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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식] 애완견 축복식과 김진숙씨 생각


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주일예배 광고 때 담임목사는 저녁에 교회 옆의 잔디광장에서 강아지 축복식이 있으니 모여달라고 했다. 내가 한 한기 머무는 이곳 산 안셀모에 위치한 제일장로교회는 신학적으로 열려 있기도 하지만, 이런 뜬금없는 행사로 미국을 오래 떠나 있던 나를 조금 당황스럽게 만들곤 한다. 취지인즉, 하나님의 피조생명이 서로 살상하는 폭력적 관계를 넘어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창조섭리를 마음에 새겨보자는 것이었다. 특히 하나님이 인간의 첫 조상에게 동물의 이름을 짓게 하고 이 땅의 생명 질서에 청지기로 책임있게 개입하도록 한 그 뜻을 살려 생명세계의 평화를 위한 선교적 소명을 진작시키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광고를 듣는 순간 나는 이사야 11장의 그 목가적인 비전이 떠올랐다. 독사 굴에 어린애가 손 넣고 이리와 어린양이 천진하게 뛰어노는 그 메시아 나라의 풍경 말이다. 하긴 16년 전 내가 시카고에서 목사시험을 볼 때 제출된 논술문제가 애완견 장례식에 대한 것이었으니 강아지 축복식이 전혀 뜬금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내가 지금 기억하는 그 문제의 요지는 한 교인이 자기가 사랑하는 애완견이 죽은 나머지 슬픔에 잠겨 목사인 당신에게 찾아와 이 강아지의 장례식을 집례해달라고 부탁해온다면 성서적 신학적 목회적 관점에서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고 실천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이곳 선진국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고 행사를 해도 뭔가 창의적인 발상에 골몰하며 사람을 즐겁게 할 줄 안다. 그 배려는 여유에서 나오는 것 같다. 미국도 이즈음 경제상태가 많이 안 좋아 중산층의 살림조차 팍팍하지만, 그래도 집에서 식구처럼 키우는 개에 대한 자상한 배려의 맘을 내보자는 것이다. 나는 그 선진국적 여유가 좋으면서도 딴에 불편해지기도 한다. 이 교회의 회중 대다수는 분명 채식주의자가 아닐 것이다. 먹을 고기 다 먹고 잡아 죽일 만큼 충분히 도살하여 먹고 남는 허접한 것 한국에 수출하는 나라 아닌가.

그럼에도 제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은 애지중지한다. 이 지역만 날씨가 좋아 유난히 심한 건지, 미국 전체의 보편적인 현상인지 이 지역주민들은 대부분 애완견을 한 마리씩 키우는 것 같다. 어느 집주인이 서너 마리를 한꺼번에 데리고 다니는 걸 본 적도 있다. 막내를 데리러 근처 초등학교를 가면 꼭 애완견을 데리고 딸내미를 마중 나오는 애엄마가 있다. 수업이 끝나고 딸애가 나오면 먼저 자세를 낮춰 그 애완견을 부둥켜안고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그 강아지도 혀로 그 아이의 볼을 핥으면서 즉각 정겹게 화답한다. 이런 정도의 친밀감이면 식구가 아니라는 게 이상할 노릇이다.
       
애완견 축복식이 내게 다소 불편한 것은 성서에 개에 대한 언급이 대체로 부정적으로 나오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충분히 육식으로 자기 배를 불리면서 애완견만은 별도의 식구로 간주하고 창조생명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는 그 이분법적 기준의 균열상 때문만도 아니다. 그 정도의 자가당착은 누구에게나 탐지되는 사소한 이중성이다. 인간은 그 욕망의 구조상 이중적일뿐 아니라 많은 경우 다중적인 처신을 하는 동물 아닌가.

내가 정작 찜찜한 것은 이 지구상에 사람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심지어 이 나라의 애완견 신세만도 못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지금까지 270일 넘도록 부산 영도조선소에 있는 85호 크레인 꼭대기, 지상 35미터 높이의 고공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진숙 씨가 연상되었다. 그 시위의 명분과 목적은 회사 측에서 단행한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는 것이라 한다.

자그마치 1년의 3분의 2가 넘어가도록 여성의 몸으로 그 꼭대기에서 혼자 먹고 자면서 시위를 벌이는 사례는 세계 역사에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사건이다. 기네스북에 올릴 만한 희귀한 뉴스거리가 되는 것 같다. 아직까지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걸 보니 회사 측에서 그 애타는 고공시위의 목소리를 들어줄 의향이 없는 듯하다. 듣자하니 이 회사의 최고대표는 먼 외국으로 떠나 오랫동안 떠돌면서 ‘너 지껄여라’식의 무관심한 대응을 해왔다고 한다.

