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조상(祖上)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約束)으로 주신 그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마치 이방인처럼 "거류민(居留民)"으로만 살았다라고 우리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천막"에서 함께 살았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신앙적 결단을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가 그의 신학에 따라 해석한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구약성서에 대한 신약성서 기자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 나타난 공통된 주장은, 약속의 땅에 정착하여 살면서도, 아브라함은 어디까지나 거류민(居留民), 즉 떠돌이 이방인(異邦人)으로서만 살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아브라함의 소명(召命) 사건에 대한 지금까지의 전통적 해석과는 매우 다른 새로운 관점을 반영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전통적 해석은 아브라함이 받은 소명(召命)과 그러한 결단이 갖는 위대한 신앙적 모습을 해석할 때 일반적으로 그러한 신앙적 결단의 의미를 주로 그의 <순종(順從)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여 왔었습니다.
우리의 본문도 그 서두에서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복종>하고 땅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버리고 떠나갔다는 그 점을 맨 먼저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과 그 평가는 오히려 그의 "순종 행위" 보다는 그의 "거류민으로서의 삶"에 더 강조점을 두고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가야할 목적지로 나아갈 때 어떻게 가야 할지도 잘 모르는 상황이면서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께서 장차 지시할 그 땅을 향하여서만 나아간 대단한 "순종의 믿음"도 갖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이미 그 목적지에 도착하여 정착(定着)해서 살고 있으면서도 즉, 정착민(定着民)이면서도, 말하자면, 자기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결코 자기의 기득권에 연련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실로, 이 증언을 더욱 보완하는 말이 다음 구절들에서 계속 반복해서 첨가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증언이 우리 본문의 중심주제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도록 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예컨데, 아브라함이 실제로는 그의 아들 이삭과 한 장막 안에서 산 적은 있어도 그의 손자 야곱과는 결코 한 장막 안에서 산 적이 없었는데도 우리의 본문은 이삭과 야곱 모두와 함께 한 장막 안에서 살았다고 강조해서 주장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약속의 땅>, 즉 아브라함이 약속받아 얻은 그 아브라함 소유의 이 약속의 땅이, 사실은, 아브라함의 것 만이 아니라 그의 대표적 후손인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함께 공유(共有)하며 살아야 할 땅이라는 것과, 그리고 아브라함도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동시에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기득권을 향유(享有)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마치 조카 롯에게, 땅 분쟁의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 속에서도, 과감하게
네가 좌(左)하면 나는 우(右)하고
네가 우(右)하면 나는 좌(左)하리라(창 13:9)
라고 말하면서 기득권을 조카에게 기꺼이 양보하였듯이, 여기서도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서 누릴 영광에 대한 기득권을 결코 독점하려 하지 않고 그의 아들 이삭은 물론이고 장차 태어날 야곱과 더불어서도(!) 그것을 함께 나누어 공유하는 것을 기뻐하였던 자였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그의 믿음의 위대성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또한 "장막"에서 살았다는 것, 즉 "천막"( / )에서 살았다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특별히 강조하였습니다. "천막"이라는 것은 본래 이동하는 유목민과 유랑하는 유랑민의 거주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천막"은 기초를 구축하지 않습니다. "천막"은 기득권을 누리는 장소가 아닙니다. 원활한 이동, 기동성있는 이동, 그러므로 새로운 곳을 향하여 신속히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된 동작을 전제한 거주지가 천막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헤브론 지역에 정착하고 살았던 조상이라는 창세기의 주장과는 그 강조점이 매우 다른 주장과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 히브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천막생활도 한 것으로는 되어 있습니다만 이삭이나 야곱, 특히 야곱과 비교한다면, 아브라함은 그의 일생의 거의 전부를 헤브론에서 보냈고 그리고 아내 사라와 자기 자신을 묻은 곳도 헤브론이었으며 심지어는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는 그 헤브론 지경을 모두 매입하여 법적 지주권(地主權)을 획득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먼 후대의 성서기자인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장막(천막)에서 살았다"는 것을 특히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생애가 결단코 기득권을 주장하고 그것을 향유하는 생(生)은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의 믿음의 일생을 평가한 중심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믿음의 위대성(偉大性)은, 그러므로, 그가 약속으로 받은 땅에서지만 거류민(居留民)으로, 이방인(異邦人)으로, 그리고 나그네( / )로 살았다는 데서 평가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에게는 자기 땅에 대한 소유권과 기득권을 주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이상(理想)을 이 나그네된 땅에 구현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을 가리켜서 「개척자」「개척자적 순례자」「진정한 의미의 크리스챤 엘리뜨」「소명(召命)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김재준 목사님의 생애에서 바로 이러한 아브라함의 생애, 특히 히브리서 기자가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그린 그 아브라함의 생애가 그대로 재연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장공(長空) 선생님은 결코 짧은 자기 인생 거기에 연련하시거나 자기 기득권에 안주하시거나 하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줄기 차게 한국 신학의 미래와 한국교회 및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한 삶만을 추구하신 분이셨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순례자의 삶, 즉 약속의 땅에서이지만 줄기 차게 거류민(居留民)으러서의 삶을 고집하며 사신 분이셨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소천(召天)하시기 전날, 한양대학 병원을 문병간 저에게 침상(寢牀)에서 누우신체로, 그러나, 조금도 자세를 흩어뜨리시지 않으신 모습으로 직접 제 손을 잡으시고 "학교를 잘 부탁한다"는 말씀을 유언(遺言)을 남기시듯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 가슴에 와 닿은 느낌은 "아, 우리 장공 선생님은 한신의 미래 만을 가슴에 늘 담고 계신 분이셨구나"하는 느낌과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장공(長空) 선생님의 이 염원이 우리 후학들의 가슴 가슴 깊은 곳에 깊이 깊이 각인(刻印)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기도와 기원과 희망이 유가족(遺家族)들의 가슴 속에 큰 격려와 위로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히브리어는 깨져서 나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