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김명수교수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 발제문

2008년 10월 23일 기독교회관 강당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

                                                            김명수교수(경성대학교)

 

회향(回向:metanoia)

인류가 계급 사회에 들어서면서 지배계급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사유재산 제도가 생겼다. 모든 국가권력의 존재 이유는 공공(公共)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지배계급의 권익을 옹호해주기 위해서였다. 예수 시대 로마제국은 전형적인 가부장적 노예제 사회였다. 로마제국은 끊임없이 주변국가를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전쟁포로들을 재생산함으로써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 생산에 투여했다. 전쟁 포로와 노예들에 의한 무상(無償)의 노동력을 통한 생산력 증강은 로마제국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 시대 팔레스틴도 거시적(巨視的)인 지평에서 보면 가부장의 노예제 사회제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시적(微視的)인 지평에서 보면, 팔레스틴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특이한 종교기구를 정점으로 모든 경제 행위가 집중되어 나타났다. 예수 시대 팔레스틴의 경제구조는 이른바 준(準)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규정할 수 있다. 당시 팔레스틴 민중은 로마, 헤롯 정부, 성전 종교 지도층으로부터 이중 삼중으로 착취를 당했다. 이러한 현장에 예수는 등장하여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닥쳐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설교하였다(막1:15). 예수의 사명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 앞에 사람들을 회개시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준비케 하는 일이었다.

예수가 유다 민중을 향하여 외친 메타노이아(metanoia)란 무엇인가?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한 생각을 바꾸는 것”인데, 잘못을 뉘우친다는 의미를 지닌 회개(悔改)보다는 한 의식과 삶의 방향을 바꾸는 회향(回向)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요한 세례자가 선포한 회향은 단순히 율법(토라)을 문자적으로 지키거나,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절기 때마다 규정에 따라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회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몰려든 유다 민중을 향하여 요한은 말한다.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과 나누어 가지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십시오.”(Q3:11) ‘더불어 나누는 삶’이야말로 회향의 기본 요건에 해당되는 것임을 세례자 요한은 강조한다. 기득권자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을 혼자 독점하지 말고,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과 나누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한다. 나눔을 통한 회향의 촉구는 그 시대의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회향은 평등사상에 기초한 공(公)의 회복을 지향한다.


죄는 공(公)의 사유화

창세기 3장에는 실낙원(失樂園)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왜 인간은 낙원을 꿈꾸는 것일까? 그것은 현재의 고달픈 삶에서 탈출해보려는 욕망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낙원 이야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과거 지향적인 유형이 있고, 미래 지향적인 유형이 있다. 전자(前者)는 인간 현실의 본래성(本來性)을 묻는데서 나타난다. 그들은 지금 인간의 현실을 소외된 상태로 인식한다. 따라서 본래성을 상실하게 만든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소외(疎外)를 극복하고자 한다. 후자는 현실을 소외된 현실로 본다는 점에서는 과거 지향적 유형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들은 복고적(復古的)이거나 과거에로의 회귀(回歸)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意志)로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한 적이 없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유토피아(utopia)는 미래 지향적 유형에 속한다.

창세기의 실낙원 이야기는 어디에 속하는가? 과거 지향적 유형에 가깝다. 실낙원 이야기는 인류의 생물학적 조상 이야기 아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인간사(人間事)의 한 유형에 관한 이야기다. 아담과 하와는 생물학적인 인류의 조상을 넘어서 “인간의 삶의 한 유형(type)” 또는 “인간 역사의 한 막(幕)”으로써 소개된다. 따라서 실낙원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를 넘어서 오늘 우리와 연관성을 지닌다.

낙원의 모든 과실은 먹도록 허용되어 있으나 동산 가운데 심겨진 과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령(禁令)이 아담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은 왜 금단(禁斷)의 열매를 낙원에 두셨는가? 그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허나 분명한 것이 있다. 낙원에 어느 누구도 사유화(私有化)해서는 안 되는 공의 영역을 하나님께서 설정해 두셨다는 것이다. 이 공(公)의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아담은 낙원에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땅은 공(公)이다

땅이 인간의 소유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소유(公)라는 사상은 구약성서에서 일관되고 있다. 땅이 공이라면, 그 위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만물 역시 하나님의 소유(公)이다. 인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구약성서의 공사상(公思想) 배경에는 창조주 하나님 신앙이 깔려있다. 창조주 하나님 신앙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개인의 삶에 있어서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25:23)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 안에 존재하는 세계만물이 하나님 소유이다. 인간은 단지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의탁해 살아가는 식객일 뿐이다. 행인과 나그네일 뿐이다.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땅은 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의해서 사유화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특정 개인에 속할 수 없고, 하나님에게 속해있다는 것이다.

왜 구약성서에서는 땅의 소유주가 하나님임을 그토록 강조하는가? 그것은 본래 공(公)이어야 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사유화되어가고 그로 인해 싹튼 불의한 인간 현실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갖는다. 강자들에 의한 공(公)의 사유화 과정을 통하여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 현상 그리고 빈부격차가 생겼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의 비극이 어디에서 유래한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는가?

