. 어머니와 내 이름의 앞 글자를 따서 식당이름을 짓고 고사를 지내고, 밤이 깊어 가도 아무도 떠날 줄 모르고 사람들의 축하는 계속되었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갔어. 피곤하셨는지 어머님은 어느 새 깊이 잠이 들어 버리시고는 깨지 않으셨어, 다시는. "난 당신을 사랑했어요. 한번도 말을 못했지만 사랑해요. 이젠 편히 쉬어요. 내가 없는 세상에서 영원토록.">

양주동의 노랫말이 일반적인 어머니의 수고를 그려 주고 있다면, 이 노랫말은 홀로 자녀를 키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가난한 어머니의 고난을 담고 있습니다. 양주동의 노랫말이 일반적인 모성애 에 대한 추상적인 찬양을 담고 있다면, G.O.D가 부르는 이 노랫말은 사회적으로 고난받고 있는 구체적인 어머니의 희생을 담고 있습니다.

비상금을 털어 시켜 준 자장면을 먹으며 행복해 하는 아이, 그 아이는 이제 그 때가 너무나 행복했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기억은 다음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어머님은 왠지 드시질 않았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철없는 아들의 행복을 위해 어머니는 자신의 욕망과 행복을 외면합니다. 여기에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우리들의 어머니들의 모습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의 볼품없는 도시락이 문제되는 사회, 가난하고 억울한 아이의 엄마가 교만한 부잣집 아이의 엄마에게 고개 숙여 빌어야 하는 학교의 현실 속에서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난의 결실이 익어 식당을 개업한 날, 어머니는 과로로 숨지고 맙니다.

숨진 어머니 앞에서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고백을 들을 어머니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어머니에 대한 '불효'가 한이 되어 목매어 울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어머니는 고난의 원인이 된 '나'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시길 빌면서 아들은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 노래를 듣노라면 아들의 절제된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 되어 긴 여운을 남깁니다. 신세대들의 입으로 부른 노랫말이 마치 슬픈 드라마의 영상처럼 우리의 가슴을 파고듭니다. 신세대들이 고난을 헤쳐 간 어머니 세대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세대는 저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른 세대와는 달리 '불효자'의 슬픔과 한에 빠져서 울부짖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제된 슬픔을 가슴에 안고 자신의 길을 걷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반복되는 후렴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야이 야아아...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후회하고 눈물도 흘리고, 야이 야아아... 그렇게 살아가고, 너무 아프고, 하지만 다시 웃고".

2. 지키기 힘든 계명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경청한 말씀을 통하여 "부모를 공경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첫 부분과 인간들과 관련된 두 번째 부분을 잇는 계명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대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지키기 쉬운 계명이 아닌가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직접 부모를 공경하라고 촉구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단순히 부모가 너를 위해 희생했으니 감사하고, 순종하고, 효도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권고가 아닙니다. 지금 이 계명은 출애굽세대보다는 오히려 출애굽을 경험하지 못한 신세대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신세대가 공경해야 하는 그들의 부모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바로의 채찍 아래에서 노예로서 살아가던 세대, 천신만고 끝에 출애굽을 경험한 세대, 이제는 약속의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세대가 아닙니까?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구체적으로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그 부모세대의 '생존'을 위해 '경제적인' 부담을 짊어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랍비들은 부모에 대한 이 계명이 전체 율법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계명이라고 간주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늘 이 계명은 독자적인 생존능력을 상실한 부모세대에 대한 구체적인 부양을 촉구하는 명령으로서, 경제적 능력을 장악하고 있는 세대들이 경청하여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계명을 지키기에는 또한 다른 부담들과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담들과 문제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첫째로, 자녀들의 인간적인 삶은 부모들에 의하여 부양될 뿐만 아니라, 손상되고 파괴되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은 성장과정에서 부모에 의하여 보호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깊은 상처를 받게도 되는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이 점을 더욱 주목하고 있습니다. 부모에 의하여 상처를 받은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부모로부터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들을 받은 자녀가 있다면, 그에게 단지 부모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공경하라는 윤리적 요구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입니다.

- 둘째로, 특정한 상황이나 인간 발달의 특정한 단계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와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춘기에 이른 자녀들은 부모에 대하여 거리를 유지하려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부모의 지시를 그대로 순종하기를 거부합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들에게 강압적인 명령을 내리는 부모가 있다면, 그들은 자녀들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모험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부모에게 무조건적인 순종을 하지 않는 것은 이른바 '불효'때문이 아니라 성숙을 위한 과정에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러한 '반항'은 요청되는 것입니다. 비록 자녀들의 '거부'가 부모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자녀들이 독립된 인격으로서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자녀들에게 효도라는 명목으로 무조건적인 순종만을 강요한다면, 자녀들의 인격에 치명적인 장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이른 바 '효도' 때문에 성숙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른 바 '마마보이'들을 발견합니다.

- 셋째로, 부모들의 세대가 이루어 놓은 '업적'들이 인정받을 수 없을 때, 오히려 부모 세대가 이루어 놓은 일들이 역사적 심판대 앞에서 비판을 면할 수 없을 때, 부모 세대와 자녀들의 세대가 함께 더불어 살기가 힘들게 됩니다. 학생운동이 유럽을 강타하던 1960년대에, 독일의 젊은이들은 나치 시대를 이끌었던 부모 세대의 죄악과 권위주의에 대하여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 세대의 역사와 업적은 단지 '부모' 세대가 이루어 놓았다는 이유만으로 용납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과거청산'이 주요 과제로 등장하였던 때가 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는 '과거청산'이란 부모세대가 이루어 놓은 역사와 업적들, 전통들과의 단절을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어려움들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일상생활의 현실 속에서는 결코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이 계명은 우리를 '좁은 길'로 초대합니다.

