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윤응진 교수의 기독교 교육 아카이브<바로가기 클릭>
9·11 테러는 미국주도의 세계화 프로그램이 초래한 억압과 불평등의 산물이었다. 미국은 테러를 초래한 '구조적 폭력'의 해체를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대테러 전쟁'을 통해 미국 스타일의 '제국주의'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폭력에 의해 평화를 지키려던 로마 제국의 몰락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테러' 근절을 구실로 제국주의적 패권확장에 나섬으로써 숱한 인명을 살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위협으로 느껴지는 것은 다름아니라 미국에 의한 '국가 테러리즘'의 횡포이다. 더구나 미국이 자행하고 있는 국가 테러리즘이 '기독교' 신앙으로 정당화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부시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른 바 '기독교' 신앙인이라는 것은 결코 희망의 근거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재앙이 될 위험이 높다. 왜냐하면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추종한 세력도 다름 아니라 극우 기독교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비판 능력이 결여된 신앙인처럼 위험한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테러 시대에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사적인 영역에서만 '신앙'인으로 머물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적 현실에 대한 바른 통찰력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든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에 설득 당할 위험에 직면하여 있다. 특히 부시 행정부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기독교 신앙'의 언어로 포장되어 있으므로, 기독교적 실존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 이미 한국의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부시의 전쟁놀음을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것으로 설교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왜곡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어떤' 기독교 신앙을 지닐 것인가에 집중되어야 한다. 우익 혹은 극우 보수세력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미국식 근본주의 신앙을 지닐 것인가? 유대 청년 예수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던 히브리 신앙전승을 계승한 초대교회가 지녔던 본래의 기독교 신앙을 지닐 것인가?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교육은 스스로가 신앙인이라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신앙 노선을 재점검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서구적 왜곡, 특히 미국적 왜곡을 극복하고 평화지향적인 성서적 신앙 노선으로 급격한 방향전환이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제국주의의 폭력에 의하여 희생당한 억눌린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말씀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는 지배자들의 폭력, 더구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없다. 테러 행위나 '테러와의 전쟁'은 결코 출애굽의 하나님 '야훼'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성서가 지향하는 것은 정의와 평화가 수립된 '하나님의 나라'라는 유토피아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이웃사랑'을 통해 모든 형태의 폭력을 극복하도록 가르친다. '이웃사랑'은 '원수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 메시지의 핵심 내용을 오늘의 정치적 현실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만이 성서적 의미의 '신앙인'인 것이다. 테러 시대의 기독교교육은 피교육자들이 바로 이러한 의미의 '신앙인'으로 성숙하도록 도와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어떻게 성서의 평화주의 노선과 다르게 지배자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폭력을 조장하였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함으로써, 기독교교육은 피교육자들이 기독교의 왜곡 현상을 극복하고 성서적 전승에 연대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고난은 당대의 로마 제국주의가 만들어 낸 '구조적 폭력'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의 형태이다. 기독교교육은 바로 이러한 '예수의 길'을 걸어가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들'을 양성해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 형제들과 연대하여 미국의 제국주의 노선에 저항할 때에만, 제2의 '9·11 테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