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아카이브

[윤응진] 영원한 삶

한신대·기독교교육학과 교수

대학교회설교
1999. 11. 21.
영원한 삶(시편 15:1-9. 누가 10:25-37)

윤응진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창조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토록 우리의 주변을 녹색으로 뒤덮던 나뭇잎들이 모두 지고,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 겨울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땅바닥을 뒹구는 낙엽들을 보면서 우리는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이 겨울로 끝나는 북반구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마도, 한 여름에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는 남반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우울하게 가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을을 보내면서 우리는 삶의 종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단지 일정한 시간만을 이 땅 위에서 살아가도록 허락 받았을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한계를 확인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낙옆 쌓인 거리를 걷는 것은 우울한 일입니다.

인간은 삶의 한계, 곧 죽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죽음 자체를 넘어서는 영원한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죽음을 넘어서서 지속되는 영원한 삶, 참되고 본질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무엇이 영원한 삶일까요? 어떻게 우리는 영원한 삶에 이를 수 있을까요?
창조절 마지막 주일에 이러한 질문에 참여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2. 히브리 신앙인들의 관심사

일반적으로 종교는 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을 나누고, 현세의 삶은 일시적이며 허무하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세의 삶은 영원하며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현세의 삶이란 그 자체로서는 무의미한 것이며, 단지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한 업적을 쌓는 기간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삶의 영역은 일상적인 세속의 영역과 종교적인 거룩의 영역으로 나뉘어지고, 일상적인 생활보다는 종교생활, 곧 각종 종교행사나 제의에 참여하여 종교적 업적과 영성을 키우는 일이 더 가치있는 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서의 신앙인들은 일반 종교인들과는 다른 관심사와 다른 사고체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히브리 시인의 노래는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15편은 바빌로니아 포로기 이후에 씌어진 시로서 성전 제의와 관련된 시입니다. 이 시는 마치 성전 문 앞에서 제사장이 질문을 던지고 순례자들이 대답을 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종교적인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누가 주님 계신 곳에서 살 수 있는 사람입니까? 주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사람은 누굽니까?"

하나님 계신 곳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어떻게 하여야 구원받은 삶을 살 수 있습니까?"라는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새삼스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장 궁금해하는 보편적이며 종교적인 질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질문이 아니라, 이 질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답입니다: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혀를 놀려 남의 허물 들추지 않는 사람,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친구를 모욕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는 자는 경멸하고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존경하면서,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변함없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며,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은 놀랍게도 종교생활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도덕적 실천과 관련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낫다는 신념이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구되고 있는 기초적인 도덕적 태도들은 모두 이웃에 대한 사회윤리적 태도들입니다. 즉 구원받은 삶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웃을 신실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진실하고 의롭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와 정의가 공동체 생활, 재판행정, 경제생활을 지배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청은 반사회적 태도들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속이고 중상모략하는 일, 쉽게 약속을 저버리고 배신하는 일, 재산을 증식시키기 위하여 고리대금업을 통하여 이웃을 착취하는 일(*고대 사회에서 이자는 2할에서 5할에 달하는 고리였다) 뇌물을 주고 받으며 무죄한 자들에게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 등은 사회 속에서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적인 반사회적 태도들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33:15-16 에서도 예언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여 구원받을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
권세를 부려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는 일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
살인자의 음모에 귀를 막는 사람,
악을 꾀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사람,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안전한 곳에 산다...."

지금 히브리 시인은 이러한 히브리 신앙전승의 맥락에서 진실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도 산상설교를 통하여,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하며, 화목케 하는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며, 그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신앙전승과 가르침들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세속 한복판에서 영원한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삶이란 시간적으로 양적인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습니다. 삶 속에서 진실되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은 죽음 이후에 비로소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하나님의 구원 안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 신앙인들의 관심사, 성서의 관심사는 지금 여기에서 참된 인간다운 삶을 실천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참된 삶이란 종교적 제의에 참여하고 종교적 업적을 쌓는 것으로만 보증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이웃에 대하여 진실되고 정의로운 삶을 실천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온통 거짓과 부정부패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옷로비 사건, 언론 문건 사건, 재벌들의 각종 불법과 탈법 행위들과 뇌물수수 사건들, 이근안과 정형근의 고문 사건과 조직적 은폐공작들, 미군에 의한 노문리 집단 학살사건과 비무장 지대 고엽제 살포 사건의 은폐공작들.... 등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거짓과 부정의가 지배하는 현실 속에 갇혀 살았는지 또 지금도 얼마나 그러한 현실 속에 매몰되어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른 신앙인들도 아마 도처에 거짓과 부정의가 지배하던 시대에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어둠의 시대에 히브리 신앙인들은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은 진실되고 정의로운 삶을 살기로 다짐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이 노래는 과거의 노래가 아니라 오늘의 노래로서 불리어져야 합니다. 오늘날도 참으로 진실되고 정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영원한 삶의 실천: 이웃사랑

우리가 경청한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질문은 율법의 핵심, 곧 구약성서의 핵심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히브리인들의 신앙전승맥락에 서서 가르치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율법학자는 '영원한 삶'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은 하나님 사랑(신 6:5, )과 이웃사랑(레 19:18)을 '행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의 응답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의하십니다: "옳습니다.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이 대답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과 '다른'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현시키려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학자의 율법해석에 동의하면서, 다만 그 꺠달음을 행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화에서 '영원한 삶'이란 인간이 아직도 찾아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에 의하여 인간에게 주기로 약속되어 있는 그리고 준비되어 있는 유산으로서 전제되고 있습니다. 영원한 삶에 참여하는 것만이 인간의 몫인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는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과 그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는 자명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웃사랑의 요청에서 이웃을 어떻게 규정하여야 하는가에서 예수님의 견해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웃이란 매우 한정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이웃이란 '신앙의 동료', 정치적-종교적 동지, 정당의 동지 등을 의미하는 협소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종교적 열광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곤궁을 간과할 위험에 빠져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율법학자가 지니고 있던 제한된 이웃 개념의 위험성을 깨우치고 이웃의 개념을 모든 인간에게로 확대시키려 하십니다.

