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하나님, 우리를 치유자로 삼으소서!”
2011
아시아 주일
예배 안내서
아시아기독교협의회
1974년 이래, 아시아와 전세계의 모든 에큐메니칼 기구들은
매년 성령강림절 전 주일을 아시아 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이 날은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East Asia Christian Conference)의 출범을 기념하는 날이며, 이 기구는 후에 “아시아기독교협의회”(the Christian Conference of Asia)로 발전하였습니다.
2011년은 6월 5일을 아시아 주일로 지킵니다.
올해 아시아 주일의 주제는 제 13 회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회에서
향후 오 년(2011-2015)의 주제로 정한 “주의 말씀을 전하라 화해하고 치유하라”(Called to Prophesy, Reconcile and Heal)는 말씀을 따라
“오 하나님, 우리를 치유자로 삼으소서!”
로 정했습니다. 이 주제를 통하여 우리가 치유자가 되고,
동시에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차원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갈라지고 상처 입은 마음의 치유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들어가는 말
2011년 아시아 주일 예배안내서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대지진으로 사랑하는 집과 사람들을 잃은 아오테리아 뉴질랜드 주민들과 홍수와 쓰나미,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파키스탄과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의 국민들, 그리고 반정부 민주화 시위로 고통을 당하는 중동지역에 파견된 많은 아시아 근로자들을 울음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예배드릴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한 많은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드는 아시아의 많은 어린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억압과 학대받는 이들의 침묵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폭력과 정치적 압력으로 인하여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시아 주일을 맞으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드립니다.
참혹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솟아나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시77:9) 우리는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상처입고, 절망하고, 소외되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일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유와 화해의 능력이 어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희망을 다시 빛을 발하고 사람들의 삶 속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줄 것입니다.
아시아주일을 맞아 이 예배안내서를 드립니다. 이 안내서에는 성경공부와 묵상 자료, 기도와 축도, 예배 자료들을 담았습니다. 우리는 올해의 주제에 대한 아시아의 친구들이 서로의 응답을 함께 나누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자료집을 발행하는데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큰 감사를 전합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른 교회 전통과 주일 예배를 위한 예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해 아시아 주일에는 저희가 드리는 이 자료를 각자의 예전에 적절하게 적용하여 사용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안내서에는 많은 분들이 원하는 예배 자료가 두 가지 들어있습니다. 이 자료들을 통하여 여러분의 교회에 속한 교인들이 평소 드리던 예식과 다른 방식의 주일 예배를 경험하고, 그로 인하여 교회의 일치와 연합 정신이 높아지는 계기다 되기를 기대합니다.
만일 6월 5일 아시아 주일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교회에서는 각 교회의 연중 일정 가운데 가장 편리한 주일을 정하여 올해 안에 지켜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는 이 예배안내서가 가능한 한 널리 전해지고 사용되기를 기대하며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한 필요한 경우 각 지역의 상황에 맞게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여 사용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시아기독교협의회의 모든 사역과 친교는 여러분의 기도 속에서 이루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기도하는 가운데 아시아 주일에 드려진 헌금을 아시아기독교협의회의 사역에 지원해주신다면 우리는 대단히 기쁘고 감사하겠습니다. 아래의 주소로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예 금 주 : Christian Conference of Asia
은 행 명 : Hang Seng Bank
은행지점 : Hankow Road (4 Hankow Road, Kowloon, Hong Kong SAR, China)
계좌번호 : 295-4-70 95 94
은행 코드 (Swift Code) : HASEHKHH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사명을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공동으로 증언하는 가운데 생명을 살리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쁘게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하여 구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57:1)
헨리에트 후타바라트 레방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무
성서 연구와 묵상 자료
치유를 위하여.
(이 성서연구 자료는 말레이시아의 데니스 라후(Dennis Raj) 목사가 2010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3차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회에서 인도한 내용임.)
