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충범의 길에서][14][세 사람의 전주사람]

이충범·협성대 신학과 교수

다시 정읍으로 돌아온 시간은 이미 늦은 오후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터미널 주변에서 늦은 점심을 때우고 전주행 버스를 탔다. 버스가 출발하여 시내구간을 벗어나자 스피커에서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왔다.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이충범 협성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한 사내가 형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는 귀향하기 전 아내에게 아직도 날 원한다면 마을 입구 떡갈나무에 노랑리본을 달아 놓아 달라고 용서를 비는 편지를 보낸다. 마을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차마 떡갈나무를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운전기사와 승객들에게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자신을 대신하여 창밖의 떡갈나무를 봐 달라고 부탁한다. 이윽고 버스가 고향마을로 다가서자 갑자기 승객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왜냐하면 한 개가 아닌 떡갈나무 가득 노랑리본이 묶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눈물로 승객들에게 인사하며 버스에서 내려 힘차게 집으로 향한다. 이 노래의 사연을 잘 알고 있던 나는 이 노래가 흘러나오자 집에 가고 싶은 충동이 울컥 솟구쳤다. 비록 용서를 빌 것도 없고, 아파트 베란다 국기봉의 노랑리본을 기대해야만 하는 이유도 없지만 ‘집으로’라는 귀향본능이 자극되었다고나 할까? 그래도 꿀꺽 침을 삼키고 귀향충동을 눌러가면서 전주 터미널에 내렸다.

내가 평생 전주라는 도시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는 착함, 인심, 양반, 선비, 모범 같은 매우 긍정적인 것들이었다. 사실 내가 갖고 있는 이 이미지는 살면서 만난 세 사람에 의하여 형성된 것인데 그들은 C, J, S 이다. 도망치듯 간 군대 훈련소에서 나는 운 좋게 식기조에 걸렸다. 훈련 도중 빠져나와서 식사를 준비하는 것만도 행운인데 배고픈 훈련소에서 내 맘대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그야말로 하이바 자리였다. 게다가 식사 마무리가 끝나면 내무반에 갈 때까지 식당 뒤에 앉아서 잡담을 할 여유까지 있었다. 그때 같이 식사를 준비하던 동기생 중에 나와 동갑인 전주출신 C란 친구가 있었다. 덩치가 산만한 C는 생긴 것도 우락부락했다. 그런데 평발이었던 그는 외모답지 않게 구보를 할 때마다 뒤뚱거리며 비지땀을 흘리는 모습이 정말 우스웠다. 그리고 그 모습 때문에 늘 놀림감이었다. 내가 놀라웠던 것은 동기생들이 아무리 놀려도 그냥 허허 웃고 마는 덩치 크고 부리부리 생긴 C의 비단결 같은 마음이었다.

남을 놀리지도, 욕하지도, 말을 많이 하지도 않는 공통점을 가졌던 그와 내가 시간만 나면 함께 대화를 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와 나의 대화의 끝은 늘 한결같았다. “첫 휴가가믄 나가 니 데불고 전주갈랑게 함께 가자잉?” 나는 C를 우리 집에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타인의 숙식을 해결해주는 것이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서울깍쟁이인 나와 달리 C는 늘 나를 데리고 전주를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막걸리 한 주전자 시키면 안주 20가지 준다는 전주 인심을 늘 자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C를 정말 존경(?)할 만한 일이 생겼다. 20여명의 식기조 중에 가장 주먹이 세고 큰소리를 뻥뻥치던 자칭 조폭출신 동기생을 그 착한 C가 주먹도 아닌 박치기 한방에 날려버린 사건이었다. 나는 싸움을 할 때 주먹이나 발보다 머리가 먼저 나가는 것을 처음 본 데다 그 박치기 한 방에 나가떨어져서 정신을 잃는 것도 처음 봤다. 군사훈련이 끝나는 수료식 직후 나는 그 자리에서 자대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어 C와 영영 소식이 끊겼지만 그로 인해 내게 생긴 전주 이미지는 착하고 인심 좋은 사람들의 고장이었다.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의 졸병이었던 송병장에게 전화가 왔다. “이병장님, 나오시라니까요, 아, 글쎄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공을 들여놨는지 아십니까?” 사연은 이랬다. 군에 있을 때 사고(?)를 쳐서 제대 후 바로 장가를 갔던 송은 복학 후 나를 위하여 착하고 예쁜 후배 하나를 대령(?)시켜 놨다고 한사코 내게 나오라는 것이다. 당시 나는 제법 위엄 있는 복학생 폼을 잡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나보다 어린 여학생들은 왠지 여성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번 거절을 했는데도 송은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송의 손에 이끌려 소위 소개팅이란 것을 해봤는데 얼굴이 하얗고 까만 뿔테 안경을 낀 여학생 하나가 나와 있었다. 호구조사를 하다 보니 이 여학생은 전주에서 온 지방유학생이었다. 그때부터 두어 달 만났던 J라는 이 친구는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모범생이었다.

