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2일 오전 7시 신촌성결교회 한복협 월례회 발표문
그동안 한국 교회는 개별적으로 또는 연합하여 북한 기독교 단체와의 다양한 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통일문제 해결에 뛰어들어 왔다. 통일을 향한 과정과 방안에 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통일의 목표에 있어서도 생각이 다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교회 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 발제에서는 통일 문제를 놓고 그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제시하고 그것의 필연성 또는 가능에 관하여 논하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목이 말하는 대로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기본자세”는 무엇이어야 하고, 어떤 “책임”을 어떻게 져야하는가의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서 몇 가지 토론 안건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말하자면 기독교통일론의 기본전제 몇 가지를 화두로 던져보려고 한다.
1. “평화”와 “통일”
통일의 과정은 “평화적”이어야 한다. 통일의 목표도 “평화”여야 한다. 그리고 “통일”은 평화를 담는 그릇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평화통일”을 준비한다.
평화는 한반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하지만 한반도의 경우 분단 상황이 평화 정착의 저해요인이고, 분단구조가 평화구조 수립의 저해요인이다. 따라서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이 평화를 성취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다. 여기서 분단의 극복을 위해서는 분단이 담고 있는 평화저해의 모습을 분명히 밝혀내어 해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분단 극복과 평화 성취는 동시적 사건인가?
남북한은 분명히 하나의 민족이나 두 국가로 분단되어 있다. 그것도 군사적 이념적 적대관계에 있는 분단국들이다. 하나의 국가로 통일이 이루어지면 이런 적대관계는 구조상 사라진다. 평화적인 통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동서독의 경우 통독 이전의 상황이 한반도와 같은 민족 내적인 적대적 분단구조는 아니었지만, 통일은 일단 평화적으로 이루어 졌다. 다만 양 독을 에워싼 네 점령국(서독의 “미국, 영국, 불란서”/동독의 “쏘련”)은 군사적으로 냉전적 적대구조(“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속에서 경쟁했다. 통독은 이런 유럽/세계의 적대적 구조의 해소를 낳았고, 외적 구조상으로는 평화체제의 디딤돌을 놓을 수 있었다.
오늘의 상황에서 한반도 주변은 과거 유럽과 같은 적대적 냉전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한과 북한이 적대적 분단구조를 지속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지정학적으로 그리고 남북의 대외 관계를 보면 한반도 통일 역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등 6자회담 당사국들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다만 한반도 통일이 동북아 지역 국가들의 합의보다는 남북 간의 태도와 결단이 주된 변수가 된다는 점에서 통독과 유럽의 상관관계와는 그 틀이 다르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한반도 통일은 남과 북이 통일을 주도하되 통일을 통하여 동북아 지역에 지역적 평화가 수립될 수 있다는 확신을 또 평화의 로드맵을 주변국들에 제시하고 동의를 확보해야할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2. “평화적 분단 관리”와 “평화 공존”
또 하나의 인식공유와 공동과제가 있다. 통일국가로 가는 과정에 있는 오늘의 분단현실 속에서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정도의 평화를 담보해야 한다는 과제이다.
