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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진] 실패할 수 있는 용기

한신대·기독교교육학과 교수

대학교회 설교
2000. 4.9.
실패할 수 있는 용기
(왕상 22:13-28, 마가 14:32-36)

윤응진

1. 성공지향적인 사회 풍조

새 천년과 함께 무한경쟁 시대가 도래했다고 합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최고의 가치, 우리의 삶의 최고의 목표는 성공하는 것입니다. 성공이란 대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리게 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많은 국회의원 후보들이 성공하기 위해 금품을 뿌리는가 하면, 상대방 후보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비방을 일삼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이른 바 성직자들도 목회에 성공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성공을 향한 경쟁은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사회를 인간다운 사회로 만들 수 있을까요?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람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을까요?

성공한 인생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 일본 '총리'가 과로로 쓰러졌습니다. 성공을 위해 밤을 지새우는 많은 벤처기업 종사자들의 건강과 가정이 파괴되고 있다고 합니다. 성공한 목회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사이비 종교지도자로 밝혀지기도 합니다.

성공지향적인 사회풍조 속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성공을 지향하기보다는 오히려 실패할 용기를 지녔던 신앙인들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2. 실패한 신앙인들

* 왕상 22:1-12절 줄거리: 오늘 우리가 경청한 첫 번 말씀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졌을 때 발생한 사건(기원전 9세기)을 담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22장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남왕국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길르앗에 위치한 라못을 시리아의 손아귀에서 탈환하기 위해 함께 전투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당시에는 북왕국이 더 강하여 남왕국은 북왕국에 종속되어 있었으므로, 유다 왕 여호사밧은 아합의 제안을 받고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자"고 제안합니다. 길르앗의 라못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새였으며 또한 경제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사백명이나 되는 어용예언자들을 모아 놓고 그가 계획하는 전투가 승산이 있겠는지 묻습니다. 예언자들은 아합의 전투가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왕의 계획이 곧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사백명이나 되는 그 많은 예언자들 가운데 왕의 전쟁계획의 부당성을 제기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궁전에서 일하던 직업적인 예언자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왕의 뜻과 계획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일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의 비위를 맞추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향유하는 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일종의 자기암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조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최고 권력자의 전쟁계획을 종교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일종의 전쟁신학의 논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업적인 종교인로서 그들은 왕궁의 특권계층에 속했으나 거짓예언자들이었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아합왕에게 묻습니다: "이 밖에 우리가 물어 볼 만한 주의 예언자가 또 없습니까?"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때로 진리는 외로운 목소리를 통해 들리기도 합니다. 남왕국의 왕은 지금 다른 목소리가 없는지 확인하고자 합니다. 거기에 진리가 담겨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합왕은 비로소 예언자 미가야의 존재를 유다왕에게 실토합니다. 아합은 미가야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습니다: "나는 그를 싫어합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무엇인가 길한 것을 예언한 적이 없고, 언제나 흉한 것만 예언하곤 합니다."(8) 아합 왕은 평소 그의 불길한 예언 때문에 그를 혐오하고 있었습니다. 아합은 예언자의 불길한 예언이 자신의 과오 탓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죄악을 예언자에게 전가함으로써 불길한 예언이 예언자의 탓이라고 여깁니다. 아합은 외관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묻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경청할 자세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어용예언자들의 자문만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유다 왕의 권유로 미가야에게도 자문을 구하기로 합니다.

