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이 올해로 93주년을 맞는다. 3·1독립만세운동은 한국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만 천하에 천명한 사건이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요청했던 자주적 행위의 적극적 발산이었다.
3·1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는 기독교가 있었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인, 천도교가 15인, 불교인이 2인이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개성, 안주, 정주, 선천, 의주 등 제1차 만세 시위처가 된 곳도 교회와 기독교 학교들이었다.
그리고 교회가 파손되거나 소실된 것이 3월부터 5월 30일까지에 47개소나 된 것에서도, 한국교회가 독립만세의 중심이었다는 반증이 된다.
그런가 하면, 6월 30일까지의 투옥자 9,458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2,087명이었고, 12월 말까지 복역자 19,525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3,373명을 차지해 전체의 20% 가량이 기독교이었다. 당시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 중 1.5%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기독교인의 3·1독립만세 운동량은 주동 세력 면에서 최고 38%를 차지하고 있고, 체포·투옥 면에서는 최대 22%를 차지할 정도였다.
실로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 치하 평화적 시위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으며, 교회가 앞장서서 일으킨 것으로, 민족주의를 초월하여 보편적 가치관과 인류공영을 지향하는 비폭력적 평화운동이었음에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이 운동은 단순히 우리나라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억압받던 아시아 지역의 억압받던 피지배국가에게 희망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은 복음이 전파된 지 불과 30여년밖에 안 된 상황에서 기독교가 민족과 함께하고, 자주 독립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친 자랑스러운 역사의 쾌거였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3·1독립만세운동이 보여준, 민족을 구하고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며, 평화정신을 계승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
2012년 2월 29일
한국교회언론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