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1998. 4. 12.
도마의 부활절
(시편 118: 15-24, 요한 20: 19- 29)
1. 암울한 시대의 부활절, 형식만 남은 부활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계절은 생명이 약동하는 봄입니다. 그러나 경제적 상황은 한겨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봄의 감격을 나눌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시장경제체제의 냉혹한 생존경쟁원칙에 의해 도태된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위기 속에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방황하며 거리를 헤매다가 자선단체가 베푸는 한끼 식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노인이나 장애인만이 아니라 한때는 잘나가던 중소기업 사장이었던 사람들도 그 대열에 끼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에 봄을 찬양한다는 것은 너무나 한가한 사람들의 사치처럼 여겨집니다. 더구나 상식을 깨뜨리는 '부활'의 감격과 기쁨을 증언한다는 것은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의 환상으로 여겨질 것만 같습니다. 이처럼 암울한 시대에 부활절을 맞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부활절은 기독교의 절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절기입니다. 사실 성탄절보다도 더 깊은 의미를 지니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성탄절이 그렇듯이 부활절도 정확히 어느 날이 첫 번 부활의 날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승인을 얻고 난 후인 서기 4세기에 지키게 된 성탄절이 태양의 세력이 힘을 얻기 시작하는 것을 축하하는 동지제 축제와 결부된 것처럼 역시 4세기초에 지키기 시작한 부활절은 낮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춘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춘분이 지난 후 첫 번째 만월 후 첫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절기가 태양의 운동과 관련을 지니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선교과정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는 유럽민족의 종교적 관습을 받아들여 일종의 종교적 흡수통합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에는 계란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가 부활의 상징으로 활용됩니다. 독일에서는 봄에 번식력이 강해지는 토끼가 '부활절 토끼'로 둔갑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이 '부활절 토끼'가 사탕이나 쵸콜렛 종류를 선물하기를 기대합니다. 저도 귀국하던 해에는 아이들에게 '부활절 토끼'의 이름으로 된 편지와 함께 과자류를 선물했습니다. 아이들은 독일의 '부활절 토끼'가 한국에까지 찾아 온 것을 신기해하며 마냥 기뻐했습니다. 이러한 풍습들은 기독교가 일반인들의 정서 속에 뿌리박도록 하는 데에 어느 정도 기여했을 것입니다. 특히 색계란이나 '부활절 토끼'의 선물은 어린이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간접적으로 느끼도록 도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른들마저도 이러한 류의 유치한 사고에 머물러 있을 경우에 부활의 의미는 왜곡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증언하여야 하는 부활의 메시지는 어떤 자연현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새로운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전혀 새롭게,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신앙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간 도처에서 부활절 축하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제자들을 사로잡았던 그 부활의 '감격'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감격'스럽고 '기쁨'에 넘치는 심정으로 이 예배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부활의 메시지를 너무나 쉽게 받아들임으로써 부활절은 단지 또 하나의 종교적 행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고는, 제자들의 좌절과 죄책감과 두려움에 동참하지 않고는 부활의 감격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교회들은, 그리고 우리들은 그러한 전제들 없이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것은 아닌 가요? 우리는 이 시간 고난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되찾은 히브리 신앙인의 감격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감격, 특히 도마의 감격을 되새기면서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2. 이스라엘 신앙인의 감사 찬양: 부활 신앙의 싹
시편 118편은 시편의 시들 가운데 매우 훌륭한 찬양시들 중의 하나입니다. 학자들은 이 시를 '개인 감사시'로 분류하고(궁켈), 남왕국 유대의 왕 히스기야가 쓴 시일 것으로 추측합니다(왕하 20: 1-11). 히스기야는 강대국 아시리아에 의하여 왕국이 붕괴될 위기의 시대에 유다 왕국의 통치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순종하는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위기의 시간에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죽음이 임박해 온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가 질병을 이기고 다시 일어서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다시 성전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경배하도록 허락을 받았고 그의 평생에는 유다의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가 이 시를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어느 개인의 시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적 고난과 고난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주제는 히스기야 개인의 신앙고백일 뿐만 아니라 히브리 신앙인들의 일관된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생명의 위기에 직면한 신앙인을 하나님께서 구출해 주신 은총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신앙인은 그의 각오와 깨달음을 이렇게 노래합니다(이하 공동번역) :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야훼께서 하신 일을 널리 선포하리라.