죤 휴스턴 감독이 만든 영화 가운데 이 있다. 한국에서는 <천지창조>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이 영화의 한 장면 가운데 아벨과 가인은 그들이 일년동안 수확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둘이 나란히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데, 가인은 수확한 곡식의 맏물을 제단에 바친다. 그런데 그 곡식이 얼마나 탐스럽든지 가인은 아까운 생각이 든다. 그는 하늘을 한 번 힐끗 쳐다본 후, 제단에 바쳤던 곡식의 일부를 손으로 한 움큼 퍼내어 자기 곡식자루에 쓸어 넣는다. 그리고 나서 제단에 불을 부친다. 그러자 연기는 하늘로 곧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도중에서 흩어져버린다. 반면에 아벨은 자기가 일 년 동안 키운 가축을 잡아 정성껏 제사를 드린다. 아벨이 제물에 불을 붙이니 연기가 하늘로 곧게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드렸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던 것이다. 가인은 자기 동생의 제사는 받아들여졌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에 앙심을 품는다. 그는 동생 아벨을 미워하게 되고, 결국 들판으로 그를 유인하여 죽여서 땅에 묻는다. 아벨의 피를 받은 땅은 저주를 받아 가인이 아무리 땀을 흘려 농사를 지어도 열매를 내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의 파괴로 귀결된다.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가?  휴스턴 감독은 그 원인을 하나님에게 속해있는 것을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든 데서 찾고 있다. 곡식의 맏물은 하나님의 소유였다. 그런데 가인은 그 하나님의 소유를 자기 소유로 만들었던 것이다. ‘공(公)을 사유화(私有化)’한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인간이 사유화한 것, 곧 공(公)의 사유화(私有化)에서 인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성서는 말한다. 하나님의 것인 공(公)을 인간이 사유화한데서 범죄가 시작되었다면, 회향(回向)의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공(公)의 사유화가 범죄라면, 인간이 사유화한 것을 본래의 자리, 곧 공(公)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회향(回向)이다.

묵시 종말론과 예수의 등장

예수 시대에 로마제국은 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유럽과 근동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어나갔다.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틴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특히 팔레스틴의 북부에 위치한 갈릴리는 소유권(所有權) 쟁탈전이 다른 어느 곳보다도 치열하였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 땅이 그만큼 비옥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갈릴리의 땅은 거의 예루살렘 도성에 거주하는 대지주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청지기를 고용하여 갈릴리에 있는 그들 소유의 토지를 관리했다. 비록 갈릴리 지역이 비옥하였지만, 막상 그곳에 거주하는 절대다수는 사회적 소수자들이었다. 노동을 팔아 하루하루의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소농, 소작농, 날품꾼들과 절대빈곤에 허덕이는 부랑자들이었다. 갈릴리 사회는 극소수의 부자와 절대다수의 가난한 민중으로 양극화되어 있었다. 이 시대 갈릴리의 사회적 풍토를 지배하고 있던 사상은 묵시적 종말론이었다.

묵시적 종말 앞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잠정적인 성격을 지닌다(Provisorium). 그 앞에서 현존의 질서와 가치 그리고 재물은 한시적인 의미를 지닌다. 갈릴리의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묵시적인 역사개입으로 인하여 그들을 사회경제적 억압과 질곡에서 해방시키고, 비참한 운명을 역전(逆轉)시킬 메시아가 등장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이러한 시대에 30년경 예수께서 갈릴리에 등장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때가 다 되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향(回向)하고 복음을 믿어라.”(막1:15)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3년여에 걸쳐 갈릴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쳤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관한 이야기들이 복음서에 채록(採錄)되어 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의 경제윤리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Q복음서와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윤리

Q교회 공동체는 바울과 거의 동시대에 존재했다. 바울이 그레코-로마(Greco-Roman) 세계의 거대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를 했다면, Q는 갈릴리 북부와 시리아 접경지대에 위치한 비교적 유대 종교문화 전통이 강한 농촌을 선교지로 삼았다.

Q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인 하나님나라(basileia tou theou)는 일차적으로 세상나라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였다. 당시 팔레스틴을 지배하고 있던 세상나라는 무엇이었는가? 로마제국이다. Q는 로마제국에 대한 대응개념으로 하나님제국(basileia tou theou)을 사용하고 있다. 로마제국이 사회경제적 강자들을 위한 통치였다면, Q의 하나님제국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위한 통치였다. Q에서 경제윤리를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 텍스트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요한 세례자의 설교(Q3:7-14): Q는 요한 세례자 요한의 등장과 함께 복음서를 연다. 하나님의 말씀이 유대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임하였다. 그는 요단강 부근에서 민중을 향하여 설교하였다. “한 생각을 바꾸고, 세례를 받아라. 그리하면 죄 용서를 받을 것이다.” 요한이 촉구한 회향(metanoia)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 생각을 바꾸는 것이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속옷(chitonas) 두 벌 껴입은 사람이 한 벌도 없어 벌벌 떨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를 벗어 ‘내어 주라는 것’(metadote)이요, 먹을 것(bromata)이 있는 사람도 그와 같이 하라는 것이다. 회향의 삶은 의식(衣食)을 나눔(sharing)으로 실현된다. 의식이 필요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공(公)의 행동이 곧 회향이다. 본문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수직적(垂直的)인 나눔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水平的)인 나눔에 대해서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상부상조적인 수평적 나눔이 곧 회향이다. 그것은 사(私)를 공(公)으로 돌리는 행위다. Q공동체는 주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곧 상대적 가난과 절대적 가난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축복설교(Q6:20-21): 많은 무리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오자, 예수께서 이렇게 설교하시었다. “복이 있어라, 가난한 그대들이여,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있다(makarioi hoi ptochoi, hoti hymetera estin he basileia tou theou).” Q가 전하는 예수의 첫 설교 장면이다. 프토코스(ptochos)는 일반 서민층이 아니라, 절대 빈곤에 처한 극빈자를 지칭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극빈자들을 축복함으로서 시작된다. 하나님 나라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속해 있다.

