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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봉호] ‘聖經神學’으로서의 ‘誠敬神學’(1)

안봉호 박사(기독교학술원 연구위원, 한국성경연구소)

2012년 10월 5일 기독교학술원 월례발표회 발표

創造主 하나님은 당신의 지으신 세계[創造界]에 자연 법칙(natural laws) 만이 아니라 신령한 진리(spiritual truths)도 심어 놓으셨다. 이를 인식함이 요청된다. 보통의 경우 이 놀라운 진리가 가볍게 看過되어 그 영적 損失이 막중하다.

예를 들어보자. 주 예수님이 왜 이 낮고 천한 곳에 降生하시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절망과 좌절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에게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요’라는 福音을 전하는 가운데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그 사람은 그야말로 ‘새 사람’이 된다. 그리하여 빛나는 새 삶을 사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이 때 하나님의 은혜로 이 믿음을 죽기까지 잘 보존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음을 본다. 믿는 자라 할지라도 삼키려고 虎視耽耽 노리는 우는 사자 같은 사탄의 밥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로 일순이라도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는 성경의 증거가 분명한데 어찌 이 복음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는 말인가? 신앙생활을 못하게 된 사람들의 경우들을 보면 그 이유들이 그야말로 千態萬象이다. 그러므로 여러 제약들로 말미암아 여기에 그 이유들을 다 列擧할 수 없다.

그러나 오프라 원프리(Oprah Gail Winfrey, 1954년 1월 29일 ~ ) 같은 경우에는 큰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다. 그녀는 그야말로 신데렐라와 같이 가장 성공한 미국의 흑인 방송인이다. 그녀의 悔心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감동적이다.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새 사람 됨의 전형처럼 빛났던 그녀였다. 그녀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적인 복음의 핵심(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인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려 이 땅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 확증적으로 증거되었었은들 그녀는 하나님의 빛나는 딸로 남아 있었지 않았었을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20,24). 우리 주님이 남기신 누구나 아는 말씀이다. 하여 보통은 많은 말씀 중에 하나로 간과하고 만다. 필자도 그랬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깨닫게 되어졌을 때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임하였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영광의 주님(고전2,8)이셨으면서도 그 치욕의 갈보리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생생하게 증거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시면서도 이 땅에서 굳이 십자가를 지시어야 했음에 대한 하나님의 일대 웅변이 이 주님의 증거 가운데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하면, <주 예수께서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 한 알의 밀알처럼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류의 마음을 당신께로 이끄시어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실 수가 없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면서도 갈보리 십자가를 지시어야 했음에 대한 복음의 진리를 강화하고 확증하는 것이 자연 가운데 있는 한 알의 밀알인 것이다. 환언컨데 우리 주님이 갈보리 십자가를 지시어야 했음의 신학적 진리가 한 알의 밀알이 썩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평범한 듯이 보이는 자연적 진리 가운데 보증되고 확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자연 가운데 숨기어 있는 신령한 진리는 복음적 신학적 진리의 脚註(footnote)다.

하여 알게 모르게 그 영광의 주 하나님께서 굳이 그 험한 갈보리 십자가를 왜 지시어야 했을까하고 의혹을 품는 모든 인류에게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자연 안에 있는 진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이유를 자연스레 깨닫게 해 주고 계신다.

<오,  밀알(물론 신령한 포도나무이신 가운데/요15)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밀알 같은 신령한 진리가 母川回歸의 경이를 보이는 연어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母川에서 부화한 새끼 연어는 마침내 바다로 내려와 며칠 바닷물에 적응한 후 태평양으로 나아간다. 수년 동안 태평양에서 成魚가 된 연어는 母川에로 회귀한다. 이 과정에서 수 백만 마리의 연어들이 遠洋漁業者들에게 낚이어 모천회귀에 좌절한다. 그러나 용케 이 죽음의 덫에 걸림에서 해방된 연어들이라 해도 겨울잠을 위하여 體內에 영양을 보충하고자 하는 수십 마리의 곰떼들의 낚시 사냥을 벗어나야 한다.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적지 않은 연어들이 이 과정에서 곰들에게 희생된다. 이 모든 죽음의 덫들을 벗어난 소수의 연어들만이 모천에 회귀한다.

바로 이 연어들의 모천 회귀야말로 우리 人生을 指示하는 것이 아닌가.

먼저 모천은 生水의 根源(렘12,13; 17,13) 되신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를 지시하는 것이렸다. 그리고 태평양 바다에까지 가서 거기서 모천까지 다시 회귀하는 <길>은 길이요 진리시며 생명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요14,6)를 지시하는 것이렸다.

바로 이와 같은 신학적 진리가 고린도전서 8장 6절에 表明되고 있다. 萬有가 비롯하고 회귀하는 분은 우리 주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 만유의 창조주적 始原 되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만유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이제 그 가운데 우리 인생은 - 우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간다. 이 놀라운 신학적 진리가 고린도전서 8장 6절 가운데 표명되고 있음을 알도록 성령께서 눈을 열어 주셨다. 주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한다.

