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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식] 아카시아꽃 잔상

길위의 신학


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아카시아.

이 네 음절의 외래어에 상큼한 냄새가 환후처럼 진동한다. 오랫동안 망각의 창고에서 잠든 전설이 소스라치며 깨어나듯, 아카시아라는 말의 기억은 바위 속 깊이 박힌 금맥을 찾아낸 광부의 반가움처럼 내 둔탁한 의식의 밑자리를 두드린다. 계절의 여왕 5월의 초순부터 장미꽃에 앞서 피어 그 진한 향기를 토해내다가 이내 스러져 땅바닥에 메마른 잔해를 수북히 쌓아놓는 그 꽃의 운명은 오늘 내가 마주친 또 하나의 벼랑이었다.

별스런 사건이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일상의 행보란 늘 어긋남의 연속인 터라 예기치 않게 길 위에서 마주치는 그저 그런 물상과 풍경들 가운데 때로 낯설게 의식의 끈을 물고 늘어지는 질긴 놈이 있는 모양이다. 아내와 오랜만에 저물녘 뒷동산에 들어 오솔길을 걸었다. 길바닥에 허옇게 깔린 메마른 꽃잎들은 아카시아가 가장 향기로운 한 시절을 보낸 뒤의 배설물이었다.

아직도 그 낙화한 꽃잎들의 주변에서는 채 가시지 않은 이 상큼한 향기가 가물거리고 있었다. 며칠 전 어머님이 아카시아꽃을 따서 차를 만들었는데 마시지 않겠냐며 물으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이 세속의 땅바닥 위를 빡빡 기면서 분요한 일상의 가시채를 뒷발질하고 있는 동안 지난주쯤 절정에 다다랐을 이 향기로운 꽃향기의 만찬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참 아쉬운 생략이고 망각이다.

아카시아꽃의 그 상큼한 향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부활하는 잔상의 기억은 어릴 적 뒷동산에 올라 키 작은 이 나무의 가시들 틈새로 잘 익은 꽃송이를 따서 정신없이 먹으며 허기를 달래던 아득한 5월의 나날들이다. 얼마나 다정하고 진한 맛이었는지 동무들은 환한 웃음을 흘리며 정신없이 이 꽃들을 채집하여 게걸스럽게 먹곤 하였다. 나란히 잎사귀 달린 가지를 꺾어 가위 바위 보로 손가락을 튕겨 잎사귀를 하나씩 따내던 놀이는 무료하던 오후의 심심풀이로 제격이었다. 연한 가지를 꺾어 꽃을 따먹다가 지치면 그것들을 풀섶의 움푹 패인 곳에 걸쳐 엮어 아무도 찾지 못할 우리만의 아지트를 만들기도 했다. 그 안에 숨죽이며 몰래 숨어 아무도 모르라고 저만의 공간의 창조에 쾌재를 부르던 발랄한 동심은 얼마나 신명나는 비밀이었던가.

이후 한 세월이 흘러 내 몸이 고향의 동산에서 멀어질 무렵, 이 천진한 아카시아의 놀이는 가끔 아카시아껌을 씹을 때 되살아나곤 했다. 비록 인공의 향료를 넣어 만든 향기였지만, 그 껌을 씹을 때마다 마치 첫사랑의 순정을 대하는 듯한 경건한 마음으로 제법 울렁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껌은 씹을수록 플라스틱의 감촉처럼 딱딱해지고 그 강도에 비례하여 향기는 찜찜한 뒷맛을 남겼다. 아카시아 향기를 껌 속에 담고자 한 그 익명의 창시자가 지닌 뛰어난  예지에도 불구하고 껌은 결국 껌일 뿐이었다. 껌 속의 아카시아는 천연의 아카시아를 대체하기에 부적절한 인공의 감미료로 잃어버린 시절의 향취를 감질나게 할망정, 당연히 자연스런 재생은 불가능하였던 게다.

아카시아껌의 인기가 시들해질 정도로 또 한 토막의 세월이 숙진 뒤로, 5월의 아카시아는 철마다 피어 옛적의 향기를 토하며 순환하는 자연의 은총을 반복, 재생한다. 그러나 내가 그 향기와 맛을 접한 원초적 감각을 멀리 떠나버린 탓인지 동심과의 그 소외된 거리로 인해 지척의 그 기특한 몸부림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한두 차례 그 꽃의 첫 향기와 맛을 갈구하며 꽃을 따서 씹어본 적도 있었다. 내 불안한 예상대로 그 맛과 기묘한 향취는 내 오염된 혓바닥에 찜찜한 여운으로 응답했다. 

그래도 멀리서 상상하며 가까이서 5월의 아카시아를 마주하는 반가움은 깊다. 예수를 꽃에 빗대어 노래한 찬양 가운데 ‘샤론의 꽃 예수...’로 시작하는 가사가 있고, 예수 자신은 산상수훈에서 들에 핀 백합화 ‘아네모네’에 감탄한 바 있지만, 내 체감의 반경 내에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듬뿍 드러낸 그 꽃들도 아카시아꽃에 비견될 만한 것은 못되지 싶다.

장미처럼 아카시아도 그 꽃송이의 틈새로 날카로운 가시를 숨겨두고 있지만, 장미와 달리 아카시아는 그 꽃의 향기와 빛깔로 우리를 음탕하게 유혹하지 않는다. 아카시아는 그렇게 화장한 미녀처럼 고혹적이지도 않고 관능의 입술처럼 날카롭지도 않다. 다만 이 수더분한 꽃은 풍성한 송이송이로 매달려 마치 쌀밥의 성육신처럼 굶주린 뱃속을 달래주며, 그 상큼한 향내로 피로한 삶의 무게에 지친 이들의 심장을 청량하게 정화시켜준다.

그 생기가 다하면, 십자가상의 예수가 ‘다 이루었다’라는 한 마디로 자신의 짐을 모두 내려놓듯, 허옇게 나무 그늘 아래 수북하게 쌓여 사심 없는 절명의 포즈를 빚어낸다. ‘하아얀’ 그 꽃송이들의 발랄한 공동체의 춤사위가 ‘허어연’ 개체로 메마른 몸을 드러내는 자리에서 나는 곱게 늙어 담백하게 죽을 줄 아는 생명의 겸허를 발견한다. 혹자가 말한 ‘적멸의 즐거움’이 빛나는 자리다. 나도 내 생의 윤기가 다할 무렵 그렇게 허옇게 바스라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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