이어서 예수는 부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한다. “화가 있어라, 너희 부요한 사람들이여, 너희는 받을 위안을 이미 다 받았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굶주리게 될 것이다.”(Q6:24-25) 부자들과 배부른 사람들은 그들이 향유하고 있는 재화가 사적(私的)인 목적으로 사용한다. 부자들의 배부름은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과 연관되어 있다는 제로섬의 원칙을 모른다. 부와 가난, 배부름과 배고픔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상호 연관되어 있고, 서로 의존되어 있다. 내 것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쓴다면, 그들은 공(公)을 침범한 자들이다.

Q의 예수는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돌려 달라 하지 말라고 한다(Q6:29-30). 누구에게 빌려줄 때에는 아예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Q6:34-35). 이와 같이 Q가 전하는 예수의 경제윤리는 상호성의 원칙에 매이지 않는다.

예수의 화작(化作)(Q7:31-35): 요한 세례자가 와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귀신들렸다 하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esthiōn) 마시매(pinōn), 너희 말이 ‘보라!’ 이 사람은 식탐가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면서 겪었던 좌절감을 Q는 시장터에서 싸우는 아이들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이 세대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와서 금식을 하니 그에게 귀신들린 놈이라고 험담을 늘어놓았다. 예수께서 와서 서슴없이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고 무어라고 하는가? 식탐가요 술꾼이며, 세리와 부랑인의 친구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예수는 바리새파들이 그어놓은 모든 율법의 경계를 초월하여 민중과 화작(化作)의 삶을 살았다. 민중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삶의 동반자로 살았던 예수의 모습에서 Q는 진정한 메시아를 발견한다. 가난한 사람이나 배고픈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일’(esthiōn kai pinōn)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제자직(Q9:57-62): “여우는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는데,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다.”(58절) 예수는 집도, 가정도, 소유에도 매이지 않고, 무주(無住), 무아(無我), 무상(無常)의 자세로 살아간다. Q가 보여주는 예수의 이러한 무소유적 삶의 스타일은 창조주 하나님의 보살핌에 대한 절대 신앙과 사유화로 인하여 공(公)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로마제국의 세태를 향한 상징적인 대안(代案)행위로 보인다.

인간은 공(公)이다(Q12:2-9): “참새 다섯 마리가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가 되지 아니한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Q12:6-7) 로마는 가부장제적 노예제 사회였다. 종과 더불어 여인이나 아이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직속되어 있다고 보았다. 인간뿐만이 아니다. 참새 한 마리까지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신다. 피조물 전체가 하나님의 공(公)인 셈이다. 

솔로몬의 영화(Q12:22-34): 예수는 제자들을 향하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 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한다. 의식주를 위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Q공동체 신도들이 놓인 경제현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의식주에 대한 염려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인간임을 자연을 예로 들어 일깨워준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를 보라. 그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소유하지 않음으로서 소유하지 않은 것이 없다. 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 산다는 것이다. 삶은 소유로 사는 게 아니라 존재로 산다. 내가 가진 것(私)으로 사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公)으로 산다.

들에 핀 한 송이 백합은 어떠한가?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입지 못했다”라고 한다(27절). 솔로몬이 누구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온갖 권세와 영화를 누리면서 살았던 왕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것(公)을 사유화한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솔로몬의 화려한 삶이 공을 사유화한 인위적(人爲的)인 삶의 대표적인 케이스에 해당한다면, 들꽃의 삶은 공(公)으로 대표되는 무위자연적(無爲自然的) 삶의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솔로몬은 ‘소유(所有)로써’ 삶을 살았지만, 들꽃은 ‘존재(存在)로써’ 삶을 살았다. 삶은 소유(to have)가 아니라 존재(to be)이다. 

 노자는 도(道)의 특성을 “생이불유”(生而不有)에서 찾았다. 낳되 소유하지 않는 것이 도(道)이다. 들꽃 한 송이를 보라! 결코 소유하지 않는다. 낳은 것을 소유하러든다면 그것이 공(公)의 사유화이다. 예수의 삶은 한 마디로 내 것이 없는 삶이었다. 내 것 없이 삶으로서 내 것 아닌 것 없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다. 예수는 가정, 고향, 소유에 매이지 않고 공(公)의 삶을 살았다. 곧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생이불유적(生而不有的) 삶을 살았던 것이다.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Q14:12-14):“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과 불구자들과 절름발이,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는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될 것이다.” 밥상 공동체는 예수가 벌인 하나님 나라 운동의 특징 가운데 한 요소이다. 잔치 자리에 형제, 부요한 이웃을 초청하지 말라고 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너에게 도로 갚을 것이기 때문이다.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초청해서 베풀어야 그 베풂이 진정한 베풂으로 남는다. 하나님의 밥상 공동체는 상호성(相互性)의 경제윤리를 초월하는 곳에 존재한다.