야훼께서는 나를 벌하시고 또 벌하셨지만,
그러나 죽게 버려두지는 아니하셨다."(17-18)
그리고 시인은 성전에 들어가 정의의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그는 야훼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 야훼께서 하신 일이다."(22)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쓸모 없이 버림받은 민족을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기 위한 초석으로 세우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구원의 드라마가 보여주는 이 역전(逆轉)이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인 것입니다. 이 시는 강한 자들과 강한 나라들에 의해서 고난받고 있는 어느 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의 우연한 구원사건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하나님의 지배, 하나님의 통치의 기본적인 노선을 찬양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시편의 시들 중에서 이 시를 가장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는 "제왕, 친지들, 성자들도 도움이 되지 못할 때 이 시는 나를 큰 위험에서 구해 주었다"고 말했다 합니다. 교황청에 저항하는 위험하고 외로운 싸움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에게 고대 히브리 신앙인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이 찬양시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확신을 지니도록 도왔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신앙이 바로 부활신앙의 싹이 되었던 것입니다.
3. 부활절의 현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요한복음 20장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네 가지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증언은 막달라 마리아, 요한, 베드로가 확인한 '빈 무덤' 목격담을 전하고 있으며, 두 번째 증언은 부활한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경청한 바와 같이 세 번째 증언은 열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에 대한 증언을, 그리고 네 번째 증언은 도마를 포함한 열 한 명의 제자에게 나타난 주님에 대한 증언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네 번째 증언은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특수한 증언입니다.
오늘 경청한 말씀에 따르면, 빈 무덤에 대한 목격과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 증언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들 모두 닫아걸고"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철저한 패배에 대한 허탈감, 선생님을 배신한 자신들의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살인자들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목표는 상실되었고, 꿈은 무참히 짓밟힌 채,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여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한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바로 죽음의 현실의 포로가 된 그들에게, 평화부재 상황에서 고통받고 있는 그들에게, "여러분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를 하십니다. 이 인사는 '평화'를 약속하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이 '평화'선언은 그들을 죽음의 시간에서 생명의 시간으로 옮겨 놓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과제를 제시하십니다. 그들을 하나님 나라 혁명의 전사들로 세상에 파송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새로운 삶의 목표를, 따라서 새로운 미래를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한 주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제자들에게는 스스로가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삶을 살도록 허락된 것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는 그 열 제자들로부터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놓쳤다는 것입니다. 그는 왜 제자들의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홀로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에게는 좌절감이 어느 누구에게보다도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 아닐까요? 처절한 절망감이 그를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이탈하도록 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추측은 부활의 증인들인 제자들에게 그가 한 말을 통하여 더욱 신빙성을 얻게 됩니다. 그는 제자들의 증언을 믿기를 거부합니다. 그는 스스로가 부활한 주님의 손과 옆구리에 있을 '못자국'을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 때문에 우리는 그를 '의심 많은 자'라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성서는 다른 열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도마와 같은 태도를 지녔던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도마의 의심은 바로 제자들의 의심이기도 했고, 당시의 모든 사람들의 의심이기도 했으며, 또한 우리들의 의심이기도 합니다. 그의 의심은 상식 있는 사람은 누구나 지녔을 의심입니다. 이 의심조차 지니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부활에 관심이 없거나 상식마저 지니지 못한 맹목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요한 복음 11: 16의 증언에 의하면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제자들을 부추긴 용감한 사람입니다. 또한 14: 5이하에 의하면 그는 합리적인 회의주의자로 보도되어 있다.)
도마는 정직합니다. 그는 모르면서도 안다고 하지 않았으며,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식을 지니고 있는 양식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것을 쉽게 믿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의심'은 그가 맹목적인 신앙인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바로 이 도마에게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손바닥을 만져 보고 옆구리를 확인하게 허락하십니다. 그리하여 바로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가 부활하신 주님과 동일한 분임을,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히 '유령'의 귀환이 아님을 확인하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야훼 하나님에 의한 구원의 드라마가 보여주는 철저한 역전(逆轉)이 확인됩니다. 역사적 경험은 강자의 승리를 '상식'으로 여기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패배자를 통하여 새 역사를 여십니다. 부활한 예수를 통하여 도마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도마의 인식도 변화됩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건 고백입니다. (누가 사형수를 향하여 이런 엄청난 고백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도마의 이 고백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대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이 고백에 충실하였으므로 로마 황제를 주님으로 섬기기를 거부하였고, 마침내 로마의 평화를 깨뜨리는 반체제 세력으로 몰려 처형당해야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종교적, 정치적 지배계급이 그에게 낙인찍은 것처럼 범죄자, 패배자,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세속적 판단과 평가를 완전히 뒤엎고 승리자, 심판자, 메시야, 더 나아가 하나님과 같은 신적인 존재로 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이 고백에서 예수의 삶과 고난에 대한 해석이 급격히 전환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 대한 태도가 변화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위치와 사명이 새롭게 이해되게 됩니다. 바로 이 신앙고백을 통하여 도마도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제 그의 '상식'이 깨뜨려집니다. 이제 그는 그의 절망과 좌절로부터 해방을 경험합니다. 그의 방황은 끝나고 그에게는 새로운 삶의 목표와 새로운 삶이 의미가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용기와 새로운 삶의 보람이 솟아오르게 됩니다. 그는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순교를 당했다 한다. 오늘날도 인도에는 "말 도마 교회"가 남아 있다고 한다.
