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체니의 세상읽기]밥상 앞에서 주눅드는 아이들

▲김숙경 기독여민회 총무

“애들이, 너 학교 끝나고 (공부방 가느라) 놀지 못하는 걸 궁금해 하지 않아?”
“아니. 애들이 어느 학원 다니냐고 물으면, 나는 아카데미 다닌다고 그래”
“아카데미?”
“다른 애들은 학원 다니니까 나도 학원 다닌다고 말하는 거지”
“왜, 공부방 가는 게 잘못된 일인거야? 창피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창피한 건 아니지만, 구태여 알릴 필요는 없잖아”
“....”

이제는 훌쩍 커서 처녀티가 제법 나는 큰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한 말이다.

나는 한부모다.
딸 하나, 아들 하나.

큰 아이는 고등학교에,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에 다닌다. 빠듯한 살림살이가 힘들어서 애들 학교급식비를 신청했었다. 학기마다 반복되는 일인데도 항상 힘들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그리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긴 하다. 나는 한국이라는 이 나라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해 지금도 일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국가로부터 받은 것보다 내가 국가에게 준 것이 훨씬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들의 경우는 다르다. 공부방 가는 것조차 가난한 아이로 낙인찍힐까봐 완강히 거부하는 애들을 보면, 설령 애들 생각이 잘못됐더라도 애들 입장을 존중해 줄 수밖에 없어진다.

그래서 애들 자존심을 생각해서 급식비 지원신청서류는 내가 직접 냈다. 이마저도 쉽지 않아서, 큰 녀석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올해는 아예 신청을 포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사는 고양시에서는 초등학교의 경우, 무상급식을 시행한다. 무상급식을 시행한 후로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른다. 다행히 무상급식 전에도 심술궂고 개념 없는 선생님-심한 경우, 수업시간에 급식대상자 아이들을 직접 지목하는 선생님도 있다-을 만나지 않아서 신분(?)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급식대상자라는 경험이 아이들을 주눅들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공부방을 공부방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카데미라 부르는 현실에서, 급식지원 대상자라는 사실은 아이들을 주눅들게 하는 주범이다. 한국처럼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우상이 되는 사회에서, 가난은, 그 자체로 형벌이자 죄악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부모의 가난은 바로 아이들의 자존감 하락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그 틈과 결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는, 오롯이 우리 어른들의 몫이다.

다시 작은 아이 무상급식 문제로 돌아오면, 우선 무상급식은 가난한 아이들도 친구들에게 주눅들지 않고 밥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그래서 밥을 통해서 평등 감수성과 민주적 질서를 배우게 된다. 나아가 급식을 통한 밥상공동체의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밥 하나에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밥상 예절을 중시했고, 예수 또한 밥상공동체를 중요시 여겨 예수가 가는 곳마다 작은 밥상잔치가 벌어졌다. 예수가 펼치는 밥상에는 가난한 이든 부유한 이든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참석할 수 있었다. 밥은 평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밥은 살림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평등한 밥상을 지향하는 것이 무상급식인데, 오세훈 서울시장을 비롯한 몇몇 무리들은, 포퓰리즘이니 하면서 무상급식을 하면, 국고가 거덜 나고 한국이 곧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자금처와 정체도 불투명한 무상급식반대 서명을 받더니 이제는 주민투표를 하잔다. 오세훈 시장의 무상급식반대 행보를 보면, 어이상실을 넘어서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밥 한 끼 눈치 보지 않고 평등하게 먹자는데, 가난한 아이도 부자아이도 더불어 사이좋게 밥 한 번 먹자는데, 해도 해도 너무한다. 오세훈 시장의 망언에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는 건 당연하다.   

지금 무상급식을 위해 많은 이들이 힘을 모으고 있다. 그 중심에 여성들이 있다. 주로 나 같은 학부모들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히 생각한다. 여성들이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비쳐지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모성이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 모성일 수는 있지만 여성이 곧 모성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곳에도 수많은 틈과 결이 있기 때문이다.

무상급식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성역할에 충실해서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건강히 자라려면 그 친구들도 건강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아이 하나 잘 키운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내 아이가 부실해도, 주위의 아이들이 건강하면 그 건강한 기운을 받아서 내 아이도 건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여성들이 무상급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남성들보다 지혜롭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남성들이 무상급식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무상급식운동은 ‘에미’라서 당연히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이다. 무상급식을 비롯해 많은 사안에서 남성이 여성들의 지혜를 배웠으면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꿈꾼다. 비록 오늘은 무상급식에서 출발하지만 내일은 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들불처럼 흘러 온누리를 적시기를 꿈꾼다.       


김숙경/기독여민회 총무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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