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아카이브

[윤응진] 예수의 믿음

한신대·기독교교육학과 교수

대학교회설교
2000. 2.13.
예수의 믿음
(신명기 10:12-22, 마태 4:1-11)
윤응진

1. 그리스도 신앙과 예수의 신앙

우리는 흔히 예수로부터 배우고 예수를 본받기보다는, 그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 안에 칩거하면서 모든 책임과 의무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보편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생활의 왜곡과 변질은 '예수'가 지니고 있었던 '신앙'을 고려하지 않은 '그리스도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고, 예수에 '대한' 신앙, 즉 '그리스도 신앙'을 일깨우는 데에만 몰두함으로써,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외면하였고, 예수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신앙과 그 신앙에서 비롯된 실천적 행동을 본받으려 충실히 노력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대교 신학자인 샬롬 벤-코린(Schalom Ben-Chorin)의 다음과 같은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나에게 영원한 형제, 즉 인간으로서 형제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형제이다. 나는, 내가 그를 따르도록 하기 위하여, 그가 형제로서 나를 붙잡는 그 손길을 느낀다. 그것은 메시야의 손이 '아니라', 상처 난 손이다. 그것은 '신적인' 손이 '아니라', '인간의' 손, 즉 그것의 손금들 안에는 가장 깊은 괴로움이 새겨져 있는 그 손이다.

.... 그것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신앙의 증인의 손이다. 그의 신앙, 그의 무조건적인 신앙, 즉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온전히 하나님의 뜻 아래 자신을 겸손히 낮출 준비 - 이것이 예수가 우리에게 본을 보인 그리고 우리를 -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 결합시킬 수 있는 바로 그 자세이다: ... 예수의 신앙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지만, 예수에 대한 신앙은 우리를 갈라놓는다."(Schalom Ben-Chorin, Bruder Jesus, M nchen 1977, S.11)

벤-코린은 '예수에 대한 신앙', 곧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 신앙'을 지니고 있지는 않으나, 예수를 그의 형제로 인식하고 그의 뒤를 따르기 위하여 '예수의 신앙'을 본받고자 한다. 반면에 우리는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 신앙'을 지니고는 있으나 '예수의 신앙'을 본받고, 그를 따르려는 노력은 외면하거나 소홀히 취급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도 '교인'들은 많으나, 예수의 진정한 '제자'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본래 초대 교회와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였던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의 신앙'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초대 교회의 신앙의 핵심은 "예수는 그리스도이다"(사도행전 2:36) 라는 고백 안에 함축되어 있다. 이 신앙고백을 하던 사람들은 '왜'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나라 혁명'을 선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고 실천한 바로 '그' 예수야말로,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세속적 지배자들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한 '히브리 신앙인'이었던 예수야말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이 신앙고백은 아직 구체적인 역사적 예수의 신앙과 그의 삶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럼 예수가 지니고 있던 신앙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가?

2. 예수의 신앙의 본질: 야훼 하나님께 대한 신뢰

예수의 신앙의 본질을 밝히 알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지녔던 기본적인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말씀은 바로 히브리적 신앙인들인 지녔던 신앙의 핵심을 증언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지금 주(야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주(야훼) 너희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모든 길을 따르며,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야훼) 너희의 하나님을 섬기며, 너희가 행복하게 살도록(!)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주(야훼) 너희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일이 아니겠느냐?"(신 10:12-13)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는 것은 세속적인 다른 세력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길만을 따르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세력의 유혹을 받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청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이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무리는 강대국 이집트의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된 히브리인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파라오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으며, 금송아지에 대한 환상에 머물 필요도 없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요청을 하는 분은 바로 출애굽의 하나님 야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요청은 인간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돕기 위한 은총의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실천과 긴밀하게 관련된다.

하나님은 마음의 할례를 요청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다는 외형적 표징(창 17:9-14)인 육체의 할례(16)는 특별한 '마음'가짐이 뒤따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신앙인들의 생활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과 사랑(18)을 보이는 윤리적 태도를 신앙의 실천 모형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은 뇌물을 받는 분이 아니다(17)! 하나님은 오히려 가난하고 힘없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생존권과 인권을 보호하는 분이다. 바로 그 은총의 하나님이 지금 그 가난한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도록 요청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나그네 설음을 기본 경험으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외국인과는 달리, 피난민이거나 이스라엘 이전에 가나안에 살던 사람으로서, 고향을 잃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는 보호 대상 시민을 의미한다. 그들은 보통 일반시민들의 기본권을 지니지 못하여 경제적으로 종속적 지위에 놓이게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의 처지를 악용하여 그들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함으로써 그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보호하려 한다. 출 22:21)

이처럼 출애굽의 하나님 야훼만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그분의 길을 걷는 것이 히브리적 의미에서 신앙인의 자세이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킴으로써 약자들을 보호하도록 요청받는다.