4. 우리의 찬양, 우리의 새로운 삶
오늘 날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그의 부활을 믿습니까? 아니, 그의 부활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바르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현실에서 문제되는 것은 생물학적 상식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상식, 종교적 상식이 근본적으로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체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과학적 질문보다는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정치적, 종교적 질문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부활을 종교적 사건으로만 국한시키려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이 사건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간과합니다. 물론 이 사건은 하나님에 의하여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종교적 사건임에는 틀림없으나 십자가 처형이라는 정치재판의 결과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결코 인간의 육체적 한계인 자연적인 죽음을 극복한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비자연스러운 죽음, 곧 정치적 종교적 지배자들에 의하여 강요된 죽음, 세속적 종교적 판단 기준에 의하여 자행된 심판에 대한 거부인 것입니다. 부활은 그것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현실을 시작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을 심판한 정치적 종교적 지배자들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들의 정치적 종교적 논리들과 지배이념들이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지배적 가치관이 심판 받게 됩니다. 그들이 악하다고 한 것이 선한 것이며, 그들이 선하다고 한 것이 악한 것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야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혁명 사건입니다. 새로운 창조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지난해 말, 군사정권 아래에서 사형수로 심판 받았던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습니다. 사형수였던 대통령의 출현은 세계 언론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고, DJ의 성공은 '20세기 마지막 인간 승리'라고 보도되었습니다. 이제 사형수가 대통령이 되면서 그 동안 지배하던 자들의 각종 범죄행위와 비리, 구조적인 부정부패와 타락상이 천하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국가안보를 위하여 봉사해야 하는 안기부가 오히려 정권안보를 위하여 북한과 손잡고 이른바 '북풍'공작을 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경악하게 됩니다. 지금은 어두웠던 역사가 종말을 고하고 역사적 진실이 밝혀지는 시대입니다. 사형수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가능하게 된 귀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사형수로 처형당한 유대청년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증언을 경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형수가 메시야로서 다시 살아났다는 놀라운 사건을 증언하는 증인들의 경험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된 사형수의 이야기에 비교될 수 없을 더 엄청난 혁명적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도마의 '의심'은 정상적인 것이며, 우리는 그의 의심에 참여합니다. 그런 일은 우리의 상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혁명은 희망사항이지 현실화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고 "예수 천당"이라는 슬로건 아래로 모여듭니다. "예수 천당"이라는 슬로건은 현실을 변혁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앙을 거부합니다. 현실변혁은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저 세상"에 대한 신앙과 희망은 이 세상을 변혁하기 위하여 세상 속으로 제자들을 파송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합니다. 거기에는 부활의 감격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천당"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이 땅으로 부활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킴으로써 로마 황제와 유대교의 대제사장의 권위와 판단기준, 그들의 통치를 부정하고 거부하시며,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지배, 곧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본격적으로 현실화시키기 시작합니다. 어떤 절대권력도 하나님의 정치를 가로막지 못합니다. 이제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이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살아가도록 새로운 삶의 사명을 제시하십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도마처럼, 오늘 새롭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보잘 것 없는 우리도 다시금 세상 속으로 파송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힘없는 사람들을 불러 부활의 증인으로서 부활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도 이제 저 히브리 신앙인들의 찬양과 감격이 우리의 찬양과 감격으로 됨을 경험합니다. 아니, 그들의 감격보다 더 큰 감격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훼의 오른손이 힘을 떨치셨다!
야훼의 오른손이 번쩍 들렸다.
야훼의 오른손이 힘을 떨치셨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야훼께서 하신 일을 널리 선포하리라. ......."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의 부활을 되새기는 날, 이 노래는 우리의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에 대하여 감격하여 우리의 생각과 신앙, 우리의 삶 자체를 새롭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보십시오. 야훼 하나님은 어둠을 몰아내고 새 역사가 동트게 하십니다. 강한 자들이 지배하고 착취하던 이 나라에 하나님은 버림받았던 사형수를 통하여 한국을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를 이제 새로운 역사 창조를 위하여 부르십니다. 우리의 삶은 새로운 의미와 목표를 획득하게 됩니다. 바로 이 암울한 세계 속에서, 아니, 이 어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제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아남아야만 합니다!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
야훼께서 하신 일이다.
이 날은 야훼께서 내신 날,
다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이 기쁨의 찬양에 우리 모두 함께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