(그렇다면 모천에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많은 원양 어업자들에게 낚이고 또 수다한 곰들에게 먹히우는 연어와 같은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 인생을 영멸로 낚는 원양 어업인들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주 예수를 믿어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감에 우리를 교묘하게 유혹들하는 허다한 종교들과 철학들과 사상들 및 異敎 문화들이 아닌가. 그렇다. 생수의 근원 되신 아버지 하나님께 생수의 통로(요14,6) 되신 주 예수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나아가는 永生의 역사를 방해하고 가로막는 모든 세력들은 사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영혼들을 호시탐탐 낚는다. 그리고 주 예수를 믿고자 하는 영혼들을, 異端邪說들은 聖三位 하나님께로 나아감을 치명적으로 가로 막아 永滅에로 인도한다. 두렵고 두려운 일인지고.

바로 여기에서 만인구원설은 너무 安易하고 浪漫的인 환상임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주 예수의 복음을 미처 듣지 못하고 善意의 原義를 가진 사람들은 그가 무슬림이나 불교도나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구원 받는다는 Karl Rahner의 포괄적 보편주의는 어찌 되는 것인가? 물론 그런 假定을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 예수의 갈보리 십자가로 깨끗함을 덧입는 은혜 말고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있다는 말인가? 어느 누구나 예외 없이 原罪의 사망의 덫에 걸리었음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은 하고 있기나 한가? 原罪로 모든 사람들이 오염되었음을 인식한다면 안이하게, 주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신앙고백을 통하여 주 예수의 의를 덧입음 없이도 혹시 구원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라고 推定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심판주가 아니고 하나님이 심판주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인류의, 개개 영혼의, 구원 문제를 주 하나님(주 성삼위 하나님)께 맡긴다.

그리고 노년의 빌리 그래함 또한 로벗 슐러와의 공개 대담(1997.5.31)에서 무슬림이나 불교도나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모두 구원 받는 그리스도의 몸의 成員들이라고 천명하고 나섰는데,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과연 인류가 신음하는 모든 죄악의 근원이 原罪(창3,5)임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가? 이 원죄의 오염은 우리 모두를 永滅로 이끌어 감을 정녕 몰랐단 말인가? 이 원죄로 말미암은 영멸의 저주를 도말해 주는 것이 주 예수의 갈보리 십자가임을 과연 몰랐었단 말인가? 그랬던 것이라면 그의 evangelism은 아예 피상적이었던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튼 인류는 가만있지를 못하고 우리를 구원할 진리를 찾고 찾았다. 허다한 종교들과 철학들이 나타난 것은 우리 인류를 구원할 진리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공자는 아침에 진리의 길을 들어 알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論語)라고 한 것이 아닌가. 인류는 뜨겁게 진리면서 길이고 길이면서 진리인, 우리를 구원할 道를 찾아 마지않는다. 지금 이 순간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진리이면서 우리가 行할 수 있는 길이고 우리가 行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할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만유가 비롯하고 또한 동시에 바야흐로 우리가 돌아갈 사신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시며, 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만유가 비롯할 때 말미암을 길이 되시는 가운데 바야흐로 우리 인생이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갈 길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고전8,6)가 아니실까?

이 진리와 길을 인류는 찾고 찾았다. 마침내 이 진리와 길이 우리에게 스스로 自啓示(Selbst-offenbarung)하시었다. 이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 그 책(the Bible)이다. 萬世萬界의 길과 진리 되신 聖父 하나님과 聖子 하나님(그리고 성부와 성자를 진정으로 믿어 우러를 때 우리에게 來住 臨在 同行하시는 보혜사 聖靈 하나님)을 우리에게 啓示함으로써 인생들이 행할 길과 진리를 밝히는 - 하늘과 땅을 잇는 - 거룩한 날줄[聖經]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인류에게 주어졌다.

하여 聖經 66권은 聖父 하나님과 聖子 하나님(그리고 보혜사 聖靈 하나님)을 증거한다. 계시한다. 그리하여 우리 인류로 하여금 구원의 길을 가게 한다. 성경이 두툼한 책으로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해도 결국은 사신 참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증거하고 계시하는데 촛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 당신(Du)과 당신이 보내신 (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우리 주 예수님이 밝히 계시하신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성경 66권은 사신 참 하나님이신 聖父 하나님과 그 길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聖子 하나님을 계시함으로써 우리로 믿어 - 聖靈 안에서의 - 永生을 얻게 하기 위한 聖書이다.

하여 우리 주 예수님은 힘주어 强調하신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렇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주 예수(生水의 通路)를 믿음으로 아버지 하나님(生水의 根源)께 나아가 永生福樂을 누린다, 聖靈(生水의 강/요7,38) 안에서.

실로 聖父 하나님과 聖子 하나님과 또한 聖靈 하나님을 아는 것이 永生이다.

그러므로 聖經은 과연 聖經답게 우리로 永生의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사신 참 하나님 곧 聖三位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한다. 중심적으로 그리고 핵심적으로. 그래서 성경을 읽는다 하면서 사신 성삼위 하나님을 제대로 注目하지 못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은 마땅히 이 사신 성삼위 하나님을 주목하고 가르치고 선포하는 일에 全心全力을 다해야 한다. 그 이외에 다른 그 무엇에 힘쓴다는 것은 신학의 本務를 잊음이요 저버림이다. 그러므로 이 놀라우신 성삼위 하나님을 믿어 우러러 사랑하게 함에 소홀하거나 해찰하는 모든 신학은 이제 더 이상 신학이라는 이름 값을 못함인 줄 알고 신학이라는 場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리고 聖經을 받든다 하면서도 사신 주 성삼위 하나님을 마침내 믿지 못하게 하는 모든 異端邪說들은 이제 신학이라는 이름도 교회라는 현혹하는 칭호도 내려놓아야 한다. 왜? 주 성삼위 하나님 이외의 것을 진리로 복음으로 선전하는 이단사설들은 바로 지옥으로 인도하는 사망[永滅]의 문들이기 때문이다.

