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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식] 떨어지는 사과에 대한 묵상


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뚝,
뚝,
사과가 떨어진다. 오후 늦은 시각, 나른한 적요의 틈새를 깨며 둔탁한 시멘트 바닥에 사과가 떨어진다. 일반 사과보다 좀 작은 크기의, 능금이라고 할 만한 이 열매를 떨어트리는 나무는 내가 지금 머무는 이국의 타운하우스 옆, 쓰레기통에 둘러싸여 있다.

아마 가뭄 때문일 것이다. 벌써 6개월 넘도록 건기가 계속되니 많은 열매를 몸에 달고 영양을 공급할 에너지와 수분이 딸리는 모양이다. 이제 발그레한 빛이 감도는 풋사과가 대부분인 이 열매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쓰레기처럼 뒹굴고 있다. 지하로 들어가는 차바퀴에 깔려 으깨진 것들도 여럿이다. 나무 주변의 풀밭이나 시멘트 위에 그대로 널브러져 있는 놈들도 많다.

아이들이 심심해서 이걸 발로 툭 찰 때면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어른들 역시 아무도 이 떨어진 조무래기 사과들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곳엔 한국유학생들이 많이 사는데 아마 미국풍의 영향 탓인지 집마당에 열리는 사과는 먹을거리로 치지 않는 분위기다. 아니, 공부에 정신없어 떨어지는 사과 몇 개에 신경을 팔 겨를이 없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래도 몇 달 전 꽃을 피우고 힘들게 자라 이만큼 과육을 채워두었을 텐데, 그냥 무정하게 떨어지는 저들의 추락이 딴에 안쓰럽기도 하다. 그 수직낙하의 무심함이 더러 마음 속에 먹먹한 파문을 만들기도 한다. 꽃의 추락이 날개를 달아 가볍고 운치 있다면 열매의 낙하는 날개도 없이 무겁게 빨리 떨어져 놀랍고 아프다. 

그런 엷은 애달픔의 정서로 나는 몇 차례 이 사과들을 주워 깎아 먹어보았다. 햇사과의 싱그런 맛이 우러났다. 단단한 과육의 씹히는 맛도 좋았고 달콤한 즙이 넉넉히 음미할 만했다. 크기는 좀 작아도 그 맛이 주워 먹는 비루한 체면만 접어두면 간식거리로 썩 괜찮았다. 많이 주워온 그 사과들로 아내를 부추겨 애플파이 비슷한 걸 만들어먹어도 보았다. 

이러한 실용의 소일거리로 몇 개 먹어줘도 버려지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 떨어져 뒹구는 다수는 소외된 열매들이다. 거들떠보지 않은 채 몸이 깨진 그것들은 마치 버려지기 위해, 그냥 시간 속에 상하고 썩기 위해 자라왔다는 듯이, 이 나무의 최고로 익은 성숙은 텅 빈 상징의 은혜로만 공전하는 듯하다.

담장 너머 그리스 정교의 예배당에서 종소리 징징 울리고, 신학교 시계탑에서 수차례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규칙적인 선율로 들려올 때, 그 틈새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사과의 추락소리를 묵상한다. 아무런 미련 없이 몸을 던지는 이 은혜의 선물은 무엇을 계시하는가. 버려지는 그 몸의 작은 사연은 수신자가 없는 선물이고, 대상 없이 무상으로 제공되었다가 썩어가는 은혜이다. 뉴튼은 떨어지는 사과를 묵상하며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데, 나는 그러한 과학적 두뇌가 녹슨 자리에서 텅 빈 종소리와 같은 버려지는 은혜의 무연한 자족감을 본다.

꼭 써먹지 않아도 좋다는 듯이, 그 속의 씨앗이 꼭 어디 옥토에 심겨지지 않아도 원망이 없다는 듯이, 오늘도 사과는 몇 개씩 뚝, 뚝 떨어져 뒹굴다 멈춘다. 발에 채이고 차바퀴에 으깨져도 비명도 없이 부서지는 이 식물성의 존재감에 나는 마음이 자꾸 시려진다. 우리가 할렐루야로 감탄해마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란 게 그 쓸모의 형식을 벗어던지면 궁극적으로 이런 텅 빈 투사체 아닐까.

인간에 의한, 인간을 통한 충만을 강요하지 않아도 자족하며 저 스스로 충일한 우주 같은 것. 그저 잠시잠깐의 있음만으로 고요한 존재, 썩어가고 버려져가며 그 형체를 바꾸어 사라져가도 묵묵히 순응하는 자연 같은 것! 그 오래된 진리의 잠언을 시위라도 하듯, 오늘도 내 귓전은 사과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듭난다. 아, 저렇게 무너지고 추락하며 살고 있구나. 소멸과 함께 아름다워지는 저 선명한 존재의 빛이 잠시 공중에 번쩍 스치는 순간, 나도 너도 그렇게 아스라한 텅 빈 은혜 속에 살고 있구나. / 차정식(한일장신대 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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