성서 본문 : 호세아서 6:1,2; 말라기서 4:2, 3; 요한계시록 3:17, 18
서론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활동하셨을 때, 치유는 그 분의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의 육체적인 질병을 치유하신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거나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죽어 땅에 썩어질 인간의 유한한 육신을 고치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시는 것과 똑같이 사람들의 내적 존재와 영혼을 치유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입고 지친 마음을 모두 치유하고, 깨어진 영혼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읽으신 이사야서 말씀에서 본질적이었음이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게 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무덤가에 살고 있던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것은 이러한 말씀을 이루신 가장 분명한 예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하여 내적이고 외적인 치유와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다른 사람들의 비난과 죄책감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면과 사회적 비난으로 인한 삭개오의 실질적이고 오래된 상처를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육체적인 근심으로 인하여 병상에 누운 것만 치유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과 영혼 안에 갇혀 있는 그들 자체를 치유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치유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깨어진 마음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로 인하여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질병들에 대하여 “이미 만들어진”, “한 가지 처방”만을 가지고 세상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우선적이고 중대한 과제는, 그리스도 교회의 지도자인 우리들이 먼저 치유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4-23절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주신 예수님의 특별한 계시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17절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모든 면에서 부유하고 영적으로 강한 교회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치유까지 포함하여)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고 자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의 성령은 그들이 곤고하고 눈먼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보지 못했고, 또한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보지 못하게 하는 자신들의 영적인 필요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오늘 우리가 치유를 이야기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우리의 영적인 질병을 드러내기 위하여 가장 겸손하고 정직하게 우리들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 역시 먼저 치유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시각 장애인입니다. 심지어 우리 교회와 교구 안에서, 고통을 당하며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가 괜찮으니까 너도 괜찮지?”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주문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만 치유가 필요하다고 잘못 생각해왔습니다. 우리는 시각 장애인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이고 물질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빈곤과 굶주림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각 장애인입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모른 척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이 계속되는 설교와 끝없는 회의 약속으로 인하여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각 장애인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곤궁한 삶을 보지 못하고, 우리의 생활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느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과 관련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각 장애인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이 얼마나 죄악에 빠져있는지 보여주는 범죄통계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통계들이 우리가 어떤 생활환경 속에 살고 있는지 알게 하여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심지어 짧은 기도도 드리지 않고 잠깐 훑어보고 빠르게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각 장애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우리를 보내시려고 우리에게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는 무익한 우리의 무의미한 생각이 지시하는 계획과 방향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의 실수와 약점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실수들은 놀라운 정도로 분명하고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이여,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발전과 관심사를 위하여 기회와 개방성에 눈을 크게 뜨는 것은 분명합니다. 친구들이여,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영적 지도층이었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마15:14)들이라고 우리에게 하신 것과 동일한 영적 진단을 내리셨습니다.
귀먹고 듣지 못하는 우리의 귀 역시 먼저 치유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청각 장애인입니다. 오염으로 질식하고 있는 아시아의 강들이 외치는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청각 장애인입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보금자리가 급속히 줄어들어 새끼들을 돌보고 먹이지 못하는 북극곰들의 고통스러운 울음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청각 장애인입니다. 개발과 삼림파괴로 인하여 둥지를 잃어버린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청각 장애인입니다. 불법적인 벌채로 인하여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생동적이고 독특한 생활방식을 빠르게 잃어버리고 있는 아시아의 원주민 부족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룩한 잉여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돈을 가지고, 교만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비록 낭비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가 충분히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물과 전기를 공급받기 위하여 지구의 천연자원을 보존할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이기적인 생활방식을 회개하고 바꾸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청각 장애인입니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막4:12) 라고 하신 말씀처럼, 다른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에 대하여 깊은 죄책감을 가져왔습니다.
힘이 없고 굳어 있는 우리의 손 역시 먼저 치유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손은 굳어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팔짱을 풀지 않고 서로 다른 교단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 홀로 서 있었기 때문에 마비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손은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들을 갖지 못한 것을 원망하느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못했기 때문에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신 것을 잊었습니다. 우리의 손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헐벗은 사람을 입히지 않았기 때문에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손은 우리 자신의 종교적인 치장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비단을 찾는데 익숙합니다.
