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2000.1.9.
예수의 복음
(스라랴 9:9-10, 누가 6:20-26)
새로운 시작?
지난 성탄절 이브에는 흰 눈이 탐스럽게 내렸습니다. 어느 신문은 "새 천년을 앞둔 마지막 성탄절을 축복하는 하얀 눈이 펑펑 내렸다"고 보도했습니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한국에 기상관측이 시작된 1955년이래 네 번 째 맞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고 합니다. 텔레비전 저녁 뉴스에서는 이 사실을 당일의 톱 뉴스로 보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논쟁의 쟁점은 25일에 눈이 내려야 화이트 크리스마스인가 혹은 24일에 내린 눈이 25일까지 쌓여 있으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로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화이트 크리스마스 논쟁에도 불구하고 어느 업체에서 실시한 크리스마스 눈 마케팅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행운을 잡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눈이 올 경우, 어느 이동통신에 가입한 사람 중 110명이 추첨으로 1천만 원이 넘는 자동차를 한 대씩 받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른 바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러한 들뜬 분위기와 언론들의 호들갑, 그리고 마케팅 전략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한국이 기독교국가나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대체 성탄절에 눈이 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었을까요? 성탄절의 의미를 전혀 숙고하지 않는 사람들도 왜 그처럼 들떠서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관심했을까요?
남반구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한 여름에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성탄절의 의미는 퇴색하고 마는 것일까요?
실제로 예수께서 태어난 베들레헴에는 12월에도 비는 올지언정 눈은 내릴 수 없습니다. 아니 베들레헴에는 일년 내내 눈이 내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첫 번 성탄은 결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을 리가 없습니다. 눈과 성탄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왜 우리는 그토록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익숙해 있는 것일까요?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유럽 및 북아메리카의 자연환경과 종교적 풍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미국의 캐롤을 통해 우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성탄절의 참된 모습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독교 신앙과 관련된 관념들이나 신앙생활의 스타일들은 실제 역사적 예수와 무관한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주로 백인 중산층들, 특히 미국인들의 사고방식과 신앙생활의 스타일에 익숙해 있는 것입니다. 마치 화이트 크리스머스에 대한 기대와 호들갑이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살려내기보다는 오히려 성탄절의 의미를 변조시키고 왜곡하듯이,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진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실제 역사적 예수의 모습과 가르침들과 다른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카톨릭 잡지인 '내셔널 카톨릭 리포트'는 새 천년을 상징하는 예수의 모습을 그린, 전 세계에서 출품된 1700개 작품 가운데에서 '대중의 예수'(재닛 매킨지)라는 제목의 흑인 예수상을 최고의 작품으로 뽑았습니다. 심사위원 웬디 베켓 수녀는 "검은 피부에 두터운 입술을 가진,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닌 채 슬프지만 자신에 차서 우리를 찾아나선 농부 예수의 잊혀지지 않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작품을 평가했습니다. 작가 매킨지는 수상소감에서 "이 작품은 한없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한겨레신문], 1999. 12. 15. 10면)
우리에게 알려진 예수님의 초상화들은 한결같이 백인 미남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예수상에 대한 저항으로 흑인의 모습으로 그린 예수상이 새 천년의 예수상으로 뽑혔다는 것은 놀라운 변화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획기적인 시도도 아직 첫 번 성탄절의 현실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유다 땅에 태어났던 예수님은 백인이 아니었듯이 흑인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한국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으로서 살해당했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는 이 사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땅에서 살았던 나사렛 예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새 천년이 시작되었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와 호들갑보다 더 큰 기대와 감격들로 우리는 '새로운' 천 년대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새 천년 맞이의 의미는 떠오르는 태양을 먼저 보려는 인파들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새 천년의 첫 일출을 보기 위하여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마치 태양신을 숭배하던 고대인들과 같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으나, 고대의 종교인들처럼 진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첫 일출마저도 개인의 소유로 만들려는 '관광'객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본 태양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해 바다를 비추는 아침햇살 아래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이 없었습니다. 일찍이 전도서 기자가 노래했듯이, "태양 아래 새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새 천년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구분되듯이, 새 천년을 새롭게 할 근거는 바로 성탄절의 사건에 있었던 것입니다. 결코 화이트 크리스마스일 필요 없는 저 베들레헴의 첫 번 성탄절에 태어난 아기 예수, 유대인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유대인 아기 예수에게서 새로운 시간,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지 않고는 모든 새 천년 맞이 행사와 감격이 헛된 것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2000년의 마지막 성탄절은 2000년의 새해 맞이에 여전히 유효해야 했습니다. 유대인 예수를 통하여 인류와 역사를 새롭게 하시려는 야훼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를 헤아리지 않고는, 새 천년도 지난 두 번의 천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기보다는 왜곡시키는 시간들로 채워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천년의 벽두에, 우리는 뉴 밀레니엄 신드롬에서 벗어나 차분히 첫 성탄절의 현실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역사 앞에 옷깃을 여미는 자세로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왕에 대한 유대인들의 꿈
스가랴 9:9-10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의 모습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스가랴 9:1-8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세계의 재편과정을 하나님의 섭리로 노래하였습니다. 그에 반하여 지금 예언자는 말을 탄 장군과는 대조되는 새로운 왕을 메시야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구세주는 종교적인 영역만을 다스리는 종교지도자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구세주는 오히려 정치적인 영역을 포괄하는 새로운 통치자인 왕으로서 기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왕은 부정의를 초래하거나 영속시키는 지배자가 아니라 정의로운 왕이며, 억압하고 파멸시키는 폭군이 아니라 구원을 베푸는 왕입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군마를 타고 오지 않고 오히려 나귀를 타고 오는 평화의 왕입니다.
