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사역(私譯)
1. 다윗의 시
온 땅아,/ 야훼께/ 외쳐라!
2. 기쁨으로/ 야훼를/ 섬기고
환호하며/ 그에게/ 나아가라! ...................................3+3+3
3. 야훼,/ 그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라!
우리를 지으신 분은/ 그이요/ 우리가/ 아니라,
단지 그의 백성,/ 그가 기르시는/ 양일뿐인 것을! ................4+4+3
4. 감사하면서/ 그의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하면서/ 그의 궁으로/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하라! ........................3+2+3
5. 야훼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는/ 영원하고,
그의 신실하심이/ 세세토록/ 대대에 이르기 때문이므로! .............4+3
2. 본문 주해(註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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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이 시(詩)는 감사제 때 불렀던 ‘찬양 시’ 유형으로 널리 알려진 시로서,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자의 가장 기본 되는 과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대표적 시다. 이런 유형의 ‘찬양 시’는, 일반적으로, 그 서두에 나오는 첫째 연(聯)이 ‘하나님의 유일한 왕권과 그의 창조주권 및 역사주권’을 찬양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는 시 형식의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시 형식은 이 시의 예배 의전적인 상황(감사제, 성전 입장의식[入場儀式], 궁정 입장 의식 등.)을 잘 반영한다. 즉 이 시를 구성한 네 개의 연(聯) 중에서 마지막 연을 제외한 앞의 연 셋이 모두 ‘명령형’으로 되어 있음은 그것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찬양자들을 향한 시편 시인의 찬양요청이 여느 찬양 시보다 더욱 절박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찬양(감사제 때 또는 성전 입장이나 궁정 입장 때 드린 찬양) 참여자들에게, 그리고, “온 땅아!”(시 100:1)라는 말이 말하듯, 전 세계의 하나님 찬양자들에게, 이 시의 시인은 과연, 무엇을 권고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이 시(詩) 해석의 중심과제라 하겠다.
이 시의 내용을 세밀하게 살핀 결과, 그 대답은 둘째 연(聯)인 다음 시구(詩句), 즉
야훼,/그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라!
우리를 지으신 분은/ 그이요/우리가/아니라(뷀로/아나흐누),
단지 그의 백성,/그가 기르시는/양일뿐인 것을!(3절, 4+4+3)
이라는 시구의 둘째 행(行) 끝에 나오는 히브리어 어구(語句), 즉 “뷀로 아나흐누”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어구는 그 히브리 자음을 그 ‘쓰인 글자대로’(kethiv) 이해하지 않고 그것의 ‘독음(讀音)으로만’(qere) 이해하려 할 때는 전혀 서로 다른 두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1)그리고 우리가 아니라(and not we ourselves; Ɩō’=kethiv)와 (2)그리고 우리는 그의 것이라(and we are his; Ɩô=qere)라는 두 번역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이다.
첫째로(1) 대부분의 본문 비평가들은 우리 본문 내의 평행법적 문맥을 살피고, 또 시 100편과 거의 동일 성격의 시로 보이는 시 95:6-7(cf. 사43:1,21; 44:2)과의 평행관계 등을 근거로 하여, 히브리어 자음글자 ‘로 ’(Ɩō’=not, kethiv)를 ‘로 ’(Ɩô=his, qere)로 고쳐서, ‘우리가 아니라’라는 본래의(kethiv의) 뜻을 ‘우리는 그의 것’이라는(qere의) 의미로 ‘고쳐서!’ 읽어야 하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현대 번역 성서들(한국어, 영어, 독어 등등)도 또한 이 견해를 따르는데, 그것은 이러한 본문 문맥의 언어학적인 논리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주장과 비슷한 또 다른 언어학적 논리는 이 구절의 히브리어 Ɩ’ (Ɩō’ ‘로’ = 라메드 알레프)의 첫 자음 ‘라메드’ (ל=Ɩ )를 그것이 본래의 우가릿어(Ugaritic)에서 가졌었던 그 기능(‘오!’ 또는 ‘실로!’라는 의미)에 따라 번역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2), 이들 견해가 가진 그 둘째 주요 견해는, 둘째 연(聯)의 제1행에 나타나는 ‘야훼/후/엘로힘’(‘야훼, 그가 하나님이시다!’)