舊約을 통해서는 여호와 하나님(聖父 하나님)이 전면에 계시되셨고 新約에서는 주 예수님(聖子 하나님)이 계시되시는 가운데 보혜사 聖靈 하나님이 계시되시었다.

그렇더라도 구약에서부터 성부 뿐만 아니라 성자도 鮮明하게 계시되심을 본다 :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배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28, 10-14). 야곱(이스라엘)이 보았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던,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땅 위에 선 사닥다리는, 바로 <하늘이 열려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인자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요1,51)가 아니시고 무엇일까.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이르르는 사닥다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으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 가운데 來住 臨在 同行하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 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실로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이심을 알 것이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믿음만도 그렇게 힘들어 하는 가운데 바벨론 포로 생활을 거치고 나서야 자기들이 믿게 된 여호와 하나님이시야말로 사신 참 하나님으로서 영원한 왕(렘10,10)이심을 가까스로 깨달아 믿게 되어지는 것을 볼 때, 한꺼번에 주 성삼위 하나님을 깨달아 알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가운데 계시의 점진성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인내를 우리는 본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 가운데 우리 인류를 당신의 온전한 앎에로 인도하시는 점진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든 창세기 28장(말씀하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에 이르는 사닥다리)에 계시되신 하나님은 요한복음 15장(성부는 농부, 성자는 이 농부가 기르시는 포도나무, 주의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는 이 포도나무의 가지들)에 보다 선명하게 계시되시고 있다.

포도나무이신 우리 주 예수님은 사닥다리시다 :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요16,28). 아버지 하나님께로의 唯一한 길(요14,6) 되신 우리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닥다리시라면 우리 주님을 <∣>라고 상징적으로 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닥다리 위에 계신 여호와 성부 하나님은 모든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당신의 장중에 두신 절대주권(행1,7)의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딤전6,15)이시니, 모든 것을 주재 주장 절대 통치하심에서 <—>라고 상징적으로 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부(—)는 창세 전부터 곧 영원 가운데 성자(∣)를 사랑(요17,24)하신다. 바야흐로 성부와 성자는 영원 가운데 상호 거룩한 사랑의 친교 가운데 사신다. 永生하신다. 모든 것을 주시고 모든 것을 받으시는 절대 양도의 사랑으로 영생하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부의 영이심과 동시에 성자의 영이신 성령(롬8,9)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이음줄(vinclum amoris)이심을 알 것이다. 하여 이와 같은 성령 하나님을 우리는 <◯>라고 상징적으로 표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이와 같이 거룩한 사랑의 親交 가운데 영생하시는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을 이제 우리는 상징적으로 <⊕>라고 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라는 로고를 기독 신앙 안에 제일 먼저 도입한 교회는 에베소 교회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를 이크튀스(ίχθυς)라고 한다. 이를 오늘날 누구라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를 이크튀스(ίχθυς)라고 함은 이 표지 안에는 <예수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주>라는 헬라말의 頭文字가 고스란히 내포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에서 물고기 표지로써 이크튀스를 나타내었음을 거의 모든 크리스챤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제 에베소 교회에서 근 삼년에 걸쳐 우리 주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사도 바울이 확증적으로 증거하고 선포함에 에베소 교회는 마침내 믿음(⊕)을 일으키었다. 그리하여 에베소 곳곳에 그와 같은 믿음의 함성을 아로 새겼다.

그렇다. 이 믿음(⊕)은 기독 신앙의 초석이다 :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 15-19).

그러므로 주 예수님이 聖父의 품 속에 있는 獨生하신 하나님(요1,18)으로서 聖子 하나님이심을 입술로 고백하고 이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갈보리 십자가에서 代贖의 죽음을 죽으시고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었음을 마음으로 믿을 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을 받는다(롬10, 9). 이렇게 놀라우신 영광의 주님(고전2,8)이 나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위하여 온 몸을 代贖의 생축으로 드리셨음을 생각할 때 우리 가슴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신다(고후5,14).

이렇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으로 우리는 구원 받는다.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교회라는 간판을 걺으로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異端들을 우리는 경계하고 경계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永滅에 합당한 자들을 위하여 갈보리 십자가를 지셨고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영생의 구원을 받으려면 주 예수님이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려 降生하시어 우리의 죄악을 代贖하시는 우리 주님의 갈보리 십자가의 죽음을 믿어야 하고 또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었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고전15, 1-8).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세주(ίχθυς)이심을 믿음을 <⊕>로써 에베소 교회와 함께 나타내고,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 갈보리 십자가를 지시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의 +>를 赤十字로 하고 <⊕의 ◯>를 草綠色으로 함으로써 죽은 지 사흘만에 復活하시었음을 나타낸다. 이리하여 바야흐로 성경신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 <>.

