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5일 기독교학술원 월례발표회 개회사
1970년 윤성범은 한국적 신학으로서 성(誠)의 신학을 제안하였다. 그에 의하면 계시라는 개념은 낯선 개념이나 성(誠)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친근한 개념이다. 성(誠)의 개념은 유교에서 온 것으로 만물을 존재케 하는 존재근거이다. 성(誠)은 천지도(天之道)이며 인지도(人之道)의 가능근거다. 이 성(誠)은 천지에 다 통하는 보편성을 지닌다. 화랑도 정신이나 율곡사상이나 충무공 정신에 성(誠)의 사상이 있다. 성(誠)은 말씀(言)과 이루어짐(成)이며, 존재론적으로는 로고스요 중용(中庸)이며 윤리적으로는 지(智)인(仁)용(勇)의 3대 덕(德)이다. 성(誠)이 하나님이요, 계시이며, 성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
1971년 박봉배는 성(誠)의 해석학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성(誠)이란 만물을 존재케 하는 원리이다 이러한 성(誠) 개념은 창조하시는 인격적인 말씀과는 거리가 멀다. 성(誠)이란 “말이 이루어진다”는 해석은 “말씀이 육신을 입었다”는 성육신의 교리와는 거리가 멀다. 유교에서 말하는 하늘의 도는 초월적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가 자연 속에 내재하는 원리로서 계시된 말씀과 동일시될 수 없다. 윤성범의 토착화론은 바르트신학의 계시절대성과 한국적 전통을 결합시키는 혼합주의의 위험성을 갖는다. 동서양의 많은 사상과 진리에 성을 개입시켜 논술하고 있으며, 때로는 성이 진리로, 때로는 원리로, 때로는 인간성의 숭고미로, 때로의 하나님의 속성으로,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 자체로 둔갑하는 것이 그의 한국적 신학의 기본구조, 즉 성신학의 구조다.
박봉배는 이러한 성의 해석학은 성(誠)을 계시로 대치하는 혼합주의라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토착화의 신학적 체계를 바로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박봉배는 성(誠)이란 복음으로 그 내용이 변혁되어야하는 변혁적 문화신학을 제시한다. 토착화의 비유란 종자와 토양의 비유나 접목의 비유로 이해되기 보다는, 누룩의 비유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최병헌의 변혁적 문회신학의 전통에 서 있다.
안봉호의 성경(誠敬)신학은 이러한 변혁적 문화신학의 전통에 있다. 안봉호는 성경신학의 근거를 성경에 근거지우고 있다. 그는 <誠敬神>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에서 출발한다. 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계시의 말씀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사색은 성경에 의존하는 사색이다. 하나님은 세계를 당신의 거룩한 뜻[誠]으로 다스리시는[敬] 하나님[神]이시다. <誠敬神>의 <神-存在力動-構造>와 <神-存在力動-歷史>를 구별한다. 우리 주 성삼위 하나님이신 <誠敬神>은 存在的으로 영원부터 영원까지 <誠敬神>이심과 동시에 力動的으로 영원부터 영원까지
↑神↓
↑敬↓
↑誠↓
의 삶을 사시고 있다. 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참되고 영원한 삶[誠心()敬愛]이라고 제시한다. 하나님의 말씀 聖經을 읽어 날마다 순간마다 주의 뜻[誠]을 받들어 섬기면서[敬]. <성심() 기도>하는 가운데 <성심() 찬양 찬송 찬미>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안봉호의 한국적 신학의 독특성은
첫째, 성경(誠敬)신학을 성경(聖經)신학으로 전개하고자 함으로써 계시된 66권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그 위에서 동양적 언어를 사용하되 그 의미를 성경 해석학적으로 변혁시키고자 한다.
둘째, 전통 기독교의 사도적 종교개혁적 전통에 서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의 토착화신학은 성경 해석학이다.
세째, 유교문화에 친숙한 지성인들에게 한자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변혁적으로 사용하면서 기독교 하나님을 증거하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그는 윤성범이 시도한 혼합주의적 토착화 신학이 아니라 정통적 토착화신학을 전개하고자 한다.
네째, 그는 이러한 그의 신학을 해박한 신학사적 지식을 동원하여 설명해나가고 있다. 그리하여 한자의 의미를 아는 유교문화권의 지성인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과 전통적 이단사상을 비판하면서 성경신(誠敬神)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거하고자 한다.
성경신(誠敬神) 토착화 신학의 해결해야 할 과제란 다음 3가지로 제시될 수 있다.
첫째, 성경신(誠敬神)신학이 과연 전통적 기독교 교리를 유교적 개념의 왜곡 없이 다 해석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교적 개념의 신학적 풀이에 집중함으로써 개념에 대한 사변적 유희라는 비난을 피해야한다.
둘째, 성경(誠敬神) 개념은 유교적 개념인데 이것이 어떻게 성경(聖經)적 계시개념이 될 수 있는가를 해명해야 한다.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이 어떻게 혼합되지 않고 조화될 수 있는가이다.
“자연 가운데 숨기어 있는 신령한 진리는 복음적 신학적 진리의 脚註(footnote)다.” 라는 명제에 대한 보다 자세한 개혁주의적 설명이 요망된다.
세째, 성경(誠敬神) 개념으로 과연 십자가 대속의 사건을 내면적 체계 안에서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라너의 보편구속사신학이 지니는 포괄적 구원론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이다.
자료제공: 기독교학술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