비유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은 유대교의 모든 종파들로부터 똑같이 미움을 받고 경멸을 받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영원한 삶과는 관련없는 존재들로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가 외면한 강도만난 사람, 고난받은 사람을 도와준 인물로 사마리아인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매우 충격적인 것입니다. 이 비유는, 마치 오늘 우리 사회를 배경으로 비유를 재구성한다면, 신부도 목사도 강도만난 자를 피해 지나갔으나, 북한 주민 한 사람이 그를 도와주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예화였던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율법의 척도로 판단할 때 영원한 삶에 참여할 인물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라, 뜻밖에도 이웃에 대한 자비를 실천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셈입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자기중심적 문제제기를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변경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규정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시도하고 있습니다. 나를 중심한 이웃 규정이 아니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내가 이웃으로서 도움을 줄 것인지 아닌지를 결단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학자의 대답 속에는 불쾌감이 묻어 있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는 차마 "사마리아인이었다"고 대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뽐내는 집단들 밖에도 하나님의 뜻을 그들보다 훨씬 더 잘 실현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삶에 참여하는 사람이란 종교적인 사람보다는 오히려 고난받는 사람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 맺는 말

우리는 요즈음 잔인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뉴스들을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의 사례는 이른 바 "고문 기술자"라는 이근안의 고문 사건이고, 다른 한 사례는 젊은 목사가 어린 친 아들을 고문 살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들에 직면하여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대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례 1> 이근안 고문 피해자, 납북 어부 김성학씨, "망가진 삶 어디서 보상받나"(한겨레 99. 11. 6. 22):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만신창이가 된 육신의 고통에 시달리지만, 정작 고문피해에 대해 한푼도 배상받을 길이 없다는군요."

김씨는 71년 오징어잡이 어선을 탔다가 납북돼 1년의 억류생활을 하고 돌아온 뒤 85년 12월 영문도 모른 채 경기도경 대공분실에 끌려가 70여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간첩혐의로 기소되었으나, 86년 7월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미 전기고문으로 척추 뼈마디가 성치 않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원통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됐고 지난해에는 이혼까지 했다.

그는 87년 검찰이 고문경관들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자 재정신청을 법원에 냈는데, 법원은 늑장 판결을 하였다. 재정신청을 낸지 11년 만인 지난 98년 10월에야 서울 고법이 재정신청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내렸고, 지난 9월에는 고문경관들에 대한 유죄판결이 나왔지만, 이미 소송 시효를 넘긴지 오래였다.

그는 고문경관을 심판대에 세우는 일에 매달리느라 손해배상 청구의 시한을 넘겨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 발표(99. 11. 5.)에 따르면, 그는 도피 기간 중에 성경에 대한 독후감 정리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그도 이른바 그리스도인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그처럼 가혹한 고문을 할 수 있었을까요?

<사례 2> 어느 목사의 모진 부정(한겨레 99. 11. 6., 23): 초등생 장남이 혈육 부인한다고 보일러실 감금, 영양실조로 숨지게.

문상식(33) 목사는 친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큰 아들(7, 초등1)을 두 달 동안 보일러실에 가둬 영양실조로 숨지게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문 목사는 아이들의 생모와 이혼한 뒤 형의 집에서 윤 모(30)씨와 동거해 왔다. 큰아들이 "우리 친아버지는 따로 있다"는 말을 자주한다는 이유로 작은 아들(5세)과 함께 보일러실에 감금한 뒤 자물쇠를 채운채 하루 두끼 식사만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작은 아들은 큰 아들의 주검 옆에서 앙상하게 마른 채 탈진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중태이다.

이 젊은 목사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어떻게 그처럼 잔혹하게 어린 아들을 고문할 수 있었을까요?

종교적 삶만을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은 히브리인들의 관심사, 예수의 관심사에서 벗어난 '종교인'들일 뿐입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있으나 진정으로 성서적 의미의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는 신앙공동체는 얼마나 될까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으나 저 인정많은 사마리아인의 삶을 실천하는 신앙인들은 얼마나 될까요?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매달리는 '종교적 이기주의자'들은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이웃의 삶마저 파괴할 뿐입니다.

성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종교적' 관심에서 삶 한복판으로 우리의 관심을 돌리도록 촉구합니다. 그러나 삶 한복판 안에서의 진실과 정의, 더 나아가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세속적 현실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도록 요청합니다.

이웃을 향하여, 이웃을 위하여 사는 삶만이 참으로 사람다운 삶, 영원히 기억될 삶, 곧 성서적 의미의 구원에 참여하고 있는 삶인 것입니다.

그것만이 히브리 신앙인들과 예수께서 이해하신 '영원한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한계를 깨닫도록 도전받는 이 계절에, 우리의 삶의 한계에 대한 안타까움에 젖어 들기보다는, 단 한번 주어진 소중한 기회를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진실하고 정의로운 삶,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함께 살아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그러한 삶을 허락하시고, 그러한 삶을 살아갈 용기와 능력을 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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