그런데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은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좌정(골3,1)해 계시는 가운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15,9)고 성령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이렇게 목하 우리 가운데 力動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을 우리는 믿는다.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의 獨生子이심을 믿고, 이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려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사시었음을 믿으며,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오르시사 지금은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바야흐로 주 성삼위 하나님을 믿음()을 우리는 基督 信仰의 三大 神秘라고 일컫는다. 과연 우리 가운데 영원하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의 구세주로 道成人身하시었음은 실로 구원의 신비이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갈보리 십자가를 지셨고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었음 또한 구원의 놀라운 신비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주님께서 지금은 昇天하시어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부르심 또한 놀라운 은혜이지 않을 수 없는데, 바로 여기에서 聖父(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아버지 하나님)와 聖子(성부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신 주 예수님)와 聖靈(특히 성자의 영으로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보혜사) 곧 성삼위 하나님의 역동하시는 신비가 드러난다. 이 기독 신앙의 삼대 신비를 우리는 2000년 사도 전승 위에 선 聖敎會들과 함께 고백하고 선포한다. 이 신앙으로 인류는 구원 받고 풍성한 삶으로서의 永生을 얻는다. 이 길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이 기독 신앙의 진리 말고 다른 기독 신앙의 이해 방식은 있을 수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 만일 이 이외에 다른 구원의 도리가 있는 양하는 것은 이단이거나 邪說로서 우리를 永滅의 길로 이끌고자 하는 사탄의 詭譎에 불과하다.

이렇게 <>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세주>이심의 진리를 나타내고. 이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사시었음을 나타내며, 바야흐로 이 주님께서 이제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부르심을 나타낸다. 곧 <>로서 기독 신앙의 삼대 신비를 나타낸다.
그리고 <>은 동시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은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사시고 지금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에로 부르시는 주 예수님을 第二位로 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을 나타낸다.

하여 이제 복음의 진리에 이르른 살아 있는 그리스도 인들은 <>의 복음 진리 가운데 살고 있다 :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고후2,17) 성령으로(갈5,25)> 복음 진리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실존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로써 표현하는 바를 우리는 <>로 표현하는 바이다. 물론 우리는 바울처럼 말로도 표현하기도 하고 이크튀스()로써 표현하기도 한다. 어떤 무엇으로 표현을 하든 우리는 聖經이 계시하는 놀라운 진리() 안에 거하여 이 복음 진리를 만방에 선포도 하고 누린다.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살전1,5) 된 福音이여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딤전1,17) 그렇습니다. 우리는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絶對主權(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며 참새 한 마리까지 다 세심히 주재하시는)의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요16,28) 하신 주 예수, 지금은 아버지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계신 주 예수(행7,56)(|)를 믿습니다.

이렇게 聖父와 聖子를 믿을 때 우리 가운데 보혜사(파라-클레토스) 聖靈이 來住하심(요7,38)(◯)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신 聖父와 聖子와 聖靈 곧 主 聖三位 하나님(⊕)을 믿습니다.

오, 이 복음의 주 성삼위시여, 우리 가운데 은혜와 영광의 주 하나님으로 降臨하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이렇게 진리와 생명과 사랑으로 自啓示하신 주 성삼위 하나님()은 모든 것이시고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시다. 곧 알파와 오메가시다.

聖父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다 :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1,8);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命定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41,3).

聖子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다 :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가졌노니(계1,17.18);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13).

聖靈 하나님도 알파와 오메가시다. 주 예수께서 아버지께 구하심으로 우리에게 來住하시는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성령님은 <다른 보혜사(알로스 파라-클레토스)>(요14,16)시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시라면 다른 보혜사이신 우리 주 성령 하나님도 알파와 오메가시다.

여기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성삼위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심을 알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더 이상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으리만큼 크신 분(Quo maius cogitari nequit)이시다. 이 때 우리 주님을 最大者라 할 때 단순히 공간적인 크기에 있어서 최대자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를 무한히 넘어 가시는 분, 곧 우리를 무한히 超越하시는 분이시란 뜻이다. 그렇다고 우리를 그냥 超絶하시는 분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를 무한히 超越도 하시면서 동시에 內在도 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알파와 오메가이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이 存在論的으로(ontologisch) 우리를 무한히 超越하시면서 우리 가운데 內在하시는 분이라 하니까 實存的으로(existenziell)도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바처럼, 자기는 無神論者임을 천명하면서 모든 공교한 말을 다 동원하여 애써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자 하는 무리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입술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무신론적으로 사는 자들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실존적으로도 사신 성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무한히 超越하시면서도 內在 혹은 內住하심이 요청된다. 바로 이를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 4a). 그러니까 信仰 人格的으로 주 예수님을, 바야흐로 주 성삼위 하나님을, 믿음으로 迎接함이 요청되는 것이다. 지극히 인격적인 분이신 우리 주님은 우리가 끝내 영접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來住하시지 않으신다. 이런 상태를 회개함이 없이 끝내 유지하면 그야말로 지옥 간다. 생명의 근원이신 분이신 성삼위 하나님 하고 斷絶되었으니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몸소 몸을 굽히시어 우리에게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사랑의 호소를 마지않으시는 사랑의 주 하나님을 끝내 門前薄待하면 마침내 우리를 향하신 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은 震怒하신다. 지옥은 우리 주님의 무한한 슬픔이면서도 동시에 거룩한 진노의 화염이다.