우리의 손은 물에 빠진 사람들, 알코올에 의존하고,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을 구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손은 부족 간 갈등이나 그밖에 이기적인 동기로 촉발된 전쟁으로 인하여 아버지와 남편을 잃어버린 고아들과 과부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팔은 불구가 되어 대량생산체제의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불의와 거대한 억압의 사슬을 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가 어서 속히 치유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미 전도서 24장 11-12절 말씀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경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육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그리고 우리의 행위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절고 있는 우리의 발 역시 먼저 치유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발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우리에게 가라고 명하신 곳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없습니다. 우리의 발은 빈민굴이나 소외된 사람들의 마을에 찾아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발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간 것처럼, 믿음으로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발은 다니엘이 바빌론의 왕궁에서 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굳게 서서 직면한 시험들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발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했던 것처럼 유혹이 닥쳐올 때 신속하게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발은 우리의 교회와 총회, 교구와 지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부패와 불길과 정치적 음모의 불꽃을 밟아 끄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발은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앞서 걸어가신 희생과 고통의 길을 걷기를 거부했습니다. 친구들이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우리의 발도 우선적으로 깨끗하게 씻겨야 합니다.
침묵을 지켜온 우리의 혀 역시 먼저 치유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인들의 가정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아동학대와 가정폭력, 성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우리를 지원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진리를 말하고 교인들이 범하는 죄에 대하여 정면으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우리는 침묵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에스겔서 2장에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실 때“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들을 변호할 자격이나 자신들의 문제를 제기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만한 발판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위하여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증언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입술이 정결해져야 합니다. 더러운 거짓말과 속임수의 말들을 깨끗하게 씻어내야 합니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이사야서 6장의 말씀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예언과 화해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사야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려 했던 우리의 마음 역시 먼저 치유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장 우선적으로 깊은 내적 치유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동안 시기와 질투로 약해져 우리의 마음은 강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병들었습니다.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병균에 감염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감추어졌습니다. 욕심과 이기적인 욕망의 기름이 우리의 마음을 덮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증오와 상처의 콜레스테롤로 막혔습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흘러야 할 생명의 피인 사랑이 마음껏 흐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사회적인 지위와 감투와 그것을 유지하는 권력을 가진 명망가들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자라고 있는 자기 의와 교만이라는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10장 9절에서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오늘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주실 것을 구해야 합니다. 깊은 내적 치유 없이 우리는 계시의 말씀을 두려움이나 편견 없이 전할 수 없습니다. 내적 치유 없이 우리는 진정하고 참된 화해를 이룰 수 없습니다.
결론
친구들이여, 결론적으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기 전에 우리들 자신의 치유를 먼저 구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답은 아주 단순합니다. 만일 우리들 자신이 아직 치유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 연약한 주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그 과정에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질병을 전염시킬 수 있는 실제적인 위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독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의사는 다른 사람들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 자신이 치료자일 찌라도,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어 치료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신을 찾아온 환자를 오히려 위험에 빠트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또 다른 적절한 예가 생각납니다.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영적인 열심으로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격렬하게 저주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의 교회와 우리들 안에 동일한 질병이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순회하면서 전도하고, 회심하는 사람들을 얻고 우리의 교회로 데려오는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들 역시 우리를 보고 교회 지도자들 간의 정치적 충돌과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중상모략하고,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며, 이기적인 교만의 악마적 습성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호세아서 6장 1-2절에서 하나님의 치유가 나타나기 전에 상처를 주신 것처럼, 우리도 반드시 우선 상처를 입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육신의 치유를 위해서는 우리는 살을 찢고 상처를 내는 수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이 없이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아가 깨지지 않고 우리는 치유될 수 없습니다.
사실 슬픈 현실이지만, 아시아에 있는 하나님의 깨어진 세계를 치유하는 일꾼으로 우리를 사용하기 위하여 우리의 치유자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는 능력과 계획을 가지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치유를 받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안에 있는 곤궁한 것들을 인식하고, 보다 나은 존재로 변화하고자 하는 진정한 마음을 갖는 것이 전부입니다.
끝으로 말라기서 4장 2-3절의 말씀으로 결론을 삼고자 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오늘 우리들 자신이 치유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한 것처럼 우리는 불의와 억압과 불평등의 악인들을 밟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한 이 모든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고, 우리를 통하여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치유를 위한 묵상과 기도
(이 묵상 안내서 역시 앞서 나눈 말레이시아의 데니스 라후(Dennis Raj) 목사의 성서연구에 근거한 것임.)