집에서 키우는 개새끼도 그 정도의 간곡한 청이면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 제 목숨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들어줄 만도 한데, 김진숙 씨가 개만도 못한 모양이다. 이제껏 아무리 애타게 부르짖고 주변에서 안쓰럽게 동조하는 심사를 전해도 꿩 구워 먹은 반응을 보여왔던 것이다. 설사 김진숙씨의 주장대로 100% 다 들어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회사 측에서 책임있는 사람이 나와 자리를 만들어 함께 대화하면서 머리 맞대고 역지사지로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준다면 제3의 대안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복음서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지중해 연안 두로라는 마을에서 예수를 만나 귀신들린 자기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에게 간절히 청원했다. 예수도 유대인이라 편견이 있었는지, 아니면 이 여인을 시험해보려고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평소의 자기답지 않은 뜨악한 답변으로 이 여인을 모욕했다. 그 답변인즉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지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액면 그대로 읽으면 예수는 이 말로써 이 이방 여인을 모욕한 셈이다.

그러나 딸을 살려보려는 일념 때문이었는지 이 여인은 개 취급을 감수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주여 옳습니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이 말 한마디에 담긴 극진한 믿음으로 예수의 닫힌 마음은 열리고 개 취급하던 사소한 마음이 신중해진다. 나는 이 이야기에 나오는 예수와 여인의 대화법을 풍자와 해학의 수사학이란 견지에서 해석한 적이 있다. 예수의 거친 풍자적 어법에 여인이 해학적 기지로 응수하여 서로의 치열한 만남을 견인하였다는 요지였다. 개 취급을 감수한 여자를 예수도 당해낼 길이 없었는지 그 ‘말’의 진정성 속에 공감과 소통은 대번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김진숙씨의 경우도 270일이나 되는 철탑 고공 농성이면 개 취급 이상을 감수하며 자신의 밑바닥을 죄다 까발려 보인 것 아닌가. 어제 나는 비온 뒤 한기를 느끼면서 그 공중의 찬바람에 싸늘해졌을 크레인 85호 크레인 꼭대기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그녀가 그 꼭대기의 철 바닥 좁은 공간에서 생리적 욕구를 어떻게 해소할까 의문이 들면서, 내심 동물 이하의 취급을 자처한 그녀의 결기로 인해 설움이 복받쳤다. 그녀는 개가 되어도 좋은 만남과 소통을 갈구하면서 역설적으로 자본과 권력과 계급의 격차를 넘어서는 인간의 존엄을 부르짖고 싶었던 것이리라.
       
주일 저녁 무렵 교회 근처를 지나는데 푸르른 잔디밭에 열댓 명의 교인들이 자기 집 애완견을 데리고 모여 있었다. 목사가 집전한 애완견 축복식이 파장을 맞고 있는 듯 보였다. 정갈하게 관리된 푸른 잔디 위에 황혼녘 청명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 위로 사람 발바닥과 개발바닥이 함께 어정거리면서 한 무리로 어우러져 목사의 축복을 받고 있었다. 저만치 떨어진 그들의 얼굴에 환한 행복이 깃드는 분위기였다. 피조생명의 탄식을 넘어 그 개들과 사람들은 메시아 왕국의 비전을 일상으로 바꾸어놓고 있었다.

저 태평양 건너 내 동포, 내 자매 김진숙씨가 270일 동안 크레인 철탑 위에서 개 이하의 취급을 받는 현실이 그 자리에 겹쳐졌다. 그동안의 공중 생활에 많이 지쳤을 그는 오늘 '크레인에도 사계절이 다 있다'고 조금은 시적인 말을 했다. 이 지구촌의 같은 지붕 아래서 하나님 나라는 이다지도 차별적으로 임한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가서 마음을 합해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여한 수많은 인파도 희망버스를 타고 그 외로운 고공 시위에 동조한다고 한다. 나 역시 머나먼 이국에서 애완견 축복식을 보면서 그 서글픈 자리에 서럽고 뜨거운 눈물 한 줌 보탠다. 나이 50이 다 되어 개들 앞에서 솟구치는 인간의 눈물은 가슴 저리다.  / 차정식(한일장신대 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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