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선교> 총장칼럼 2009.2.
만우와 장공을 넘어서서
윤응진 총장(철학박사, 기독교교육학)
지난해(2008년) 12월 7일, ‘경건과 신학연구소’는 서울성남교회에서 만우 송창근 목사의 탄신 110주년을 맞아 그의 전기, 『벽도 밀면 문이 된다』를 펴내는 출판기념회를 열고 동시에 교회입구에 기념비를 세웠다. 성남교회의 옛 이름은 성바울전도교회로 1945년 만우가 설립하였으므로, 이 날의 행사는 더욱 뜻 깊은 것이었다.
그리고 올해 1월 22일에는 장공 김재준 목사의 22주기 추모예배가 드려져 장공의 생애와 정신을 기렸다. 우리에게 만우와 장공, 두 분의 스승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분들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두 분을 기억하기 위해 여러 사업들이 계획되고 행사들이 열린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분들은 험난한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선각자로서 우리가 걸어갈 길을 예비한 개척자들이다. 그분들은 미국선교사들이 한국교회와 신학교육을 지배하던 시절에 독자적인, 세계적 수준의 신학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헌신한 분들이다. 우리는 지금 그분들이 열어놓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두 분은 우리들에게 전설이 된 영웅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가르침을 주고 영향을 끼치는 스승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우와 장공을 기억하여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오늘의 현실에서 만우와 장공의 뜻과 삶을 재조명하려 노력하는 것이 다만 이벤트성 행사로 끝나고 만다면, 그것은 두 분을 내세워 우리를 포장하고 정당화하려는 집단적 기만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전통을 미화함으로써 현실의 초라함을 잊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두 분의 위대함을 홍보하고 그분들의 유명세에 편승하여 우리를 내세우려한다면, 그것은 두 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만우와 장공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는 행사들이 진정으로 의미를 얻으려면, 그분들에 대한 기억이 우리의 변화와 성숙을 위한 촉매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만우와 장공을 기억하려 는 노력은 그분들처럼 살아가기 위한 결단과 노력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분들을 존경한다면, 우리는 그분들의 정신과 삶의 스타일을 계승하려 노력해야 마땅하다. 그리하여 그 분들이 우리를 통해 말하고 행동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과거를 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현실을 되돌아보고 더 나은 방향으로 변혁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분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는 것은 중요하고 혁신적인 교육적 효과를 지녀야만 할 것이다. 특히 아직도 미국식 근본주의 전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노선에 확고하게 서서 ‘하나님의 나라 혁명’에 기여하는 신앙공동체로 변화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두 분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두 분 모두 성 프랜시스를 존경하여 ‘거룩한 가난’을 몸으로 실천하려 하였다. 그분들의 ‘성빈(聖貧)’ 정신이 자본주의의 포로가 되어 휘청거리는 우리들에게 갈 길을 안내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모쪼록 그분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 노력하는 소중한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종교집단으로 변질되어 부패해가는 한국교회를 새롭게 변화시키기를 희망해 본다. 무엇보다도, ‘거룩한 가난’을 실천하려 했던 그분들의 뜻과 삶이 물질주의의 포로가 된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정화시키기를 기대하고 싶다. 그리하여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되기를 꿈꾸어 본다.
장공은 한신대학교 신학교육과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기본방향을 세우기 위하여 온갖 고난을 무릅써야 했다. 그의 가르침에서 한신대학교의 진보적 학문전통의 기본방향이라 할 수 있는 ‘한신성’과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사회변혁적인 지향성을 표현하는 ‘기장성’의 기본틀이 형성되었다. 진정으로 장공을 존경하며 기억한다면, 우리는 ‘한신성’과 ‘기장성’에 굳게 서서 그 정신과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장공에 대한 기억은 장공의 가르침을 삶의 지침으로 삼기 위해서만 유효하고 요청되는 것이다. 만우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만우와 장공은 우리가 닮아야 할 최대한의 기준이 아니라 ‘최소한의 기준’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충실히 따라감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스스로 ‘완전’해져야(마태 5:48)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우와 장공을 뛰어 넘어서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하여 그분들을 기억하여야 할 뿐이다. 그분들이 도달한 깨달음과 삶의 성취는 우리의 출발점이지 목표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미처 이루지 못한 일들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이 시대에 만우와 장공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10년 전에 주재용 박사는 “만우 송창근의 삶과 사상”에 대하여 논하면서, 당시에 “오늘”의 한신 신학교육의 현실을 이렇게 개탄하였다:
“.... 지금의 한신대 교수들이 송창근 교수와 같이 몸을 바치는 학교 사랑, 진리 사랑, 제자 사랑의 정신이 있는가? 신학교육 풍토는 삭막한 논리와 아집만이 있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감격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연관된 경외감을 내포한 경건도 없는 것은 아닌가? .... 학문의 높은 봉도, 은혜의 깊은 골도 없는 증오와 부정적 비판만이 학교 풍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해학도 없이 서로 물고 먹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매도, 음해하는 파괴된 인간 관계가 대학 캠퍼스를 스산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주재용, “만우 송창근의 삶과 사상”, 한신대학교 편, 신학연구, 한신대학교 출판부 1999, 232-233)
우리는, 이 문제제기가 이제는 시효가 지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만우와 장공을 기억할 때마다, 오히려 그 문제제기가 지금 우리의 가슴에서도 동일하게 다시 제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해에는 한신 교정에서 만우와 장공의 뜻과 삶이 기억으로 되살아날뿐만 아니라 다시금 계승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남을 탓하기 이전에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만우와 장공이 걸어간 길을 함께 걸어갈 겸손과 사랑과 용기가 허락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한신대학교가 진정으로 주님의 뜻과 가르침이 지배하는 학문과 교육의 전당이 되기를 갈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