우리는 치유에 대하여 생각하고 이야기할 때, 육신적이고 물리적인 치유에 우선적인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에 대한 치유는 살아있는 동안에만 유효하고, 우리의 육신은 결국 죽어 부패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이 만난 사람들을 감정과 영혼의 차원에서 치유하는 데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셨다고 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물리적인 육신에 대한 외형적인 치유와 함께 영원한 가치를 가진 내적 치유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묵상 1 : 마태복음 15L14; 요한계시록 3:14-23
인도자 : 주님, 주님과 같은 자비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과 우리의 눈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영적으로 보지 못했던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들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다른 이들의 허물은 선명하게 보는 선별적인 시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부여하신 사역을 행하는 중에 주님의 관점이 부족했음을 고백합니다.
회 중 :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사, 우리의 눈을 열어 주님께서 보는 것을 우리의 눈이 보게 하옵소서.
묵상 2 : 잠언 21:13; 마가복음 4:12
인도자 : 주님, 학대당하는 주님의 창조세계가 신음하는 고통의 소리를 우리가 듣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에 우리의 귀를 닫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선별적으로 무시했음을 고백합니다.
회 중 :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사, 우리의 귀를 열어 주님과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게 하옵소서.
묵상 3 : 잠언 24:11-12; 마태복음 25:41-46
인도자 : 주님, 우리의 손이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헐벗은 사람들을 옷 입히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또한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의 손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회 중 :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손을 강하게 하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하라고 말씀하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게 하옵소서. 아멘.
묵상 4 : 마태복음 28:19-20; 사도행전 8:4
인도자 : 주님, 우리가 편안한 곳에 계속 머무르며 주님께서 인도하는 곳으로 걸어가기를 거부했던 것을 고백합니다. 복음이 필요한 이들에게 나아가는 것을 우리가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는 편의적으로 희생과 경건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회 중 :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발이 순종하며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도우사 주님과 함께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아멘.
묵상 5 : 이사야서 29:13; 예레미야서 5:23-24; 17:9-10
인도자 : 주님, 우리의 심장 동맥이 시기와 증오, 비탄의 콜레스테롤로 가득 찼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욕망과 이기심의 지방으로 덮혔습니다. 또한 교만과 편견의 병균에 감염되었습니다.
회 중 :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시고,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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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믿음 안에서 평안합니까?”
(캐나다 연합교회의 사라 셰퍼드(Sarah Shepherd)와 바바라 로이드(Barbara Lloyd)가 작성한 성서연구.)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만나셨던 이야기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치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시각 장애인이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하신 일,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 걸을 수 없거나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신 일, 청각 장애인이었던 사람을 듣게 하신 일, 말 못하는 사람의 말문을 열어주신 일 등... 이들 중에는 이름이 전해지거나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거나,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익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방식, 즉 우리의 육신적, 정신적 상태와 상관없이 가능성과 전체성으로 우리를 보시는 것처럼 그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이야기들이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정의를 위하여 일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귀 기울이고 영광스럽게 해야 하는 이 사회를 위하여 우리가 일하도록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마가복음 10장에서, 치유 받은 사람(바디매오)은 온전해졌습니다. 비록 권력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침묵할 것을 강요했지만 그는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예수님께 도움을 구한 사람에게 원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물으시고, 그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읽고, 그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나누면서, 30분 간 그동안 침묵하며 우리가 들어주기를 원했던 목소리들을 주의해서 듣는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이 전해주는 장애인들의 삶의 모습을 오늘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인도자의 준비
성경 본문을 읽고 그에 대하여 응답하는 질문들을 만들어 보십시오. 자신의 그룹에서 실행할 수 있는 적절한 토론 질문들과 제안들을 생각하십시오. 참가자들의 주체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적절한 주제들을 준비하고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유연하게 인도하기 바랍니다.
질문의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건강한 신앙을 돕기 위하여 만들어졌지만, 그 중에는 더 큰 차원에서 사람들이나 사회, 공동체와 국가의 “건강한”모습을 묻는 질문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참여하고 있는 그룹에서 이 주제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또 어떠한 범위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하는데 유용할 것인지 생각해주기 바랍니다.