우리가 경청한 말씀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미가야를 초청하러 간 특사는 미가야에게 다른 예언자들의 견해를 미리 전함으로써 발언의 수위를 조정하려 시도합니다. 왕의 특사는 예언의 기능을 국가정책 홍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대세에 따르라는 권고를 받고 미가야가 대답합니다: "나는 다만 주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말하겠습니다."(14) 미가야는 궁전에서 일하는 직업적인 예언자가 아니라 재야인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왕의 비위를 맞추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왕의 권력이나 제도 혹은 조직의 유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초월하여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경청하고 선포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가야는 왕의 질문에 대하여 거짓예언자들과 같은 말로 대답합니다(15절). 이러한 대답은 그가 협박을 받았거나 왕에게 아첨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 나온 구절들이 그가 어떤 예언자인지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대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아합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차라리 자기 꾀에 의해 스스로가 파멸하도록 방치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어쨌든 그의 발언이 너무 의외라서 아합왕까지도 그 말이 진실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합니다. 마침내 미가야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선포합니다. 아합왕은 거짓예언자들의 꾐에 빠져 결국 파멸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어용예언자들의 대표격인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칩니다. 그리고 아합은 분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미가야는 패배자로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물론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아합은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어용예언자들은 왕궁의 특권을 향유하는 특권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른 바 잘 나가는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총애를 받고 풍요롭게 살았을 테니 성공한 종교지도자들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그들의 반열에 끼지 못하고 모욕을 당한 채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그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신세로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실패한 '이' 예언자가 참된 하나님의 대언자였다고 증언합니다. 반면에 성공한 종교지도자들은 거짓예언자들로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가야만이 아니라 아모스와 예레미야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예언자들, 그리고 모세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세속적인 가치기준에 따라 분류한다면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3. 실패한 유대청년, 예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광경을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환영인파들의 환호성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호산나'를 외치면서 종려나무 가지들을 길에 깔면서 예수님의 행렬을 맞이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산나'는 '구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나 그 환호성도 그치고 지금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 성문 밖 동쪽에 위치한 작은 야산입니다. 예수께서는 세 명의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자신의 두려움과 괴로움을 고백합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34) 어떻게 스승이 제자들에게, 메시야가 인간들에게 이렇게 자신의 괴로움을 고백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가 두려움과 괴로움을 경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고백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그토록 두려워하며 괴로워하셨을까요?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을까요? 물론 십자가에서 처형당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십자가형은 인류가 고안한 처형방식 가운데 아마도 가장 끔찍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사형수가 살이 찢기는 아픔과 목마름, 그리고 낮의 따가운 햇살과 밤의 추위, 배고픔 등의 고통을 모두 맛보면서 서서히 죽어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그것이 무서워서 제자들의 동정심과 도움을 요청하는 것일까요?

십자가형에서 겪어야 할 고통 자체보다는 아마도, 그의 선교사역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절망감과 패배감이 예수님을 괴롭힌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포하고 가르쳤습니다. 아무리 로마제국이 막강한 폭력을 휘둘러대도, 아무리 헤롯과 대제사장 등 지배계층이 백성들을 착취하고 억압해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 정의와 평화가 현실화되는 세상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선포하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그 복음을 몸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성전을 장사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을 응징하였고(마가 10:15이하), 하나님의 몫까지 챙기는 로마황제를 비판(마가 12:13이하)하면서, 헤롯을 향해 여우같은 놈(누가 13:31이하)이라고 비판하면서, 예수님은 그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지배자들과 그들에게 충성하면서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예수님은 지배자들이 죄인이라고 규정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그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약속하는 메시야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악한 수단에 의존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낮고 천한 사람들을 섬기는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에 대한 기대와 환상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관심을 깨뜨리기 위해 발을 씻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군중도 떠나고 제자 가룟 유다마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의 방식이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아있는 제자들도 머지않아 떠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사람의 진정한 제자도 얻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마저도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의 심정을 헤아릴 어떤 존재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어린이가 아버지에게 매달리듯 매달립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36) '아바'는 아람어로서 원래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우리말의 '아빠'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은 구약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유대교에서는 드물게 확인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린이처럼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마치 어린이가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라는 간청은 십자가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이 기도는 깊은 고뇌에서 우러난 간청입니다. 이 기도는 진실된 신앙 위에서 드려지는 간청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참된 신앙의 기도가 되게 하는 것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간구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여기의 '그러나'가 예수님의 기도를 일반 종교적인 기도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기도로 바꾸어 놓는 도약대 역할을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앞부분의 간청에 머물고 맙니다. 대부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조건' 우리의 뜻대로 우리의 간청을 들어주실 줄을 '믿는' 그 믿음으로 기도합니다. 그것은 어린이가 아버지에게 생떼를 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서원기도 등 대부분의 기도생활이 이 전반부의 기도에서 머문다면, 그것은 야훼 하나님께 대한 기독교적인 신앙 위에 서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런 기도는 성황당에서도 드릴 수 있고, 무속인들을 비롯한 다른 종교인들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불경건한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농성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적 영성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실패, 자신이 겪어야 할 수치와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하나님께 매달렸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간청은 인간의 뜻에 불과함을 압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에 맡깁니다.
이 고통스러운 시간에 드린 기도에서 예수님은 '네 번 째 시험'을 극복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악한 세력과 타협함으로써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유혹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뜻에 굴복시킴으로써 나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유혹도 받습니다. 이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서적 의미에서 진정한 신앙인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실패에도 침묵하시는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분께 저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신 뜻에 전적으로 굴복시킵니다. 인간의 실패까지도 선하게 쓰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에 침묵하는 하나님께 절교선언을 합니다. 오직 나의 뜻을 성취시키는 신만을 하나님으로 섬기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비위에 맞는 맞춤형 하나님, 우리의 성공을 보장해줄 우상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부흥사들은 흔히 성공을 보장해주는 하나님을 세일즈합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마저 잠들어버린 그 시간에, 패배감과 절망감이 짓누르던 그 어두운 밤에, 바로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의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4. 실패할 수 있는 용기-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믿음