이라는 고백, 이른 바, 고대 이스라엘의 계약의식에서 흔히 고백된 ‘신명기적 신앙고백’(신 4:35,39; 왕상 18:39 등)이 여기서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과 그것이 또한 역시 신명기적 배경을 갖고 있으면서 시 100편과 유형 상 유사한 감사 찬양의 의전 시(儀典 詩)인 시 95:6-7과 동의평행을 이룬다는 점을 주요 근거로 하여 둘째 연의 제2행에 나타나는 히브리어 어구, ‘뷀로 아나흐누 ’를 마소라 본문처럼 ‘우리가 아니라’라는 의미로 읽지 말고 ‘우리는 그의 것’이라는 의미로(qere에 따라) 읽어야 한다고 본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역사상 자신을 가리켜 ‘자신의 창조자’라고 주장한 바가 없다는 사실을 들어서 <야훼가 이스라엘의 창조자냐? 이스라엘 자신(인간)이 자신의 창조자냐?> 라는 이슈가 우리 본문의 주요 쟁점이 될 수는 없다고까지 단언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①첫째로 히브리어(MT) ‘뷀로 아나흐누’ (=‘그리고 우리가 아니라’)를 우가릿 문학과의 비교 연구를 통하여, ‘Ɩ’ ’로부터 ‘알레프’(א)는 빼고! ‘라메드’(ל)만을 강조한 후, 여기 나타나는 ‘라메드’(ל=Ɩ )는, 원래, 우가릿어(‘Ɩ'’)가 가진 ‘호격’(“오!”) 또는 ‘단언적 감탄사’ (“실로!”)의 기능을 하는 ‘라메드’(ל)이므로 시 100:3의 둘째 줄 끝의 ‘라메드’(ל)를 ‘실로!’라는 의미로 번역한 그것은(Lewis), 다후드(Dahood)가 지적한 것처럼, ‘알레프’(א) 자음을 무시해버렸으므로! 매우 부적절한 개악(改惡)의 번역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②둘째로 신명기 학파가 강조한 “야훼, 그가 하나님이시다!”(“야훼 후 엘로힘”)라는 계약 고백문과 왕상 18:39의 갈멜 산에서 이스라엘 전 회중이 ‘반복하여!’ 외친 그 고백(dtr, ‘야훼 그가 하나님이시다!’라는 반복문)도, 실은, ‘누가 참 신이신가?’라는 논쟁적 물음(the polemic of praise)에 대하여 ‘바알이 아니라 야훼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다!’라고 대답한 매우 신학논쟁적인 외침이므로, 시 100:3은 신명기 학파의 유일신 선언(신 4:34 -35; 왕상 18:39) 및 제2이사야의 유일신 선포(사 45:6,18)와 상응일치하고, 심지어는, 호세아의 하나님 고백(호 11:9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라!”)과도 일치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나는 시 100:3이 증언하는 신학적 메시지란 이러한 호세아-신명기 학파-제2이사야의 논쟁적(!) 유일신 증언 및 후대의 여러 예배환경들(유대교와 기독교 예배 환경들)의 신(神)증언과 그 궤(軌)를 같이 한다고 본다. 즉 온 인류가(cf.‘온 땅’이) 드려야 할 하나님 찬양의 그 근본 본질과 그 근본 과제는 <야훼 그가 하나님이시고, 야훼(=One Who Causes to be=One Who Creates) 그가 곧 우리를 지으신 분일뿐, ‘우리 인간은 결코 우리를 만들어 낸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고백하는 그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신명기 학파 및 제2이사야의 역사적 상황과 마찬가지로, 후대의 제2성전 시대와 유대교의 회당예배, 기독교 예배 및 오늘의 우리 시대, 즉 ‘무신론 포교의 전도사’들이 유례없이 범람하고 있는 바, 니체(신은 죽었다!)→러셀(B. Russel, 왜 나는 크리스천이 아닌가?)→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호킹(S. Hawking, 인간 뇌의 자발적 창조성이 이 우주를 창조하였다!)에로 이어지는 21세기 성년(成年)시대 속에서 갈등하는 크리스천 지성들을 향해서도 던지는 여전히 ‘다급한’ 명령이라고 하겠다. 즉 <야훼 창조주만이 하나님이요 우리 인간은 결코 [창조신이] 아니라는 것, 우리 인간은 단지 그가 만드신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일뿐>임을 먼저 알라는 것이다. 실로! ‘자발적 창조성’을 가진 ‘인간 뇌’가 이 우주의 창조자인 것은 아니! 라는 것이다.
우리 본문은 분명 <바로 이것이! 하나님 찬양의 본질이라는 것>을 부단히 가르쳐 권면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즉 마소라 본문(MT)을 존중하여 히브리 자음은 보존하고! 그리스어 구약역본(LXX)에 따라 단호히 <우리를 만드신 분은 야훼 그분 만일뿐 우리 인간은 결코 아니라는 것> <우리는 단지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일뿐>임을 아는 그것이 하나님 찬양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창조주 야훼 그분만이 신(神; 호 11:9)이시며 인간은 결코 자신의 창조주는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창조주 야훼만이 홀로 선하시며(막 10:18!) 그의 인자와 진실(출 34:6!)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3. 나오는 말
오늘날과 같이 이토록 대담하게 신(神)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것을 ‘논증-설득하려는’ 무신론 논리가 극성을 부리는, 이른 바, ‘거인주의’의 오만(titanic hubris)으로 가득 찬 우리 시대(시 14편 53편)를 향한 21세기 오늘 교회 예배의 가장 적절한 시대적 과제는 분명 <우리를 만드신 분은 그(야훼)요, 결코 우리 인간은 아니다.>는 것을 이 시대의 저 무신론적 지식인들로 하여금 확실하게 승인 고백하게 만드는 그것이라 하겠다. “오, 당신! 당신의 이름은 야훼, 당신만이 온 땅[세계]에서 가장 높으신 분[엘룐]임을 저들로 하여금 알게 하소서!”(시 83:1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