3. 예수의 신앙의 실천: 야훼 하나님의 뜻 실현을 위한 투쟁

예수는 히브리인들이 지니고 있던 신앙에 동참하여 그의 신앙을 고백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을 실천하였다. 시험설화는 예수의 삶 속에서 그의 신앙이 어떻게 실천되었는지 요약하여 보여준다. 시험설화는 예수의 공생애 시초에 발생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기보다는 예수의 신앙적 삶의 기본노선을 암시하고 있다.

(*악마= 사탄:
사탄은 대적자, 유혹자(삼하 19:22)를 의미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죄를 고발하는 고발자를 의미했으며, 포로기 후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사람들의 죄를 밝혀 아뢰는, 하늘 재판정의 고발자로 이해되었다. 훗날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하는 존재로 이해되었고, 신약시대에는 마침내 하나님의 적수, 곧 이 세상의 주로 행세하지만 마지막에는 정복되어 멸망할 악마로 되었다. 시험설화에 의하면, 악마도 성경을 알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다. 그러나 악마는 물질적 지향성, 인기주의적 지향성, 권력지향성을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세력이다.)

예수는 어떤 재능이나 자기과시적 기적, 혹은 권세를 통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조작하고 지배함으로써 메시야가 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인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메시야일지라도, 그리고 그의 목표가 아무리 경건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이용당할 수 없다!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큰 표적과 기사를 통해 사람들을 미혹하게 한다(마태 24:24).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야훼)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주(야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야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신 6:4-5)." - 바로 이러한 신앙의 맥락에서 예수는 세 가지 시험을 극복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이적을 행하는 신적인 능력, 즉 하나님께 기적을 강요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됨'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잘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를 지닌 존재, 즉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됨'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 째 시험(2-4)

출애굽 사건 당시 광야에서 굶주린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 대항하고 불평하였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을 거부하였다(출 16:2).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다. 신명기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려주시려는 것이었다고 증언한다(신 8:3).

그것은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훈련(교육)시키기 위한 것이었다(신 8:5).
그러나 예수는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이 교육받아야 했던 바로 그 '신앙의 자세'로 끝까지 순종함으로써 유혹자에게 대항한다. 먹는 문제가 아무리 다급하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먹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즉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먹을 뿐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물질욕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삶뿐만 아니라 이웃을 불행하게 만드는 우리의 시대적 풍조에 저항한다. 교회마저도 그리스도인들마저도 물질 증식에만 관심할 때, 예수는 우리에게 다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함을 환기시킨다.

두 번 째 시험(5-7)

오래된 랍비 문서에는, 메시야는 성전 지붕 위에 서서 자신을 계시할 것이라고 했다. 이 시험은 아마도 이러한 관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는 성전 위에 세워졌으며, 거기에서 뛰어내림으로써 메시야임을 확증하라고 요청받는다.

이제 유혹하는 자는 시편 91:11-12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징표를 보이라고 한다. 사탄이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를 인용한다고 모든 말이 옳은 것은 아니다. 성서의 본 뜻을 무시하고 인용할 경우에, 성서는 인간을 파멸시키는 도구로 악용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러한 사례들을 사이비 종파에서만이 아니라, 기성 교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사탄은 매우 종교적인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유혹'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 자신의 강한 믿음을 과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종교적인 인간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관상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행동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자신의 욕구에 따라 조종함으로써(!), 인간이 원하는 결과를 하나님께 강요하는 불경건하고 불순종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불신앙의 태도인 것이다.

예수는 신명기 6:16을 인용하면서 시험을 물리친다. 신명기의 이 말씀은 '맛사'에서의 시험을 전제로 하고 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처럼, 주(야훼) 너희의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신 6:16) -> '맛사'에서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사건은 출애굽기 17장에 기록되어 있다. 즉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출애굽 사건 자체를 후회하게 된다. 그 때 모세의 하소연을 듣고 하나님께서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였다. 그 장소에서 히브리인들이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야훼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곳을 '맛사'('시험함'의 뜻)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당시 히브리인들은 기적을 곧 바로 경험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 절망을 느낀 반면에, 예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7)는 예수의 저항은 "하나님께 도전하지 말라"는 강력한 요청인 것이다.

마태 27:40에 의하면, 예수는 훗날 십자가 위에서 또 한번 같은 '시험'을 겪는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향하여,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라고 조롱하였던 것이다. 그때도 예수는 '내려오기'를 포기한다. 비록 예수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을 경험할지라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신뢰함으로써만,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만, 그는 한 번 더 하나님을 완전히 하나님이게 한다. 자기과시가 아니라, 자신을 감춤으로써, 성공이 아니라 실패에서, 영광이 아니라 수치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킴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예수는 메시야가 되며, 그가 진 십자가는 사탄의 시험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이 된다.

세 번 째 시험(8- )

예수는 세계 지배권, 즉 한 나라의 대권이 아니라 전 세계를 다스릴 주권을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 앞에 서게 된다. 유혹하는 자는 예수를 높은 산으로 데려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유혹한다. 다만,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이라는 단 하나의 조건을 전제로.