우리는 모두 성공하고 싶어합니다. 축복받는 삶의 징표를 보이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성직자'들마저도 성공하려 경쟁합니다. 교회를 더 부흥시키고, 더 큰 교회로 건축하고, 또 더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또 더 큰 교회를 짓고... 성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일단 성공하고 나면 성공사례들을 전하면서 유명인사로 데뷔합니다. 이름 없는 대학의 엉터리 박사학위도 따고, 총회장 자리도 넘보면서 성공의 계단을 더 높이 오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오르려 합니다.

많은 신학생들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런 선배 교역자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고 뒤를 쫓아가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신학은 교회성장에 장애요인으로 인식됩니다. 그래서 졸업식을 치르자마자 깨끗이 잊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묻기보다는 온통 관심이 어떻게 하면 교회를 더 부흥시키는가에만 집중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사 배후에는 대부분 물질욕과 인기욕 그리고 권력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증언하는 신앙인들은 수치와 고난, 그리고 실패로 삶을 마쳤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삶을 마쳤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실패의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명의 그리스도인도 만들어 놓지 못한 채 십자가에 달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고, 하물며 고난의 길에 동참할 자세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예언자들과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개인적으로 성실하지 못하거나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기 위하여 지배자들에게 저항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씨를 뿌리는 자들이었고, 열매는 하나님이 거두시리라는 믿음을 간직한 채 삶을 마감했습니다.

시인 박두진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마지막 내려 덮는 바위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믈같은 치욕을, 불붙는 분노를, 에워내는 비애를, 물새같은 고독을,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 꽝꽝 쳐 못을 박고, 창 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 입맞추어 배반하고, 매어달아 죽이려는, 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강할 수가 있었는가?
 
파도같이 밀려 오는 승리에의 욕망을 어떻게 당신은 버릴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패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약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이길 수가 있었는가? 방울방울 땅에 젖는 스스로의 핏방울로 어떻게 만민들이 살아날 줄 알았는가? 어떻게 스스로가 신인 줄을 믿었는가? 크다랗게 벌리워질 당신의 두 팔에 누구가 달려들어 안길 줄을 알았는가? 엘리.... 엘리.... 엘리.... 엘리.... 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가 매어달아, 어떻게 당신은 죽을 수가 있었는가? 신이여! 어떻게 당신은 인간일 수 있었는가? 인간이여! 어떻게 당신은 신일 수가 있었는가? 아! .... 방울방울 떨구어지는 핏방울은 잦는데 바람도 죽고 없고 마리아는 우는데, 마리아는 우는데, 인자여! 인자여! 마즈막 쏟아지는 폭포같은 빗줄기를 어떻게 당신은 주체할 수 있었는가?"(박두진, "갈보리의 노래II", {한국기독교시선}, 대한기독교교육협회, 1968, 82-83)

"엘로히 엘로히 라마사바흐다니?" - 이 고통스러운 비명은 틀림없이 실패자의 비명입니다. 그러나 이 비명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외쳐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실패를 통해서도 섭리하시는 그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이 비명을 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패배하심으로써, 오늘날 성공만을 추구하는 영리한 우리에게 참된 삶의 길을 보여주시는 메시야가 되십니다. 우리는 '이' 메시야를 증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메시야를 따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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