이어지는 큰 잔치 비유(Q14:16-24)에서는 어떠한가?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잔치를 거절하였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밭(agron)을 사고, 소(boõn)를 샀기 때문이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잔치를 거절하게 한 장애물은 무엇인가? 소유욕이다.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그 사회에서 어느 부류의 사람들인가? 길거리를 배회하는 가난한 사람들(ptochoi)이다.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Q16:13): 하나님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에 대한 경고이다. 맘몬의 노예가 되지 말라. 사람이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기려고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충성을 바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를 섬기려는 자는 그 외의 것을 섬겨서는 안 된다. 인간이 재물을 섬김으로써 돈의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돈의 주인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공(公)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맘몬을 섬김으로써 사(私)로 살 것인가? 그것은 배타적인 선택사항이다. 누가는 하나님과 맘몬을 상호 대립된 명제로 다루고 있다.

요약: 이상에서 살펴 본 대로 최초의 잃어버린 복음서 Q를 생산한 교회 공동체가 전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가난한 사람에 의한 복음(Gospel by the poor),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Gospel for the poor),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Gospel of the poor)으로 요약된다. 당대의 경제적인 가난한 사람들과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초기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비로소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Q는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무엇을 먹고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극심한 빈곤상태에서 의식주를 걱정해야만 하는 것이 Q교회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현실이었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그들은 돌을 떡덩이로 만들라는 맘모니즘의 유혹과 타협하지 않았다. 내 삶의 근거는 맘몬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깨달음을 놓지 않고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 아들로서의 자존감을 잃지 않고 가난 가운데서도 비굴하지 않고 세상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았던 것이다. 

마태와 누가 공동체는 Q가 전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을  계승한다. 그들은 그들의 공동체가 처한 선교적 상황에서 이를 확장시키고 재구성한다. 마태와 누가복음의 특수자료를 중심으로 그들이 전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을 살펴보자.

마태 특수자료에 나타난 경제윤리

포도원 일꾼들 비유(마20:1-16): 예수는 하늘나라를 포도밭 주인에 비유한다. 그는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 노동시장에 나간다. 하루에 1데나리온을 주기로 합의하고, 그들을 농장으로 보낸다. 아홉시, 열두시, 세시, 심지어는 저녁 다섯 시에 나가보니 그 때까지 일을 얻지 못하고 장터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주인은 그들도 모두 농장으로 보내어 일하도록 하였다.

저녁이 되었다. 주인이 청지기를 시켜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지불하도록 하였다. 다섯 시에 온 사람부터 한 데나리온씩 받아갔다. 아침 일찍 와서 일을 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한 데나리온이었다. 그가 항의하였다. 맨 나중에 온 사람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하루 종일 일한 우리와 똑 같이 지불합니까?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지불하는 게 내 뜻이다. ... 이와 같이 꼴찌들(hoi eschatoi)이 첫째(prōtoi)가 되고, 첫째들이(hoi prōtoi) 꼴찌(eschatoi)가 될 것이다.”(14-16절) 본문은 노동권(勞動權)이 마땅히 생존권(生存權)에로 이행되어야 하는 이유를 시사하고 있다. 노동자는 노동할 권리가 있으며, 노동의 공평한 보수로써 생존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마태교회가 지향한 하늘나라의 경제윤리다. 당대의 로마제국의 사회 시스템은 어떠했는가? 첫째들(hoi prōtoi)만이 모든 부를 독점할 수 있는 강자존(强者存)의 경제시스템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꼴찌에게도 동등하게 생존권이 보장받는 소위 ’조화로운 불평등‘ 사회야말로 마태교회가 꿈꾸었던 하늘나라 경제시스템인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꼴찌(hoi eschatoi)‘는 사회경제적 약자의 다른 이름이다. 마지막 일자리를 얻기 위하여 해질녘까지 인력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일꾼, 냉혹한 경쟁 속에서 능력으로 인간성마저 심판받아야 하는 고용인들, 불안한 처지에 놓인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사회의 벼랑 끝에 밀린 이들은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합의대로 동등한 보수를 지불하는 것이 생존권에 근거한 경제정의요 윤리이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마18:21-35): 어느 왕이 거액의 자기 재산을 축낸 하인에게 그의 몸과 처자식과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팔아 갚으라는 단호한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왕은 마음을 돌이켜 아무 조건도 달지 않고 그 하인의 빚을 탕감해준다. 그런데 이렇게 빚에서 벗어난 하인이 자기가 진 빚에 비하면 극히 적은 액수를 빚진 동료를 만나자,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였다. 자기가 왕에게 간청한 것처럼 동료가 시간적인 말미를 조금만 주면 갚겠다고 통사정을 했으나, 그는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노하여 자기에게 1만 달란트 빚을 진 하인을 감옥에 가두에 하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석방하지 말라고 한다. 빚(재화)은 공(公)에 해당한다. 왕의 하인은 공을 사유화한 전형적인 케이스이다. 공을 사유화한 그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것은 마태가 전하는 예수의 하늘나라 비유이다.