그러니까 우리(인생들)는 여기 있고 주님()은 거기 - 알파와 오메가로서 - 동떨어져 계신 것이 아니다. 우리와 주님은 이제 사랑으로 연합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구원(Heil, whole, healing) 받은 삶을 살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구원을 주 하나님은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주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으로 연합하는 꿈을 가지시고 역사(History = His Story)를 내시고 통치하시고 섭리 인도하신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싦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히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은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 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이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 2-14).

실로 우리는 알파와 오메가이신 주 성삼위 하나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는 사랑의 연합과 親交 가운데 나아가야 한다. 구원 받은 聖徒들은 이 거룩한 사귐 가운데 나아가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얻는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연합과 친교가 없이는 우리에게 심판과 저주가 오고 마침내는 永滅을 피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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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經에 自啓示하시는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다.

그럼 존재론적으로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우리 주 하나님()은 永遠無窮絶對하시고 必然的 존재시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아니 계신 적이 없으셔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성삼위 하나님으로서 永生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이를 성경이 증거하고 정통신학이 증거한다. 그러니까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內在的으로도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 성삼위 하나님이시다(immanent Trinity). 그리고 시간 가운데 經綸的으로도 처음부터 끝까지 성삼위 하나님이시다(economic Trinity). 실로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리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無窮하시다. 無所不在하시다. 어떤 차원에서도 계신다. 살으신다. 全知全能하시다. 遍在하신다.

또한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絶對하신다. 우리 인생은 제아무리 날고 뛰어도 결국은 挑戰을 받아 좌절할 수밖에 없는 相對的 존재임에 대하여 우리 주 하나님은 絶對者시다. 물론 우리를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부르시는 가운데 우리와 더불은 사랑의 친교를 나누시고자 마치 相對者의 모습을 취하시는 자유를 누리시기도 하시지만, 정녕 우리 주 하나님은 동시에 절대 주권의 주 하나님이심을 일순이라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시람은 우리 주 하나님이 必有이심을 말한다. 우리 被造物은 偶有다. 영원부터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의하여 비로소 偶發的으로 존재하기 시작하는 존재가 우리다. 이에 대하여 우리 주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이시매 우리 주 하나님은 필연적인 존재로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自存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이심은 존재론적으로,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永遠無窮絶對者이시고 必然的으로 自存者이심을 말하는 것이다.(우리 주 하나님의 非共有的 屬性들)

그렇다면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시라는 것은 성품적으로 무엇을 말함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이 完全(Vollkommenheit)者이심을 말한다. 그렇다.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眞 善 美 聖 義 敬 愛 誠 共 榮光 平和 讚揚(/喜樂)(우리 주 하나님의 共有的 속성들)이시다.

이에 대하여 우리 인생은 아담의 원죄 이후 거짓되고 不善하며 추하고 俗되며 不義하며 경박하고 無情하며 이룸이 없고 이기적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늘 不和하여 저주로 신음하고 고통 가운데 영멸로 작정되어진 자들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罪惡을 代贖하시려 갈보리 십자가에서 贖罪祭의 죽음을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죽을 수밖에 없이 된 우리 인생이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의 眞 善 美 聖 義 敬 愛 誠 共 榮光 平和 讚揚(/喜樂)을 우러러 憧憬하며 발돋음할 수 있는 은혜의 부름을 받았다. 여기에 우리의 聖化가 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 인생의 하나님의 형상에로의 회복이 있다.
<眞>
진리(요14,6)시기에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 예수의 영이신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사신 참 하나님으로서 영원한 왕(렘10,10)이신 분은 아버지 하나님 뿐이시다.  바야흐로 聖父 聖子 聖靈 곧 주 성삼위 하나님()은 진리시다.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신 진리시다. 여기까지 우리의 도움(에벤에셀)이 되신 진리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를 혹시 일순이라도 잊으면 안 된다. 이 사신 하나님을 여하한 이유로든 망각(Gottvergessenheit)하여 떠나면 우리는 영생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임을 명심할 것이다.

도리어 날마다 이 진리와 그 은혜에 새록새록 새로와져야 한다 :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3, 18).
<善>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우리 주 예수님 말고 우리로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할 선한 존재가 어디 있는가? 없다.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당신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의 아바 아버지로서 좋으신 분이시다. 주 예수의 영과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은 하나님의 善한 선물이시다(눅11,13).

그렇다. 주 성삼위 하나님()은 至高善(bonum sumum)이시다. 물론 이 세상에도 나름으로 좋은 것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주 성삼위 하나님을 우러러 받드는 한에서 선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날로 우리 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美>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仰望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27,4).

일생을 통하여 하고 싶은, 해야만 해야겠다고 믿는, 단 한 가지 일(one thing)이 다름 아닌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여호와의 전에서 앙망하며 사모하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다윗을 어찌 당신의 마음에 쏙 들어하시지 않으실 수 있었을까? 하여 그는 그가 구하지 않은 모든 것도 덤으로 선물 받았다.