나귀를 타고 오는 왕은 에브라임(북왕국)과 예루살렘(남왕국)을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외국군대의 병거와 군마로부터 해방시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온 땅에서 전쟁 무기인 화살을 폐기시키고 평화를 '선포'합니다. 즉 그는 평화를 실현시킬 것입니다.
'바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즉 물로 둘러싸여 있는 지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혹은 바빌론에서 유래한 다른 표상을 빌어 말하자면, 세계의 중심부분인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가장자리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왕이 통치할 것입니다.
새로운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이 꿈은 대략 기원전 300여년 전에 형성된 것입니다.
마태 21:5, 요한 12:15은 예수님을 바로 이 예언에 나타난 새로운 왕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바로 이처럼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으로 우리 가운데 태어나신 아기 예수의 탄생의 의미는 바로 유대인들의 이러한 꿈의 실현으로서 이해할 때에만 바르게 파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 번 성탄은 새로운 왕에 의해 시작되는 새로운 시간, 새로운 역사의 탄생이기도 했습니다. 아기 예수와 함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
성탄절의 환호와 감격이 잊혀질 무렵에 청년 예수는 역사의 한복판에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이제 누가복음 6장 20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통치의 기본 노선을 선언합니다. 이 내용은 마태복음 5장 이하에 기록된 산상설교와 비슷합니다. 마태복음의 내용보다는 누가복음의 선언이 더 예수님의 육성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지금 누가 6:20-26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즉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이 대조되고 있다.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세상의 생존경쟁에서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는, 즉 세속적으로는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행복한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반면에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부유한 자들, 배부른 자들, 희희낙락하는 자들, 인기를 끄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현실을 지배하는 사람들이며 세상이 부러워하는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인생을 복된 것이 아니라, 불행한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와 사회적 지위에 만족하여 삶이 지니고 있는 그 이상의 차원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므로, 이미 (예수님이 저주하기 이전에 이미!) 불행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부자들의 복음을 전파한 역사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0-22절 : 네 개의 축복 모두가 '복이 있다'(마카리오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스어 어법에서 이 말은 신들의 행복스럽고 근심 걱정 없는 상태를 묘사하거나 일반적으로 걱정거리 없는 부자들의 행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행복은 하나님께서 선물한 '구원'의 결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가난하고 억눌리고 슬픔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대한 축복의 말은 바로 그들에 대한 '구원의 선언'인 셈입니다. 여기에서 행복이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사람이 가지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약속을 하는 주체는 메시야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복되게 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그리스어 '가난한 사람'이란 '너무 가난해서 구걸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경건한 사람이 자신을 가난한 사람으로 표현합니다(시 86:1, 12:5). 그러므로 이 말은 경건하고 겸손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강대국들이 식민지로 삼았던 유다 땅에서 히브리적 신앙전승에 충실하려 했던 신앙인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유다 땅에서 잘 사는 자들은 외국의 점령 세력과 결탁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거부하고 강대국의 하수인이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난 그 자체가 축복이 아닙니다. 현실과 타협하면 부자로 잘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 가난한 삶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지금 하나님의 축복이 선언되는 것입니다.(주해 3권 602) 하나님의 통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축복이 됩니다.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난함은 삶을 풍요하게 만듭니다. 소유욕의 포기는 존재를 풍요하게 합니다. - 이것이 뛰어난 지혜를 지녔던 성인들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참다운 삶의 길입니다.