어느 날 1만 달란트나 큰 빚을 진 종이 왕에게 끌려왔다. 그가 빚을 갚을 능력이 없자, 왕은 그에게 그의 몸과 처자식을 모두 팔아 갚으라는 엄한 명령을 내린다. 종이 엎드려 간절히 애원하니, 그 왕은 마음을 고쳐먹고 자비를 베풀어 그 종의 빚을 탕감해준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진 빚을 갚으라고 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간절히 애원하였으나, 그는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은 그를 다시 체포하여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 본문에서 왕은 빚을 탕감해준다. 공을 공(公)으로 돌린 것이다. 그런데 왕의 종은 어떠했는가? 자기 소유권을 절대 고수함으로써 공을 사유화한다. 공의 사유화가 결국 그를 패망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달란트 비유(마25:14-30): 이 비유에는 주인과 세 명의 종들이 등장한다. 주목할 인물은 주인과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다. 주인이 맡기고 간 돈으로 두 배의 이익을 남긴 두 종은 주인과 경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주인과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주인이 맡긴 돈을 가지고 이익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안전하게 관리하려고 했다는 데 있다. 그는 주인을 가혹한 사람으로 단정하고 혹시라도 손해를 입히면 꾸중을 받을까 염려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한다. 심지도 않은데서 거두려는 주인 앞에서 손실이 생긴다면 어찌 가만 두겠는가? 그의 행동은 주인의 돈 관리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이 비유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적합한 사명을 주셨다는 것,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심판주로 재림할 때,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주어진 달란트가 일차적으로 재물을 뜻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재화를 잘 관리하여 최선을 다해 운영함으로써 적정하게 늘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최선을 다하는 경제활동을 통해서 생산성을 높여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면 생산성 제고 자체가 목적인가?

최후의 심판(마25:31-46): 최후 심판의 비유는 위에서 살펴 본 달란트 비유와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최후 심판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양)과 왼편에 앉아있는 사람들(염소),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모범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인물은 예수께서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지극히 작은 자‘(elachistos: the least)들이다.
오른편에 앉아있는 자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도와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도와준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무엇을 몰랐다는 것인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이 곧 예수에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마땅히 그 어느 것에도 머무는 바 없이 자비를 행한 것이다(應無所住 行於布施). 사물이 나타나면 충실하게 비추고, 지나가면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 자세로 베풀어야 한다. 베풀되, 베풀었다는 생각(相)에 머물지 않는 것이 진정한 베풂이요, 그것이 곧 예수에게 베푼 것이 된다. 그들은 어려움에 처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는데, 그것이 곧 예수를 도운 행위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들은 자선을 베풀되, 베풀고 나서 베풀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자선이요, 곧 예수에게 베푼 것이 된다. 그들은 마치 거울처럼 행동했다. 어려운 사람들이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는 최선을 다해 베풀고, 지나갔을 때는 베풀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은 것이다.

왼편에 있는 자들은 이와 대조된다. “언제 우리가 주님이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고도 돌보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구원받을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구원받을 행동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미미한 자들을 돕는 행위가 예수를 돕는 행위인 줄 알았다면, 그들도 미미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을 것이다. 그들은 불우한 이웃을 외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예수를 외면하게 된 것이다. 

내가 종교적 업적을 쌓고 구원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전혀 그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께서 자기와 동일시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예수께서 자기와 전혀 동일시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는 사람들이다. 전혀 예수와 동일시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예수는 자기와 동일시한다.

그들이 누구인가?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들 중 하나”라고 한다(40절). 본문에서 ‘내 형제’(adelphos mou)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들은 제자들이나 신자들을 지칭하는 개념인가?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본문의 전체 문맥에서 볼 때 ‘지극히 작은 자들’은 누구를 지칭했는가? 도저히 예수와 동일시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도저히  예수와 동일시될 수 없는 사람들이 지극히 작은 자들로 불렸다면, 그들은 신자 그룹에 속할 수 없을 것이다. 신자들이라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예수와 닮은 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들”은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마태교회 신자라는 경계를 초월하여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려운 사람을 돕되,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야 한다. 선행으로 구원받고 업적을 쌓겠다는 계산 없이 도와야 한다. 도움의 대상은 제한이 없어야 한다. 종교라는 경계를 초월하여 도움이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어야 한다. 사적(私的)인 이해득실에 머물지 않고, 공(公)을 순수하게 공(公)으로 돌리는 선행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에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공을 공으로 돌리는 선행은 무엇인가? 선을 행하되, 베푼 사람도 없고, 받은 사람도 없고, 베푼 것도 없어진 자리가 진정한 선행인 것이다. 마태는 그 어떤 상(相)에도 머물지 않고 베푸는 것(無住相布施)이야말로 예수에게 베푼 것이요, 진정한 베풂이라고 한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재물의 증식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테마라면, 최후심판의 비유에서는 재물의 건강한 소비가 주요 테마이다. 최선을 다해 재산을 증식시키고, 바르게 소비하라는 것이다. 생산의 목적은 사(私)를 위한 소비가 아니라 공(公)을 위한 소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 최선을 다해 재산을 증식시키는 것은 이웃을 돕기 위한 것(公)이 되어야 하고, 이웃(公)을 돕기 위해서는 우리는 최선을 다해 재산을 증식시켜야 한다. 마태교회 공동체가 전하는 예수의 경제윤리는 공(公)의 회복을 위한 경제윤리이다.