마찬가지로 이제 바야흐로 사신 참 하나님이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일생을 통하여 해야 할 한 가지 일(one thing)은 萬世萬界의 왕으로서 영광 자체이신 분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앙망하고 사모하는 것임을 銘心 또 명심할 것이다.
<聖>
“웃시아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사6, 1-4).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말고 거룩한 神이 또 있는가? 바야흐로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 말고 거룩한 존재가 과연 있는가? 루돌프 오토(Rudolp Otto)는 聖(das Heilige)은 모든 종교들로 하여금 종교 되게 하는 特質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인류가 나름으로 찾고 찾는 참 聖은 사신 참 하나님이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이 아니시고 누구실까?

그렇다. 우리에게 自啓示되신 하나님은 主 聖三位 하나님()이시다. 이 사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聖別되어 두렵고 떨림으로 실존한다.

<義>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아바 아버지로서 永滅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려 당신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시사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영광(벧전5,10)에 들게 하시려 하실 만큼 무한히 의로우시다. 그러나 또한 이와 같은 지극하신 당신의 사랑의 의를 보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과 인내를 끝내 몰라라 하면 진노로 심판하실 만큼 거룩하게 공의로우시다.

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기만 해도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었다 :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 21.22). 이마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이마만큼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렇더라도 이제 주 예수의 이름을 믿어 구원 받아 놓았으니 마음대로(不法的으로) 살아 보자 하면 안 된다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범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 21-23).

두려운지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룰지로다(빌2,12).
<敬>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잠1,7). 그렇다. 사신 참 하나님 여호와, 바야흐로 사신 참 하나님 곧 주 성삼위 하나님()을 畏敬(Ehrfurcht)함이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

세상의 종교학에서도 어마어마한 신비(mysterium tremendum)를 말하는 마당에 알파와 오메가로서 사신 참 하나님이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삼가 敬畏함이 없다면 안 될 일이다.

여기에서 主祈禱文의 첫 간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임을 잘 이해하게 된다.

우리 주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과 사랑으로써 우리를 壓倒하신다. 그러므로 이와 같으신 하나님(聖心으로서 誠心)을 敬愛하지 않을 수 없다.
<愛>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16). 그러므로 영원부터 거룩한 사랑의 親交 가운데 聖三位一體神()으로 自存하신다.

바로 이와 같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부르신다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15,9).

하여 구원 받은 성도는 주의 이 사랑에 바야흐로 도취된다 : “예수님의 아름다움은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입니다. 그의 아름다움은 감탄과 탄복을 자아내기보다 사랑받아야 할 아름다움입니다. 그분은 기쁘고 아름다운 존재 그 이상입니다. 그분은 사랑스러운 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 이 귀한 말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되, 그 사랑은 주님의 내적인 탁월성, 즉 그분의 완전한 매력에 근거해서 나온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 예수님의 제자들이여, 주님의 입술을 보고 “그 입은 심히 달다”고 말하십시오. 주께서 그 입술로 여러분과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여러분의 가슴을 타오르게 하지 않습니까? 임마누엘되신 주님을 예배하는 성도 여러분, 정금으로 된 그 분의 머리를 올려다 보고 말해 보십시오. 그 머리 속에 있는 그의 생각들이 심히 소중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레바논 같고 백향목같이 아름다운 그 얼굴을 뵙고 겸손히 머리 숙일 때 주님을 사모하는 여러분의 마음이 사랑의 향기로 가득해지지 않습니까? 그의 이목구비 중 어느 한 군데라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습니까? 그 전체에서 이처럼 상쾌한 향내가 나니 모든 처녀들이 그를 사랑할 수밖에요. 그의 영광스러운 몸 가운데 매력적이지 않은 지체가 어디 한 군데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의 인품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 영혼을 끌어당기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의 직임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 가슴을 사로잡지 않는 직임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비단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에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주님의 능력의 팔에도 고정되어 있습니다. 주님에게 있는 어느 한 부분도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열렬한 사랑의 나드향을 주님께 부어 드립니다. 우리는 그의 전 생활을 모방하며 그분의 전 인품을 복사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 안에는 부족함이 있지만 주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주님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성도들 중 최고의 성도라 해도 그 옷이 얼룩져 있고 그 이마에는 주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스러움 그 자체십니다. 이 땅의 모든 태양이 흑점을 갖고 있으며 아무리 티없는 세상이라 해도 그 속에는 광야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랑스러운 것이라 해도 그 전체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불순물이 전혀 없는 순금이시요 어둠이 전혀 없는 빛이시며 구름 한 점 없는 영광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 전체가 사랑스러우신 분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도 예수 사랑으로 영생하시는 바처럼 이제 예수 사랑으로 구원 받은 우리도 예수사랑으로 영생하리라.

<誠>
<不誠無物>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제 이 말을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엡1,11) 곧 사신 주 하나님, 바야흐로 주 성삼위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아래 이해한다. 우리 주 하나님은 당신의 胸中에서 <이데아 界>를 여시고 이에 따라 <創造界>를 펼치시며 바야흐로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우리 인생에 이르러 <救贖史>를 전개하신다. 이 모든 것이 이제 <誠> 아닌 것이 없다.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의 모든 살으심과 말씀은 <誠>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 인생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nihil valeo).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誠>과 근원적으로 동떨어진 존재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다 이루었다[誠]>(요19,30)고 선언하실 수 있으신 분이다. 실패처럼 보이는 그 갈보리 십자가도 당신의 사명을 다 이루심인 것이다.