실제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 아닐까? 이러한 세상에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사탄의 도움이, 즉 폭력적인 수단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탄에게 절만 하면, 사탄의 능력을 빼앗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 앞에 직면한다. 실제로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이 질문들 앞에 직면했고, 또한 역사적 교회들과 종교지도자들도 또한 이 질문들 앞에 직면했으며, 그들은 매우 영리한 결정을 내려 사탄에게 굴복하는 대가로 막강한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예수의 선택은 외관상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예수는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세상의 실권을 장악한 존재와의 협상을 거부했던 것이다. 예수는 신명기 6:13절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친다: "주(야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칠십인역)! 예수는 훗날 빌라도와의 타협도 거부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

예수는 그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기를 거부하였다. 오히려 그의 전 존재를, 그의 삶만이 아니라 그의 죽음까지도 하나님께 맡긴다.

예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 시도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과 같아지려"는(창 3:5) 근본적인 유혹, 곧 신적인 힘을 소유하고 업적을 쌓아두려는 유혹을 거부함으로써 '진정한 인간'으로 남는다. 그는 신적인 존재, 곧 메시야가 되기를 원하기 보다는 진정으로 인간이 되고자 하였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참된 '인간'인 예수를 메시야로 세웠으며, 그 예수 안에서 우리와 만나고 있으며, 바로 그 예수처럼 살도록 우리에게 요청한다.

예수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효율적'으로 혹은 '성공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사탄의 세력과 손잡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선한 수단들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의 승리는 지상에서의 그의 활동의 전제이며, 또한 그의 영원한 주권의 전제(28:16-10)이다.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골비처는 말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들을 성취시키기 위해 그분의 능력을 제공할 것이라는 것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란 '순종하는' 신뢰이며 신뢰하는 순종이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우리의 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길들을 위해서 유효하다."(Gollwitzer, Die Freude Gottes, 51) 예수가 지닌 믿음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순종하는' 신뢰이었으며 동시에 '신뢰하는' 순종이었고, '하나님의 길'을 걷는 믿음이었다.

4. 예수와 함께 믿기, 함께 신앙을 실천하기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역사적 교회들은 예수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을 버렸다. 교회는 스스로가 물질과 과시욕과 권력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종교개혁을 통해 새로운 길을 걷던 개신교회도 결국에는 중세 교회와 다를 바 없이 타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교회에서 흔히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돌도 빵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선전하는 말을 듣는다. 또한 "헌금을 많이 바쳐야 만사형통하고 물질적 축복이 보장된다"고 선전하는 말도 듣는다. 목회자들은 흔히 하나님을 뇌물을 원하는 탐욕적인 존재처럼 선전한다. 적지 않은 종교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가 지닌 영적인 능력들을 과시한다.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곧 바로 응답하여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한다. 영적인 능력이 있는 목회자들에 의해 각종 기적들이 일어난다고 선전된다. 교회들은 흔히 자신들의 몸집을 키우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세속권력에 아부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스스로를 내어 맡기면서, 교회는 거대한 신전으로 변화되고, 목회자들은 유명인사들이 되어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곧 약자들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뜻과 요청은 외면되고 만다.

많은 경우, 교회와 종교지도자들은 스스로가 사탄에 맞서서 저항한 예수의 결정을 비웃고 있다. 그들은 '성공'하기 위하여 예수의 길을 버린 지 오래다.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을 강조하고 또 추구하면서, 그들은 '그리스도'인 바로 그 '유대인 예수'가 지니고 있는 믿음은 버린 지 오래다. 그런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아니, 우리들 자신을 위하여 예수는 오늘도 세 가지 시험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사탄의 세력을 향하여, 기독교로 가장한, 영성으로 가장한, 거룩함으로 가장한 모든 것들을 향하여 '아니다!' 라고 저항한다.

수많은 십자가가 거리에 즐비하지만, 저 사탄의 시험들을 극복하는 예수의 신앙적 모범을 따르는 진정한 십자가는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머지 않아 총선을 치르게 된다. 숱한 정치꾼들이 돌로 빵을 만들어 주겠노라고 약속할 것이다. 숱한 정치꾼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낯간지러운 자기 선전을 할 것이다. 숱한 정치꾼들이 돈과 물품 공세, 지역감정과 파벌들을 이용하여 권력을 탈취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투쟁을 알고 있다. 바로 그 유혹들을 극복한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다. 예수와 다른 길을 걷는 자들을 지원하거나 지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총선 시민연대의 활동은 예수를 따르는 신앙적 행동의 한 표본으로서 적극 지지되어야 할 것이다 - 비록 그 활동이 예수와 기독교의 이름으로 전개되고 있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이제 다시 한번 우리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려보자. 저 시험들에 직면하여 우리는 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예수의 신앙'을 실천하고 있는가? 혹은 그리스도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믿음에만 머문 채, 우리의 비판적 판단력과 책임적 결단을 포기한 채, 사탄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주님, 우리의 메시야,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오늘도 우리에게 그의 뒤를 따르도록 촉구하고 있다. ('예수의 믿음'을 본받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고 용기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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