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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 칼럼] 멀리 가는 물

▲예수원교회 김성 목사.
노무현재단 이사장 문재인 변호사가 최근에 펴낸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 프롤로그엔 시인 도종환의 시 한 편이 실려 있습니다. <멀리 가는 물>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문재인 변호사는 자신과 노대통령은 작은 지천(池川)에서 만나 함께 먼 길을 흘러왔다며 지금은 비록 두 사람이 육신으론 헤어졌지만 앞으로도 정신과 가치로 한 물줄기가 되어 영원히 함께 흘러가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문재인은 도종환의 시 <멀리 가는 물>이 자신의 이 같은 마음을 너무나 잘 표현해 주고 있다며 시 전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멀리 가는 물>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한다.
이미 더럽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체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 길을 가지 않는가.
때 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은가.

노자는 도덕경에서 물을 가리켜 최고의 선(上善若水)이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않는다(水善利萬物而不爭)’ ‘다투지 않으니 허물이 없다(夫唯不爭 故無尤)’ 도종환의 시에서 보듯 산골에서 맑은 물로 떠난 물은 도중에 흐린 물, 더러운 물, 썩은 물을 만나도 다투지 않고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체’ 함께 데리고 흘러갑니다. 이것이 노자가 물을 선(善) 중의 으뜸인 상선(上善)으로 꼽는 첫째 이유입니다. 둘째는 물은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 때문입니다.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處衆人之所惡)’ 노자는 강과 바다가 수백 개의 산골짜기 물줄기의 복종을 받는 이유는 항상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있기를 바란다면 그들보다 아래에 있고, 그들보다 앞서기를 바란다면 그들 뒤에 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똑같은 가르침입니다. 예수는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9:35)’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르게 하고 살아야 하는 게 운명인 목사로 살면서 가장 힘든 일중의 하나는 바로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 만나는 일입니다.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뿐만 아니라 ‘이미 더렵혀진 물’이나 심지어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합니다. 이 물들과의 만남은 산골짝을 처음 나설 때의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을 ‘혼탁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흐린 물, 더러운 물, 썩을 대로 썩은 물 때문에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체 길을 잃은 물’이 되고 마는 많은 물들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명색이 목사이면서도 마음이 삭은 체 갈 길을 잃은 듯 도무지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나도 그만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자신감도, 의욕도, 품었던 꿈마저도 흔들려 풀썩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산골짜기를 졸졸 흐르던 맑은 물이 개천이 되고 강이 되어 사람 사는 세상을 지나 바다에 이르는 먼 길을 가려면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시인의 말은 꼭 저에게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때 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흐르는 물이 되어야 멀리 바다에까지 갈 수 있지 않느냐는 시인의 말은 저를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만듭니다. 분명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저에겐 아픈 말입니다. ‘멀리 가는 물’이 되기 위해서는 ‘더러운 물’ 때문에 ‘몸도 버리고’ ‘썩은 물’ 때문에 ‘마음이 삭아도’ 본래의 맑은 심성과 얼굴을 잃지 않고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야 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깨끗한 물을 좋아합니다. 청정수를 찾습니다. 그러나 돌아서서 말합니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없다(水至淸則無魚)’ 이 모순된 요구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목사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라도 목사는 신앙양심과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모두들 말합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원칙을 지키려드는 목사에게 그 입으로 다시 말합니다. ‘목사가 융통성이 없어. 원리원칙만 따져. 너그럽지 못하고 고집이 세.’

멀리 가기 위해서는 흐린 물, 더러운 물, 썩은 물 모두 함께 부둥켜안고 흘러가야 하는 물의 운명이 눈물겹습니다. 물의 이 슬픔이 물의 위대함을 만드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의 슬픔과 아픔이 목사인 제 가슴을 늘 아리게 합니다. 그리고 물처럼 살지 못하는 모자란 제 모습을 볼 때마다 늘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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