그것은 분단에 대한 “평화적 관리”를 통하여 통일까지의 분단 상황을 “평화적 공존”의 상태로 지속하면서 평화통일의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이 한국교회가 나서야 할 “다양성 속의 합일”이라는 민주적 평화 만들기 과제라고 본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남과 북이 어떤 경과를 통해서 합의에 이르렀던 간에 쌍방이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1991/2)가 내용상으로는 가장 성숙한 단계의 평화공존 합의라고 생각한다. 그 후로 이루어진 <6.15 선언>과 <10.4 선언> 그리고 앞으로 다시 이루어 질 수 있는 여타의 공동선언들이 실상은 위에 말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실행에 옮기는 다양한 이정표라고 생각한다. 남북 간의 상호인정, 화해, 교류 및 협력 등에 관한 실질적 효과가 가시화되어야 평화공존을 위한 분단의 평화적 관리가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교회는 정부가 아니다. 통일 문제에 관한 한 사랑과 공의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적 NGO의 하나이다. 정부 당국 간의 갈등과 대결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사실 만은 분명히 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교회의 대북 상대는 북한 정부나 당이 아니라 “북한 백성”(인민)이라는 점이다. 각기의 사회체제제의 상이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민간 대 민간”의 교류협력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하나는 당국차원의 막힌 “담”을 헐어 주는 “화해와 소통”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당국의 선한 정책을 뒷받침하는 협력적 지원과 동시에 적대적 정책에는 비판하며 고치게 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3. “복음화”와 “평화”
교회의 평화통일 헌신을 민족적, 국가적 차원의 봉사로 제한할 수 없다. 교회 존립의 근거인 “선교와 복음화”를 통일열차에 실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서 한가지 신학적, 실천적으로 합의할 것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곧 선교와 복음화는 “평화 실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민족 내적으로 보면 남한은 물론 북한 땅의 선교와 복음화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다만 통일 이전은 물론이지만 통일 이후에 까지도 북한과 남한의 “백성”은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식 또는 가치관에 있어서 크게 다르고 다양할 수 있다. 그것은 같은 복음의 “씨앗”에도 불구하고, 토양은 전혀/상당히 다르고, 동시에 그것이 “옥토”라 해고 그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통독사회가 국가통일 이후에도 “사회적 분단, 심리적 분단, 문화적 분단”을 살고 있다는 현실적 고백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남한과 다른 북한 땅의 오래된 “토양”을 고려함 없이 남한식 토양으로 알고 선교나 복음화를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남한식의 교파난립의 선교와 교회세우기는 북한토양에 맞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또 다른 하나는 통일한국의 미래는 통일된 나라의 한국교회가 아시아 특히 동북아시아 복음화와 선교의 첨병이 되고 또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외형적 물리적 국력이나 등치에 있어서는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와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선교와 복음화를 중심한 “힘, 꿈, 인력, 비전”에 있어서는 한국교회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앞서가는 선두주자 교회인 것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것도 아직은 교회의 외형적, 물리적 모습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말이다. 문제는 앞으로의 자기 혁신이다. 한국 국내의 상황만이 아니라 전혀 다른 토양의 북한 상황을 고려한 자기 혁신이 그 하나의 과업이라면, 한반도를 넘어서 동북아 주변 강국들의 전혀 다른 성격과 토양의 “다른 백성들”을 위한 복음화와 선교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현행 신학적 협소함, 교리적 폐쇄성, 교회의 대사회적인 실추된 모습 등을 근본적으로 개선 내지 갱신하지 않고서는 아시아 및 동북아의 복음화 및 선교는 그림위의 떡일 수 있다. 이 자체 변화도 평화공존 방식의 “소프트 랜딩”을 통한 변화를 만들어 갈 수는 없을까? 스스로의 폭을 국내적 우물 안 개구리에서 세계적 지평으로 넓히고, 스스로의 자세를 겸손히 낮추어 백성들 마음속으로 보다 깊게, 세운 뜻을 속세가 아니라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드높이, 헌신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섬김’으로 변신하자는 희망의 외침이다.
4. 나가면서
통일을 앞두고, 통일을 향하여, 한국교회는 “평화의 사도”로 부름 받았음을 화신한다. 한국과 북한과, 아시아와 세계를 향하여. 분단을 살아온 현행의 “분단세대”는 분단 극복의 평화 곧 “위로의 평화”를 단계적으로 심어야 한다. 앞으로 이 나라를, 이 세계를 걸머질 “분단 이후의 세대” 에게는 고질적 분단의 아픔과 멍에에서 해방시켜 “적극적 화해와 평화”의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평화통일 및 선교와 복음화에 있어서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공동으로 취해야 하는 “세대 간 화해와 협력”의 과제이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적으로 보장하는 열쇠가 있다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