누가 특수자료에 나타난 경제윤리

어리석은 부자 농부의 비유(눅12:13-21): 어느 날 예수에게 한 형제가 와서 재산 분배를 공평하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자 예수는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사람의 생명이 재산의 넉넉함에 달려있지 않다.”(15절) 그리고 예수는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이를 설명한다. "한 부자 농부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anthropou tinos plousiou euphoresen he chora).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어느 한 부유한 사람의 땅이 많은 소출을 내었다.”  이 문장에서 주어는 ‘부자’가 아니라 ‘땅’(he chora)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부자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땅이 저절로 많은 소출을 낸 것이다.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나님이다. 따라서 부는 인간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따라서 부는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일 뿐이다. 인간에게 잠시 맡겨진 부는 결국 그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돌아가고 만다(20절). 이를 착각하고 사는데 인간의 문제가 있다.

부자 농부는 쌓아둘 곳이 모자라자 창고를 더 크게 짓고 곡식과 물건을 가득 채운 다음 독백한다. “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쓰기에 넉넉한 좋은 물건들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너는 안심하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19절) 그를 향하여 예수는 무어라고 말하는가? “이 어리석은 사람아, 바로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 소유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
부자 농부는 자신만을 위하여(auto), 축재하였다(thesaurizo). 공을 사유화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부요하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자신을 위해서 재물을 소유할 수 없게 되었다. 진정한 삶은 소유의 풍족함이나, 재산의 축적에 있지 않다. 탐욕(pleonexia)은 인간의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상실하게 한다. 우리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부자 농부는 그가 소유한 사유재산이 자기 생명을 지켜줄 것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살았다. 예수는 사유재산의 축적, 그 자체를 죄로 보았음에 틀림없다. 부자 농부는 재물을 사유화하여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용(허비)함으로써 심판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비유는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부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나인가, 아니면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인가? 부자 농부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부를 자신만을 위해서 소비했기 때문에, 결국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하게 된다. “네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눅12:34). 재물을 어디에 쌓아두어야 하는가? 땅인가, 아니면 하늘인가? 사유화인가, 아니면 공유화인가? 하늘에 쌓아두는 사람의 마음은 하늘을 향한다. 재물을 땅에 쌓아두는 사람의 마음은 땅을 향한다. 지상의 부를 추구하는 사람의 마음은 결코 하나님에게로 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눅15:11-32): 15장에는 세 종류의 비유가 나온다. 본 비유와 함께 잃어버린 양(probata)과 드라크마(drachmas)에 관한 비유가 그것이다.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는 데 세 비유 사이에 공통점이 발견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 상속을 요구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소원을 들어준다. 그는 먼 나라로 떠나 허랑방탕한 생활을 통해서 아버지의 재산(ousia)을 다 허비해버린다(diaskorpizo). 흉년이 들자, 그는 굶주리게 된다(hytereisthai). 돼지치기를 하며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자, 비로소 그는 제 정신이 든다.

탕자는 "스스로 돌이켜“(eis heauton de elthon ephe) 자기가 허비한 재산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아버지임을 깨닫게 된다(17절). 그는 아버지 재산을 탕진한 것이 하늘과 아버지께 대적하는 죄를 지은 것이라고 고백한다(18절). 아버지 집의 풍족함(perisseuousin)을 떠올리며, 탕자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아버지 집에서 종살이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당장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그 아들을 아버지는 반갑게 맞이한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24절)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배설한다. 자비를 베푸는 아버지의 행위는 재산을 허비하고 돌아온 아들의 모습과 대조된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16:1-13): 1-9절에서 주인은 청지기가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는 말을 듣고, 청지기직의 파면을 선언한다. 주인의 해고통보를 듣고, 청지기는 지금과 다른 행보를 하게 한다.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준다. 이러한 청지기의 태도를 보고 주인이 칭찬한다.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허비했다’(diaskorpizon)는 말은 탕자의 비유에서도 나오는 개념이다. 마치 탕자가 허랑방탕한 생활로 아버지의 재산을 허비했다는 것과 동일하게, 불의한 청지기는 맡겨진 재물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 자신의 향락을 위하여 허비했던 것이다. 주인으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자, 청지기는 깨닫게 된다. 내게 맡겨진 부가 내 것이 아니라, 주인(하나님)의 것이라고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청지기는 속으로 말한다”(eipen de en heauto ho oikonomos)(3절).

내게 맡겨진 부가 주인의 것임을 속으로 깨달은 후 청지기는 말한다. “내가 할 일을 깨달았다.”(egno ti poiēso)(4절) 부의 주인이 자기가 아님을 깨닫고 난 후 청지기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빚진 자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주며,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일이었다. 불의한 청지기가 부를 자기 자신을 위한 사적(私的)인 용도로 허비했을 때, 그것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1절). 그러나 부를 이웃과 나누는 공(公)의 용도로 사용했을 때, 그것은 주인의 소유를 늘리는 행위로 간주되었다(8절). 불의한 청지기는 모든 부의 근원이 주인(하나님)임을 깨닫고, 그 부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 공(公)으로 돌림으로써 그의 비극적인 상황을 복된 상황으로 반전(反轉)시켜 놓았던 것이다.