바로 이와 같으신 <誠心>이신 주 예수의 부르심에 응하여 포도나무 되신 주 예수님의 가지로 존재하며 생활하게 될 때 우리는 본시 우리하고는 아예 상관도 없었던 <誠>이 우리의 동경과 발돋음의 대상이 된다.

하여 중용의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가 우리 기독 신앙의 빛 안에서 그 빛을 발한다. 모든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 가운데 행하시는 주 하나님을 우러르며 그 계명과 뜻을 좇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참 사람다운 삶(誠之)을 살게 된다.

실로 알파와 오메가로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며 사시는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은 과연 <誠>이시다. 하여 우리의 실패를 통해서도 당신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심[誠]의 달인이시다.

<共>(together)
하나님은 사랑이시매 사랑하시는 자와 사랑 받으시는 자 그리고 두 사이 사랑으로 존재하신다. 사랑하시는 자(amans)는 그러니까 聖父시고 사랑 받으시는 자(amatus)는 聖子시며 두 사이 사랑(amor)은 聖靈이시다(어거스틴). 이렇게 사랑이신 우리 주 하나님은 영원토록 사랑의 共同體(예수사랑의 공동체)[神國/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로 永生하신다.

그러니까 우리 주 하나님은 獨居하시지 않으신다. 더불어 함께(together) 영원히 사신다. 이렇게 성삼위 자체 안만으로 당신의 더불으심을 제한하시지 않으시고 이제 우리에게까지 그 사랑의 관계를 여신다. 外延하신다.

이것이 바로 神國(영원한 예수사랑의 공동체) 운동이다. 聖敎會는 이 운동의 아방가르드이다.

타락한 인간 본성은 獨裁하는 가운데 이웃을 滅絶함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기적이고 폭군적이며 사탄적이다. 이웃을 容納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음과 저주와 사망만이 있다. 여기에서 홉스가 로마의 격언을 빌어 한 말의 슬픈 실제가 있다 : 萬人對萬人의 鬪爭(homo homini lupus).

이에 대하여 사랑의 우리 주 하나님은 共同體的이다. 이 놀라우시고 거룩하신 사랑의 神性을 주 예수()를, 하여 바야흐로 주 성삼위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배워야 한다. 닮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끝까지 不法(이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 法을 거부함)을 행하여 주의 일을 하노라 하면서도 隱匿的으로 혹은 顯示的으로 唯己敬愛를 획책할 때 그는 심지어 하늘나라도 들지 못하리라(마7,21-23) 하심을 명심하고 또 명심할 것이다.

<榮光>
萬世萬界를 企劃하시고 創造 保存 攝理하시는 수고에다가 심지어는 그 험한 갈보리 십자가를 지심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쏟으시는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께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마땅하고 마땅하게 모든 영광이 돌려질지어다(Soli Deo Gloria).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의 주 하나님은, 과연 우리의 주 성삼위 하나님()은, 하여 영광 자체시다. 보라 : <영광의 하나님>(행7,2)을, <영광의 주>(고전2.8)를, 그리고 <영광의 영>(벧전4,14)을.

놀랍고도 감사하게도 이와 같은 하나님 당신의 <영원한 영광>(벧전5,10)에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자비와 긍휼과 거룩한 사랑을 우리가 어찌 감사 讚揚 讚頌 讚美하지 않을 수 있을까.

<讚揚>(喜樂)
감사와 기쁨에 겨워 우리가 올리는 찬양 가운데 우리 주 하나님은, 바야흐로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은, 거룩히 거하신다(시22,3).

찬양은 우리의 가슴 벅찬 기쁨이요 이 가운데 우리 주 하나님은 우리의 이 찬양을 가슴 뜨거우시게 받으신다. 歆饗하신다.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리며 모든 것을 쏟아 기른 자녀들로부터 마음의 효도를 받는 어버이가 즐거워하고 기뻐하심과 같지 않을까.

바흐(J.S.Bach)의 예수 기쁨(Jesu Freude, Jesus bleibet meine Freude)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고결한 기쁨으로 차오르지 않는가. 헨델(G. F. Haendel)의 메시아와 할렐루야를 敬聽할 때 우리에게 거룩한 감동으로 물결치지 않는가.

<平和>(샬롬)
진정으로 영광과 欽崇과 그리고 우리의 至純한 사랑을 받을 만한 분이 계시고 이에 합당한 찬양을 무한히 기꺼운 마음으로 올리는 곳에 참 평화가 있다.

우리에게는 놀랍고도 감사하게도 이처럼 마땅하고 마땅하시게도 우리로부터 영광과 흠숭과 우리 존재의 모든 진액을 쏟는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聖三位 主 하나님()이 계시다. 바로 여기로부터 평화가 흘러넘친다.

모든 인류는 이처럼 성삼위 주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넘치는 평화를 알게 모르게 동경하고 사모해 온 것이다. 이를 알았으니 우리는 이제 이 福音을 만방에 전하고 또한 누리어야 할 것이다. 이 평화(샬롬)를 영원 무궁세 누리는 곳이 저 天國이다.
*
지금까지 우리는 고린도전서 8장 6절에 明示的으로 啓示되고 창세기 28장(야곱/이스라엘의 꿈)과 요한복음 15장(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 등에 계시적으로 또한 保證되는 神-存在論的 진리(theo-ontological truth) 곧 우리 主 聖三位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해왔다.