그러나 이 계명은 세월이 변했고, 상황이 변했다는 이유로 외면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시대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이 계명을 사용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3. 성서적 메시지의 의미

그럼 오늘날 우리가 이 계명을 통해 경청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 우선 인간생활의 질서는 하나님과 관련 없이 독자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종교적인 관심이나 경건에만 관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결코 외면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두 번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핑계로 부모에 대한 공경을 실천하지 않는 위선자들을 비판하십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헌신적인 종교생활을 실천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이유 때문에 부모에 대한 부양을 외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계명은 어린 자녀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있는 가장들에게 주어진 계명입니다. 부모를 부양하면서 동시에 스스로가 부모로서 자녀들을 양육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세대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 이 계명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계명이 십계명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출애굽의 하나님 야훼께서 구원받은 히브리인들에게 제시하신 삶의 지침들입니다. 즉 십계명은 자유인으로서 새로운 땅에서 새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사명을 지닌 사람들에게 제공된 삶의 지침들입니다. 다섯 번째 계명의 후반부는 바로 이러한 배경을 명백히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주 너희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린)다"(신명기 5: 16).

이 계명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땅에서 오래도록 축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약속의 조건이 부모에 대한 공경으로서 제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6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계명을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시는 목적은 허락하시는 '땅'에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상에서 자유롭고 사랑이 넘치는 삶, 곧 구원받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 이 계명이 선포된 것입니다. 계명은 생명을 보전할 뿐만 아니라 생명이 번성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유와 사랑이 넘치는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또 그런 삶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제시된 것입니다.

- 그러나 이 계명은 결코 자녀들을 가부장적인 권위주의적 가족구조 속에 묶어 두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유교적인 의미의 '효도'를 강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계명들은 고정된 틀이나 구조 속에 인간을 묶어두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계명들은 인간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생활을 위한 방향제시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이 계명도 바로 인간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삶의 지침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5계명을 철저히 실천한다는 것은 가정이라는 공동생활의 불합리하고 억압적인 구조나 전통을 감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의 해방적인 기본관심사에 배치되는 억압적인 구조는, 비록 그것이 가정생활 영역에서 전통으로 굳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오히려 변혁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출애굽의 자유가 이 계명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모는 우리들보다 앞서서 삶을 살았던 인생의 선배들입니다. 우리는 부모에 의해 세상에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 의하여 사회 속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부모세대를 통해 인류의 문화 유산을 전수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세대와 우리에게 주어진 전통과 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환경과 전통들을 무시하고 홀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전통에 대한 비판도, 자유를 향한 발돋움도, 바로 역사적으로 주어져 있는 기존의 것들을 토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결코 부모나 부모세대를 '숭배'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즉 부모와 전통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포기하고 예속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를 공경한다'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인정하고" 그를 진지하게 대하고 경솔히 과소평가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부모를 숭배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인생의 선배로서 진지하게 대하고 경솔히 과소평가 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의 경험과 업적, 그리고 부모세대의 역사적 문화적 유산들은 결코 무조건적으로 수용되거나 숭배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와 전통적인 질서들에 예속되어서는 안되겠지만, 부모와 전통적인 질서들을 송두리째 거부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와 그들이 이룩한 전통적 질서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인정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여야 할 것이며, 타당한 것들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요청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대화적이고 변증법적인 관계 속으로 안내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 안에서만 우리의 자유는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은 결코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의존하는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를 존경하되, 부모에게 종속되지 않는 '성숙한' 자세로 살아가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종속적인 위치에 세워 두고 임의로 조종하거나 자녀들이 부모들을 소중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가 단절된다면, 참된 출애굽, 참된 공동의 해방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들로부터 숭배를 받으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대화적이고 변증법적인 의미에서 '존경'을 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요청은 이런 의미에서 부모에 대한 자녀의 자세만이 아니라, 자녀에 대한 부모의 바른 자세를 함께 요청하고 있습니다.

4. 맺는 말
지금 부모를 공경하라는 요청 받고 있는 우리는 한편으로는 이 계명을 듣는 자녀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계명이 언급하고 있는 부모들입니다. 이 계명을 듣고 있는 어린이나 청년들도 머잖아 부모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자녀를 위한 의무를 일깨워주는 계명일 뿐만 아니라, 참된 의미에서 공경 받도록 노력하여야 하는 부모를 위한 계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모든 계명들이 다 그렇듯이, 이 계명도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재해석되고 재적용되어야 합니다. 새롭게 해석할 경우에 늘 문자보다는 정신을 살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은 과거의 대가족제도가 거의 사라지고, 핵가족제도가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더 빨리 사회가 변화되고 있으며, 또한 새로운 정보들이 쏟아지는 정보화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늙으신 부모와의 관계에서 그들에 대한 부양의 의무감이나 존경이 사라지기 쉽습니다. 더구나 세대차이로 인한 갈등으로 인하여 관계가 단절되기 쉽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이 계명은 우리 각자에게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 것일까요?

동시에 우리들이 어린 자녀들에게 이 계명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할까요?

"자장면이 싫다"고 하신 저 어머니처럼 자신들을 희생하신 부모들께 우리는 어떻게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존경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 자신이, 자녀들에게 "나는 자장면이 싫다"고 말하면서도, 그 희생과 양보의 대가를 자녀들로부터 요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또 어떻게 자녀들이 우리들에게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존경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처럼 이중의 과제들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늘 부모와의 관계에서, 또 자녀와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유와 사랑의 삶, 공동체적 삶은 어떤 것인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음대로 살아갈 용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가정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영역이 되고, 가정에서의 일상생활이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으로 충만한 복된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격려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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