9절에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한다. ‘불의한’(adikos)은 재산을 모으게 된 방법상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 자체가 태생적으로 지닌 속성(屬性)을 말하고 있다(8.9.11절). 누가는 부를 가진 자는 오직 청지기라는 의식을 잊지 말고, 그 부를 주인의 뜻에 따라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일깨워준다. 우리에게 맡겨진 부를 나 자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 결말은 비극으로 끝난다. 11절에서 예수는 “'만약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신실하지(pistos) 않으면(ei oun en to adiko mamona pistoi)'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라고 한다. 본문에서 '불의한 맘몬‘은 ’남의 것‘ 그리고 ’지극히 작은 것‘(10절)과 동일한 의미 선상에서 사용되고 있다. 불의한 맘몬은 본질상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고, ’큰 것‘이 아니라 ’지극히 소소한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불의한 맘몬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따라서 본래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으로 그리고 대단한 것도 아닌 소소한 것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이다. 누가복음에는 맘몬이 세 차례 나온다. 누가는 맘몬의 속성으로 ‘불의 한 것’이요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곧 모든 맘몬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맘몬 공개념”(公槪念)과 통한다. 이러한 맘몬 공개념은 이미 구약성서의 “땅 공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든 재물은 하나님의 것이며, 지금 내게 있는 재물도 내 것이 아니다. 단지 내 것이라는 생각이 있을 뿐이다. 재물에는 본래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다는 맘몬 공개념을 깨닫고, 이를 실천한 불의한 청지기의 나눔 행동을 주인이 칭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16:19-31): ‘공(公)의 사유화’가 얼마나 큰 범죄행위인가에 대해서 예수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설명한다.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값비싼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고 사치스런 삶을 살았다. 그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는 점을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문제는 그 집 대문간에 나사로라는 거지가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에 의존하여 목숨을 연명하며 배고픔과 악성 피부병으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헤매고 있었다. 부자의 사치스러운 삶과 나사로의 비참한 삶이 극적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부자는 매일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이웃을 보면서 시종일관 무관심으로 대했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음부(hadēs)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음부에서 부자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은 무관심으로 대한다. 생전 부자의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하나님의 부자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였다고 아브라함이 말한다.  생전의 삶과 죽은 후의 삶이 반전(反轉)된다. 종말의 때에 인간의 운명은 반전(反轉)된다. 생전에 부자가 받은 ‘좋은 것’(agatha)과 나사로가 받은 ‘나쁜 것’(kaka)이 반전(反轉)되어 상대편에게 주어진다(25절).

인간사에서 영원하거나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게 되어 있고, 반드시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뿐이다. 현세에서의 부나 가난도 영구히 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바뀌고 반전될 수 있다. 부자는 이를 깨닫지 못했다. 죽은 후 부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 생전의 나사로의 운명처럼 역전된다. 부자는 음부에서 아브라함 옆에 있는 나사로를 보며 도움을 청한다. 그런데 불가능하다. 둘 사이에 큰 수렁이 있기 때문이다(26절).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어 이런 사실을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주도록 요청한다. “죽은 자들 중에서 살아난 자가 가서 말하면 들을 것이다”라고 한다(30절). 무슨 뜻인가? 죽은 후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불우한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 요청은 거부된다.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해서 들으면 된다는 것이다(29절). 이웃사랑의 계명은 이미 주어져 있다. 문제는 결단력과 행함이 없는 것이다. 삶이 현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살면, 삶을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부자는 왜 음부에 떨어져야 했는가? 재물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허비하고, 이웃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한 것이 죄이다. 살아생전 자기에게 맡겨진 재물을 사유화하고, 공(公)으로 돌리지 못한 데서 부자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세리장 삭개오의 구원(눅19:1-10): 세리장 삭개오는 부유한 사람(plousios)이었지만, 죄인이었다(7절). 자기 소유(hyparchonton)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ptochoi)에게 주고(didomi), 토색한 것(esokophantesa)에 대해서는 4배로 보상(apodidomi)하겠다는 회향(metanoia)을 선언한다. 이 말을 듣고, 예수는 그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한다(9절). 자기 재산의 절반을 공(公)으로 돌리겠다는 경제적 회향(回向) 선언을 통하여 삭개오는 구원에 이르게 된다.

누가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와 결합함으로써 이 비유들이 재물의 올바른 사용과 그릇된 사용을 알리는 기능을 하게 한다. 삭개오 역시 재산을 올바르게 사용한 예일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 농부나 음부에 떨어진 부자가 그들의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부(맘몬)를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적(私的)인 용도로 소비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세리장 삭개오가 구원을 받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에게 맡겨진 재물을 이웃과 나누고 공(公)으로 돌리는 회향(回向)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약: 누가의 경제윤리관에 따르면 재물(맘몬)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요 공(公)의 속성을 지닌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사적인 용도로 사용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재산을 허비하는 행위가 된다. 이웃을 돕기 위한 공적인 용도로 사용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재산을 늘리는 행위로 된다.  누가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가 단순히 일상생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자세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한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사람이다”(눅12:21) 재물은 경제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초대교회의 재산 공유화(公有化) 운동

예수의 탈소유적 삶의 행태에 관한 전통은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에서 그 편린(片鱗)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행적에서는 초대 교회의 재산 공유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믿는 사람들은 다 함께 지내면서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습니다.”(행2:44-45) “믿는 사람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모든 것은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행4:32) 본문에 비추어 볼 때 초기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임박한 종말신앙 앞에서 재산 공유제가 실현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재산의 사유화가 해체되고, 재산의 공유화가 실천된 초대교회 공동체의 현실을 누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들 가운데서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습니다.”(행4:34-35)