이 놀라운 계시 곧 <中天에 떠오른 진리의 해()>를 아직도 제대로 못 우러르는 일이 非一非再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아직도(진리의 해가 중천에 떠올랐음에도 불구하고) 無神論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리들 또한 混在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과 함께 <모든 사람이 믿을 만한 증거>(행17,31)를 간략히나마 다시 한번 언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公義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17,31). 바울은 스데반(바울은 당시 사울이라 불리운 청년으로서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있었다)이 죽어가면서 생생하게 증거하는데도 믿을 수 없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5.56). (스데반의 이러한 증거는 현장에 있었던 바리새인 바울(사울)의 머릿 속에 녹음기처럼 녹음이 되었었던 것이고 이를 후에 회심 후에 세계 전도 여행을 다니는 중 희랍인 의사로서 자기와 동행하였던 누가에게 증거를 하니, 누가는 스데반의 이 증거를 사도행전에 생생하게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생하게 스데반이 증거하는데도 바울은 이응 믿기지 않았다. 비록 인상적이긴 했어도 하늘에 하나님 아버지 말고 동격으로 그 우편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은 자기의 정통 유대인적 先入見으로는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다메섹에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는 途上에 정오에 햇빛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 나타나신 주 예수님의 復活하심 앞에 그는 꼬꾸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나사렛 예수님은 스데반이 증거하던대로 부활하시었던 것이고 하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않으신 영광의 주님(고전2,8)이셨던 것이다. 하여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주의 명령을 전하며 안수하니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나 다시 보게 된 바울은 일어나 즉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은 후 며칠 다메섹에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행9,20)을 증거하였다.
그렇다. 우리 주님은 죽은 사람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되신 분이신 것이다 :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그렇다면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는데 어떤 의미로 그리 말한 것일까? “저(주 예수)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9,5). 그러니까 보통내기 인생이거나 우리 가운데 좀 탁월한 피조 인생 정도가 아니라 <영광의 주>(고전2,8; 약2,1)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렇다. 聖經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은 비단 바울만이 아니다. 요한도 그리 증거한다 :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1,18).

이와 같이 독생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께서 흘리신 갈보리 십자가의 보혈은 바야흐로 “하나님의 피”인 것이다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28).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지마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피값도 탑승객들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월급에 따라 차등 지급된다. 실제로는 똑 같은 인생 사이인데도 차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본질상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무한히 넘어가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생물학적으로 돼지 피 정도가 결단코 아닌 것이다. 실로 주 예수님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하나님의 피>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리신 寶血[또는 聖血}의 功效는 무궁하다. 하여 이제 누구든지 진정으로 주 예수님을 믿어 그 代贖하심의 피 공로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 신앙의 삼대 신비 중 두번째의 것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기독 신앙의 첫번째 신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代贖하심을 위하여 죽으셨고 장사된지 사흘만에 다시 사시었음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復活 昇天하시어 지금은 아버지[聖父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우리 주 예수(골3,1)[聖子 하나님]께서 성령[聖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부르시매 이 부르심에 응하여 예수-포도나무의 가지로 실존하기 시작할 때 우리에게는 永生의 구원이 주어진다. 이리하여 우리는 바야흐로 성삼위 하나님()이라는 기독 신앙의 세번째 신비에 이르게 되었다.

실로 참으로 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세주>() 되심을 믿고, 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늘도 성삼위 하나님()이 同役하심을 믿는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 모두가, 바야흐로 성삼위 주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이심을 믿는다.

이렇게 만인이 믿을 수 있게 하늘로부터 주어진 증거를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야흐로 믿는 주 성삼위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學生이 되어 배워야 할 배움이 있다면 마침내 배워 영생에 이르를 큰 배움[大學] 자체이시다.

그렇다. 우리 인생들이 배워 마침내 永生에 이를 큰 배움[大學]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이시다.

그리하여 이 글의 題目을 <大學()習>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習>은 무엇인가? 우선 말 뜻을 보기 위해 解字를 보자. 羽는 ‘깃 우’다. 곧 깃털을 말한다. 白은 ‘흰 백’이다. 여기에서 <習>은 깃털이 아직 영글지 않고 흰 새끼 새의 비상에로의 퍼득임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練習할 때의 習이라는 뜻이 나왔다.

여기에서 <大學()習>이라 함은 알파와 오메가 되심으로 우리의 큰 배움[大學]이 되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을 앎과 恭敬하고 親愛함에 우리는 두렵고 떠는 자세[習]를 堅持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한다.

보라 :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과 나중이니”(계1,17). 이 말의 著者인 사도 요한은 누구인가? 우리 주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을 때 주 예수님의 가슴팍에 머리를 대고 누울 수 있었던 주 예수님의 愛弟子가 아니셨던가. 그처럼 주 예수님을 익숙히 알 뿐만 아니라 親愛의 情으로 親交하던 애제자 요한이었건만,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뵈게 되었을 때, 영광의 주님께 압도되어 기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익숙하게 아는 가운데 親交하고 있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거나 쉽게 접근할 수가 있으신 분이 아님을 이 장면에서 우리는 확인한다.

그러니까 聖經에 自啓示되심으로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 <中天에 떠오른 진리의 해()> 되신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이라 해서 우리가 마냥 輕薄하고 손쉽게 대할 분이 아니심을 알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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