일류대학 최고의 학과를 다니던 J는 그야말로 일주일 내내 도서관에서 살았다. 그리고 틈이 나면 고등학생들 수학 과외지도를 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하숙집 아주머니 눈치 봐가며 전화를 해도 통화하기가 힘들었다. 어쩌다 통화가 돼서 만나게 되면 늘 도서관이었다. 숙제와 공부를 마칠 때까지 내가 할 일은 옆에 앉아서 무협지를 펴놓고 졸거나 J의 친구들 심부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숙제가 끝나면 과외지도를 하는 집까지 같이 가거나 과외 끝나면 하숙집에 데려다 주는 게 데이트의 전부일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녀는 말도 별로 없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냥 미소 짓는 게 전부였다. 아마 말이 없어서 송이 착한 후배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여자들이 말없이 조용히만 있으면 다 착한 줄 아는 게 남자들 아닌가? 내 이름을 부르는 적도, 하다못해 오빠라고 하는 적도 없었다. 그리고 매사에 불편하도록 깍듯했다. 그래서 나는 이 친구가 내가 싫어서 이러는 것이라고 여기고 서서히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군대후배로부터 J가 고학으로 서울 유학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학비와 하숙비를 벌기 위하여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를 놓칠 수가 없어서 그랬다고 들었다. 그러면서 다시 연락을 기다리니 연락할 것을 권했지만 이미 한참을 지난 후였다. 철딱서니 없는 내가 어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미안하기만 하다. 여하튼 그때 나는 “저런 종류도 다 있구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모범생 중에 모범생이었고 양반 중에 양반이었다. 아버님이 늘 전주사람들은 다 양반이고 선비들이라고 하신 말씀과 딱 맞아떨어지는 그녀는 내게 전주사람들은 다 모범생이고 예의바른 양반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S는 요즘도 만나는 나의 대학동창이다. 나는 이제까지 그가 화를 내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니 화를 내기는커녕 남의 욕이나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도 듣지 못했다. 그가 하는 말은 그저, “응, 기야(맞어)” “그쟈, 응(내말 맞지?)” 정도이다. 언제나 조금 부실하게 웃는 그의 별명은 띵이었다. 그의 성이 홍씨라서 우리는 늘 그를 홍띵이라 불렀다. 친구들끼리 모여 있을 때면 매번 어딘가 모르게 어설픈 행동과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는 농담으로 늘 “에고 저 띵~”하는 핀잔을 들었다. 물론 그는 이러한 우리들의 놀림에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삐져 본 적이 없다. 그러던 그가 친구들 중 제일 먼저 대기업에 취직을 하였다. 왜냐하면 오직 그 혼자만 현역이 아닌 방위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첫 월급날이 되자 친구들은 학교 앞 술집에서 술을 퍼마시면서 그의 직장에 전화를 걸어 술을 사라고 닦달했다. 그래서 친구들의 술값을 내주기 위해 퇴근 후 우리들에게 도착한 그의 첫 마디는, “어떤 자식이 우리 회사에 내 별명 알려줬어?”하는 외침이었다. 순간 의아해 하던 친구들이 한 순간 다 함께 폭소를 터뜨렸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그의 회사에 별명을 알려주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냥 회사생활 단 1개월 만에 그는 회사에서도 홍띵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 회사에 중진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 순진하고 착한 S는 명문 전주고를 나온 전주 토박이였고 그는 나에게 전주사람은 역시 순박하고 착하다는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하였다. 

전주에 내리자마자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면서 관광안내책자를 찾았다. 그러나 다들 한결같이 “그런 거 없는데요?”라며 심드렁하게 대꾸하였다. 아니, 광주 터미널에서도, 정읍 터미널에서도, 심지어 버스표를 끊어주는 창구직원에게서도 관광안내지도와 책자를 얻었는데 여기만 없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관광안내소를 물었다. 여기 물으면 저기 가보라고 하고 저기 가서 물으면 또 여기로 가라고 한다. 결국 나는 전주의 관광안내도를 얻지 못하고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그러면서도 막차 시간을 흘낏 봤다. 터미널 입구에선 몇몇 남자들이 담배를 퍽퍽 피워대더니 내게 다가와서 “서울 안 가십니까? 제일 빠르게 모십니다”라며 호객행위를 한다. 전주에서 서울까지 총알택시가 다닌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전주 여행을 위해 지도가 급하여 PC방을 찾았는데 그곳 주인은 이번 여행에서 최악의 불친절 및 엽기였다. 게다가 인터넷에서는 내가 원하는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PC방 건물에서 내려와 길에 서서 나는 “도대체 전주에 C와 J와 S는 어디 있는 것인가? 하며 허탈해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던 전주에 대한 이미지가 단 한 시간 안에 확 깨져버릴 것 같이 사람들의 인심이 고약하게 느껴졌다. 생전 처음 와보는 전주, 나는 어디로 갈지 몰라 길에 우뚝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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