임박한 종말 신앙을 전제로 한 초대교회의 이러한 콤뮨(Kommune) 형태의 공동체 생활은 일정기간동안 지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림지연(Parusieverzögerung)으로 긴박한 종말신앙이 후퇴하게 되자, 재산 공유제는 점차적으로 해체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제국이 공(公)의 사유화(私有化) 질서였다면, 이에 대응개념인 예수의 하나님제국(basileia theou)은 사(私)의 공유화(公有化) 질서였다. 하나님제국 운동은 로마제국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의해서 생존권을 박탈당한 갈릴리 민중이 중심되어 벌인 공(公)의 회복운동으로 출발하였다. 그것은 연대(solidarity)를 넘어선 나눔(sharing) 운동이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함께 나누는 밥상 공동체 운동이요 무상(無償) 치유운동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의 뿌리이며 상수(常數)이다.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초기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예수의 하나님제국 운동에 시공간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가장 근접해 있는 공동체는 무엇이었는가? 복음의 제1세대에 속하는 Q교회 공동체일 것이다. Q가 전해준 복음, 곧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Gospel of the poor),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Gospel for the poor), 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복음(Gospel by the poor)을 그보다 한 세대 뒤에 존재했던 마태와 누가교회 공동체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확대되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복음의 제2 세대에 속한 마태와 누가교회 공동체는 더 이상 사회경제적인 가난한 사람들이 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이루지도 아니 했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교회 신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회경제적으로 중산층에 속했을 것이고, 그들에 의해서 교회의 선교정책이 주도되었을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중산층에 속한 제2세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사회경제적 약자들과의 연대 및 나눔의 삶을 통해서 예수와의 일체감(一體感)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복음의 정체성(正體性)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글로벌 금융자본주의의 붕괴와 공(公)의 회복운동

신자유주의와 시장만능주의 경제체제란 무엇인가? 현재 진행 중인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을  떠받치고 있는 미국 월가의 금융자본주의의 붕괴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가? 금융자본주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공(公)이어야 할 글로벌 경제를 극소수의 금융자본가(私)의 손에 넘기는 데 있다. 공(公)의 사유화(思惟化)의 마지막 종착점이 다름 아닌 글로벌 금융자본이 아닌가?  
따라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하의 현대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公)의 영역’이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는 애초에 공(公)으로 머물러 있어야 할 글로벌 경제체제를 사(私)의 경제 시스템으로 전환시켰다. 공의 사유화 경제 시스템이 완결되는 순간 금융자본주의 체제는 붕괴로 이어지게 되었다.

땅뿐만 아니라 하늘과 바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삼라만상이 모두 공(公)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공(公)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공(公)이어야 할 우주 만물이 글로벌 자본가 계층에 의해서 사유화되어가고 있다. 지금 지구 생태계가 겪고 있는 생태계의 재난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근간(根幹)으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와 무관하지 않다. 자연에 대하여 적대적인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은 세계 경제자본의 사유화 과정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현대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을 끊임없이 부추김으로써 발전해왔다.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 인간의 소유욕(所有慾)과 보다 편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함으로써 행복할 수 있다고 가르쳐왔다. 이를 위해서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이윤을 극대화시켜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인간이 전보다 더 행복해졌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자연이 오염되고 파괴됨으로써 인간의 삶의 터전이 전보다 훨씬 열악해졌다. 인간을 더욱 행복으로 인도하리라는 희망에서 출발한 현대 자본주의 실험은 이제 금융자본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위기에 부딪혔다. 지구의 자원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한계가 있다. 대량 생산을 하고 대량 소비를 하면, 경제는 당분간 돌아갈지 모르지만, 긴 안목에서 보면 지구 자원을 소진시킬 것이다. 서구사회에서 누리는 풍요는 아프리카의 경제적 빈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제로섬 사회(Zero-Sum Society)에서 살고 있다는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지구 생태계의 재앙은, 인간의 탐욕에 뿌리를 둔 현대 자본주의에 기초한 공(公)의 사유화(Privatisierung)가 빚어낸 필연적인 업보(業報)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 인류가 풀어야 할 최대의 과제는 무엇인가? 온갖 탐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일이다. 사회구조적 차원, 경제윤리적 차원,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특정집단에 의해서 사유화된 공(公)을 다시 공(公)으로 돌리는 일이다. 금융자본을 공(公)으로 돌리는 것이다. 공(公)의 회복운동이야말로 21세기 한국교회가 지향(志向)해야 할 선교의 최대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AI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

옥스퍼드대 수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존 레녹스(John Lennox) 박사가 최근 기독교 변증가 션 맥도웰(Sean McDowell)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간「God, AI, and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여성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도 계승해야"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가 「한국여성신학」 2025 여름호(제101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서방교회와는 다르게 동방교회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극단적 수구 진영에 대한 엄격한 심판 있어야"

창간 68년을 맞은 「기독교사상」(이하 기상)이 지난달 지령 800호를 맞은 가운데 다양한 특집글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1945년 해방 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경재 교수는 '사이-너머'의 신학자였다"

장공기념사업회가 최근 고 숨밭 김경재 선생을 기리며 '장공과 숨밭'이란 제목으로 2025 콜로키움을 갖고 유튜브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