- 육체적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 이 선언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축복선언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부정의한 사회구조에 의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용할 양식'마저 강탈당한 그들에게 이제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운 새로운 질서를 세워 그들의 배고픔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 슬퍼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 슬픔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릇된 사회구조와 강한 자들은 우리에게 슬픔을 줍니다. 이 슬픔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 고난 속에서 우리는 이웃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슬픔은 우리를 하나님으로 인도하는 기회가 됩니다.
- 시련에 견딘 제자들에 대한 축복: 적대자들에 의해 '미움을 받고', 사회적 집단으로부터 소외되고, 비방을 받고, 누명을 쓰게 되더라도 그것들은 메시야의 제자들이 체험하는 징표일 뿐입니다. 박해받는다는 사실이 바로 제자들이 하나님의 종들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처음 세 가지 축복은 일반인들에게 제자가 되라는 초청으로 주어진 것인 반면에, 네 번째 축복은 제자들이 당면할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격려합니다. 제자들이 행복하다는 근거는 그들이 세상을 따라 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으로써 삶의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다": 이 구절은 반드시 미래나 저 세상에서의 보상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이 메시야의 날이요, 매 순간이 그 날이요, 이미 여기에서 지금 하늘의 기쁨을 현재적으로 누린다는 뜻입니다.(주해 3권, 603)
이에 반하여 24-26절에는 저주의 선언이 이어집니다:
- 부자들은 물질로써 하나님의 위로를 대치하였으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소유 지향적 삶은 필요한 사람들과 나눔의 삶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이웃을 상실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 음식을 배불리 먹은 사람들도 역시 현재 소유한 것으로 만족하는 자들이므로, 하나님을 외면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서 굶주리게 될 것입니다.
- 지금 웃는 자들에 대한 저주: 이 웃음은 단순한 기쁨의 표시가 아니라, 교만에 빠져 있는 악한 웃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기 만족에만 빠져 있는 사람들은 슬피 울게 될 것입니다.
- 사람들 가운데 명성을 떨치는 사람들에 대한 저주: 이것은 사람들을 그릇되게 지도하면서 명성을 떨치는 사람들, 즉 하나님 나라 복음에 충실하지 않고, 제 멋대로 정황에 따라 인기 작전이나 펴는 교회 지도자들,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저주입니다.(주해 3권, 603)
물질의 신, 맘몬을 숭배하며 소유와 소비에 노예가 된 현대인들에게, 권력과 인기에 사로잡혀 삶을 탕진하고, 이웃을 버리는 자들에게 이 저주의 선언은 현실적 실존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이 선언은 그들의 현실을 폭로합니다. 이 선언은 그들의 회개, 곧 철저한 방향전환을 촉구합니다.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삶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겸허한 삶으로 방향전환할 때에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에 참여하는 삶, 참으로 인간다운 삶,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복된 삶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저주의 선언은 구원을 향한 문을 차단한 운명적 선언이 아니라, 경고를 통해 구원을 향한 길을 밝히 보여주는 자비로운 초대입니다. 이 초대를 받아들일 때에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복음은 진정으로 복된 소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제자들이 세상 한복판에서 어떤 형태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세상의 관점에서 패배자처럼 보이는 가난한 사람의 길을 걷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 운동, 곧 역사를 새롭게 하는 새 천년의 운동에 참여하라는 초청이며, 동시에 이미 제자가 된 사람들에 대한 위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혁명 선언입니다. 메시야의 시대, 새 천년은 이 하나님 나라의 혁명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기존 가치관, 판단기준, 사고방식과 행동이 백 팔십도 방향전환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시대, 새로운 천년을 여는 새로운 시간은 하나님이 지배하는, 하나님만이 통치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세속적인 사고, 태도, 행동이 철저히 방향전환되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시간 우리에게 이러한 방향전환, 곧 우리 개개인의 삶의 혁명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어진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기회들이 진정으로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기회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새롭게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새 천년 벽두부터 우리 사회는 주식투자 열풍과 입시 열풍, 그리고 총선 열풍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모두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큰 권세를 장악하려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교회들도 여전히 더 큰 교회로 몸집을 불리기 위해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해야만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복음이 아니라 유대 청년, 나사렛 예수의 복음입니다. 그의 복음만이 세계를 정의와 평화로 인도할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새 천년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진정한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리기를 기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복음만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