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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니의 세상 읽기] 겨울을 즐기고 싶다!

▲김숙경 기독여민회 총무.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겨울에 태어나기도 했고, 겨울의 맵싸한 공기와 알싸한 바람 탓에 모두들 집으로 들어가 한산해진 거리를 쏘다니는 기분이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눈이라도 내릴라치면 온세상을 다 가진듯 풍성한 기분으로 걷고 또 걷는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나이가 드면서 점점 겨울에 움츠러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올해 다가올 겨울은 종내 걱정스럽다 못해 재앙같기만 하다. 곧 있으면 농성 1,400일을 맞이하는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이 텐트 하나 없이 길바닥에서 오롯이 겨울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는 12월 21일이면 재능교육 학습지 노조가 거리투쟁을 시작한지 꽉 찬 4년이 된다. 햇수로는 5년이다. 사람의 나이로 만 4살이면 불안한 신생아기를 지나 비교적 안정적인 유년기로 접어드는 시기인데,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도 거리에서 4년을 꼬박 보내면서 더 깊어지고 성숙해졌다. 

내가 처음으로 그들을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고개도 들지 못할 만큼  낮고 좁은 텐트에서는 옹색함이 느껴졌고, 얼굴에는 오랜 투쟁 끝에 오는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그들은 사측의 악질적인 탄압에 지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시민들의 냉대와 무관심에 더 지쳐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내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그 울림은 고스란히 기독여민회에 전달되어, 기여민 회원들은 기도와 모금으로써 그들과 함께 했다. 기여민의 존재 이유, 바로 여성민중들을 위하여. 

오랜 투쟁 동안 재능교육 해고노조원들은 단식을 하기도 하고 삭발도 감행하면서 무관심한 시민사회에 절규어린 소리를 내뱉었다. 그 소리에 응답하고자 나온 것이 '재능교육 사태 해결을 위한 기독교 대책위원회'(위원장 조헌정 목사, 집행위원장 김숙경)였다. 올 4월 서울 도심 두 곳에서의 1인시위를 시작으로 대책위 활동을 시작했다. 대책위에는 내가 속한 기여민,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 한국교회인권센터, 영등포산업선교회, 예수살기, 향린교회가 함께하고 있다. 영등포역에서의 1인시위에 기여민의 많은 회원들이 부러 시간을 내서 참석했다. 대책위에 참여한 단체들은 돌아가며 매주 목요일 늦은 7시 30분 촛불을 들고 혜화동 본사와 시청농성장, 타워팰리스(재능교육 박성훈 회장의 집)를 찾아가 기도회를 열고 있다. 식사를 하러 나오는 재능교육 직원들을 공략하기 위해 매주 화요일 정오 혜화동 본사를 찾아 '작지만 큰 힘이 되는 화요기도회'도 열고 있다. 거리서명을 위해 행사현장들을 찾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노동자들과 함께 추석잔치를 하기도 했다. 따스한 정이 오가는 가운데 끼를 발산하는 자리였다. 기독교대책위는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농성 현장과 결합해 당사자들과 끈끈한 인간애를 맺으며 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해고노동자들의 삶으로 잠시 들어가보자. 노동자라는 사실마저 부인당하는 그들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90년대 중반까지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명날인한 명실상부한 노동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위탁계약서를 들이밀며 서명할 것을 강요했고, 위탁계약을 하면 임금도 높아지고 더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회사 측의 말을 믿었든 안 믿었든 일을 계속하려면 서명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말 그대로 현대판 노비문서가 되어버렸다. 말이 개인사업자(사장)이지, 회사가 출근과 조회 시간을 엄격히 체크하고 그것에 따라 제재를 가하는 것도, 실적관리와 학생관리도 예년과 그대로였다. 오히려 임금은 낮아졌고 4대보험이나 퇴직금은 꿈도 꿀 수 없는 등 노동조건이 훨씬 열악해졌다. 이에 1999년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단체협상과 파업을 반복했다. 파업 때마다 회사는 노조원들을 협박, 징계, 해고했고, 손해배상까지 요구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던 중 회사는 2007년 적게는 몇십 만원에서 많게는 1백 만원이 넘게 수수료(위탁계약으로 바꾸면서 회사는 월급이라는 이름 대신 수수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를 삭감했다. 이에 따라 한 학습지교사는 560원(!)을 한달치 임금으로 받기도 했다. 이에 반발하는 노조원들을 중심으로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에 텐트가 차려졌고 농성이 시작됐다. 그동안 회사는 노조를 탈퇴할 것을 조합원들에게 요구했고, 탈퇴하지 않는 조합원들을 해고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12명의 해고노동자가 생겨났다. 

회사 직원들과 고용 용역은 천막을 찢어발기고 농성 노동자들을 폭행하고 성추행과 성적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 노조 차량 타이어를 펑크내고, 엔진에 모래를 집어넣어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고도 당당했다. 20억이 넘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하고, 또 집행하고... 회사 측은 당당함을 넘어 뻔뻔함으로 중무장한 지 오래다. 사측은 귀를 닫고 눈을 감았다. 학습지교사들에게는 치졸할 정도로 아끼던 돈을 노조원들을 탄압하기 위해 고용한 용역에게는 아낌없이 퍼부었다. 노조원들을 더 잘 탄압해달라고 비싼 양주를 비롯한 뇌물을 돌려서 용역회사에서는 VVIP로 분류되는 영광도 누렸다. 

그럴 리 없다고 도리질 치지만, 어쩌면 재능교육은, 비정규직 투쟁으로 악명 높았던 기륭전자의 1,800일 거리투쟁 기록을 갱신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쳤다고 그래서 잠시 쉬겠다고 눈치보는 사이에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기독교대책위의 단체들은 재능교육이 기륭전자 기록을 갱신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다지고 있다.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재능교육 현장과 연대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끝내 함께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독교대책위는 끝까지 함께할 생각이다. 가장 고통받는 이들의 친구가 되셨던 예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살아 있는 한 그들과 함께 할 것이다. 

날씨는 하루하루 겨울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다. 겨울의 칼바람 속에는 마지막 텐트까지 빼앗기고 침낭 하나로 길바닥에서 자야 하는 그들이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함께 하자고, 관심을 가져달라고, 자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외치고 있다. 이제 그들의 소리에 귀를 열고 눈을 열자. 마음을 크게 열자. 그게 어렵다면,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기도회에 들르면 어떨까? 아니, 좀더 욕심을 내자. 겨울이 오기 전에 협상이 되어 그들이 복직되고, 단체협상이 원상회복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올 겨울을 신명나게 즐기는 거다. 난, 겨울을 즐기고 싶다! 

 
글/김숙경 기독여민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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