개회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치유자이시며, 고난을 대신 지신 주님, 모든 사람들과 창조세계에 주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우리를 열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 세계 안에서 서로 괴롭히고 병들게 하는 태도와 행동들을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도록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옵소서. 우리가 오늘 함께 말씀에 응답하며 주님의 건강하고 온전한 이상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이 시간이 우리 모두를 위한 치유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성경 읽기 : 마가복음 10:46-51
본문을 다함께 읽어, 모든 사람들이 본문의 내용에 익숙해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룹을 두 세 개로 나누어 각 그룹에 다음의 세 가지 역할 중 한 가지를 상상해보게 합니다: 바디매오와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읽고,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성경에 묘사된 그들의 역할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느낌을 나눕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세 개의 작은 그룹에서 각각 서로의 느낌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더 줄 수 있습니다.
토론을 위한 질문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무엇을 경험하였습니까? 어떠한 감정의 변화를 느꼈습니까? 선명하게 떠오른 형상들이 있습니까? 어떠한 느낌을 가졌고, 그러한 느낌들이 어떻게 변화하였습니까? 그들이 그러한 행동을 한 동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본문은 바디매오라는 이름을 가진 시각 장애인이 자신의 소원을 말하고, 사람들이 힘으로 그이 외침을 억누르려 하자 더욱 크게 소리 지르는 모습에서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우리는 언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 적이 있습니까? 제자들과 같이 누군가 자신들의 원하는 것을 요청할 때 그들을 잠잠하게 만들려고 노력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소외된 목소리를 향하여 서서 귀를 기울였습니까?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우리의 소원을 마음대로 가정하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 가정한 적은 언제입니까? 이러한 경우들은 건강하거나 온전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도전을 줍니까? 개인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직이나 국가들은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고치거나 “바르게 하는 것”, 아니면, 관계나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 치유입니까? 바디매오가 시력을 회복한 것 말고 무엇을 예수님께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말씀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어떠한 믿음을 보여주었습니까?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 되었던 경험은 무엇이며, 여전히 “평안”하고, 나누거나 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도전을 받으며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러한 은사들을 나누어 준 것을 어떻게 수용했습니까?
실천하기
바디매오는 길 가에 있었고,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당시 자신이 살고 있던 사회의 주변부에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의 공동체와 교인들, 나아가 이 세계에서 주변부에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환영받지 못하게 하는 가시적이고 불가시적인 장애들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묻는 것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그룹이 이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보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다음 모임에서 그 정보를 공유하도록 하십시오.
폐회기도
오, 하나님, 주님의 돌보심과 자비의 범주가 확장하기 위하여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고쳐주시고, 도와주옵소서. 우리를 성숙하게 하셔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사용하여 우리의 관계와 사회 속에서 치유자가 되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겸손함을 주옵소서. 온전함을 향하여 함께 가는 우리의 여정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아멘.
배경
이제 “기적적인 치유”의 이야기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 절름발이나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나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어떠한 대접을 받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사회의 주변부에서 소외된 삶을 살았을 것으로 가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장애를 죄의 결과로 연결시키고 치유를 온전함과 거룩함, 믿음을 갖는 것으로 연결짓는 시대 상황에서 이러한 가정은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환영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원하는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들은 때로 비유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을 인식의 새로운 발전으로 말하는 것이 그러한 예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당시의 사회적 규범에도 도전이 되었습니다. 주변부에 소외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은 바디매오와 예수님의 만남의 예수님께서, 당시 정치적, 종교적으로 가장 제국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행한 기적으로 소개함으로 그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들이 만일 육신적으로 건강한 것만이 “온전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건강한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들을 읽을 때, 예수님께서 왜 보다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변화를 이루지 않고 개인적으로 만난 몇몇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신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모두 서로 나눠야 할 은사들과 서로 가르쳐야 할 교훈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수용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태도나 가정, 행동들이 육신의 한계를 가진 사람들이 임시적이나마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육신을 “온전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배타성과 부주의, 타인을 강제하는 억압 등의 사회적 “질병”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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