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아카이브

[차정식] 엘리베이터 속의 낯선 시선

길위의 신학


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한 달 전쯤 내가 사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천정 모서리에 낯선 화면이 하나 설치되었다. 이 물건을 전문용어로 뭐라 부르는지 잘 모르겠는데, 컴퓨터 모니터 크기의 화면 속에는 오늘과 내일의 날씨, 주식과 환율 시세, 오늘의 주요 뉴스와 이런저런 광고 선전 등이 흘러 다니고 있었다. 거기에 등장하는 한 관능적인 표정의 여자모델은 매일 바뀌는 날씨나 주식시세의 자료와 달리 지속적으로 등장하여 고혹적인 눈빛을 종종 쏘아대면서 그 화면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강렬하게 호소하는 느낌을 준다. 그 야릇한 느낌을 즐기면서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습관처럼 그 화면을 흘깃 쳐다보곤 한다. 그렇게 세상의 근황을 챙기고 내가 내리는 층까지의 10초가 채 못 되는 짧은 시간의 무료를 달래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서로 친밀감을 나누고 소통하면서 문안을 주고받거나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제한된 공간의 짧은 시간은 뭔가를 이드거니 나누고 대화하기엔 썩 넉넉하고 편리한 환경은 아니다. 그래서 뭘 함께 나누기도 부적절하고 그렇다고 아무런 말없이 침묵으로 서로의 시선을 퉁겨내기도 어색한 노릇이다.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고서도 낯선 타자의 시선이 불편하여 꼭 졸리지 않아도 눈을 감고 명상하는 돌부처가 되거나, 대수롭지 않은 신문지면 같은 곳에 시선을 박곤 하지 않는가. 물론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는 이웃하며 사는 사람들이라 친소관계에 따라 인사의 메시지가 길어질 수도, 전혀 모른 척 한눈을 팔며 딴청을 부릴 수도 있을 테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의 전자공간이 만들어놓는 화면이 그 어색한 시선을 받아주는 천정의 구원 공간으로 매달리면서부터 우리는 이제 서로 마주서거나 엇비슷하게 몸의 거리를 좁히면서도 아무도 없는 것처럼 처신하는 불편함을 해소하게 된 것이다.

눈이 마음의 창으로 시적인 형이상학을 대변해온 내력은 매우 장구하다. 그러나 근대 이후 시선이 담아내는 억압적 폭력성이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아주 애틋한 연인이 아니고서는 눈빛으로 교감하는 즐거움을 덮어버렸다. 아니, 그것은 즐거움은커녕 견디기 힘든 고문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 내면의 억압된 심리를 절묘하게 조형해내는 데 장기가 있는 작가 최수철이 언젠가 그의 중편소설 <시선고>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도 바로 이런 억압된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뜨악한 시선의 충격과 함께 폭력성으로 전이되는가 하는 점이었다.

신학자 본회퍼는 그의 미완성 유고 한 페이지에서 인간의 시선이 상대방의 시선을 곱게 받아내지 못한 채 그 눈의 아래 부위로 쳐지는 현상과 관련하여 인간의 원초적 죄의식을 상기시켜준 바 있다. 그 죄악의 무의식적 기억과 함께 자기 내면의 온갖 감추고 싶은 욕망을 이 마음의 창을 통해 드러내어 들키지 않으려는 동기가 그 어긋나는 시선 속에 나름의 사연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이러한 사연을 알고서 그러는지 언젠가부터 내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모서리에 매달린 인공 화면의 시선은 그런 미묘한 사람의 시선과 달리 부담 없이 얼마든지 우리의 시선을 받아준다. 유익한 일상의 정보와 함께 매혹적인 여자 모델의 고정된 시선을 통해 우리가 가상공간에서 아름다운 사람과 가볍게 눈 맞춤의 연애를 은밀히 즐길 수 있는 배려도 제공해준다. 이는 사실 전혀 새로운 경험이 아니다. 대중들은 이미 많은 시간을 제 핸드폰과 요즘 여기서 한층 더 진화한 스마트폰의 액정화면에 제 시선을 꽂고 살아가면서 저만의 환상적인 유희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처럼 익숙한 것들의 동일성을 통해 우리 시선의 부담은 한층 완화되고 굳이 마음에도 없는 인사치레로 주변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만큼 우리의 한눈팔기는 성공적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제 눈으로 응시하는 모니터와의 교감 빈도와 강도가 높아짐에 따라 더 편리한 허공의 안식처를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와중에 잃게 된 것은 낯선 타자의 세계를 모험하려는 용기이며, 낯선 시선의 억압적 부담을 무릅쓰고 살아 있는 인간과 소통하려는 섬세한 타자의식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익숙한 경계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듯이, 그 경계를 넘어서면서 창조적 불화의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 것으로 실현하려는 믿음이 점차 둔화되거나 무력해지는 것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깥의 세속을 환기시켜주는 모니터의 얼굴과 그 화면 속 여자모델의 은근한 시선은 가공된 낯섦의 연출이 어떻게 상투적인 친밀감으로 전이되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새로움이 어떻게 박제화된 화면의 시선 속에 순치되는지, 또 어떻게 그 기계문명에 접속된 인간을 위로하는지도 엉큼하게 암시한다. 그 모니터 속의 낯선 시선은 기술문명의 미덕을 살려 우리가 겪는 각종 시선의 폭력을 제거하는 척하면서 생동하고자 하는 의식을 마비시킨다. 그 위장된 시선의 장막 뒤에는 아무것도 꿈틀거리지 않는다.

결국 자기동일성의 반복과 회귀를 통해 마비되는 의식 가운데 이 시대의 나르시스적 시선들은 제 울타리 안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조용히 산다. 그렇게 서로를 적당히 외면하며 감추고 기만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분장된 유아론의 복음을 일상 가운데 선포하며 또 그 꾸며놓은 진정성을 스스로 확인하며 사는 것이다. 그 삶이 은총일 수 있을까? 나는 무심코 묻지만 냉큼 긍정의 답을 내놓기 어렵다. 그 인간의 미래가 얼굴 없는 괴물처럼 떠오르는 환상이 그 모니터의 천연덕스런 정보와 이미지 위로 그로테스크하게 겹쳐지기 때문이리라.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AI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

옥스퍼드대 수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존 레녹스(John Lennox) 박사가 최근 기독교 변증가 션 맥도웰(Sean McDowell)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간「God, AI, and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여성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도 계승해야"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가 「한국여성신학」 2025 여름호(제101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서방교회와는 다르게 동방교회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극단적 수구 진영에 대한 엄격한 심판 있어야"

창간 68년을 맞은 「기독교사상」(이하 기상)이 지난달 지령 800호를 맞은 가운데 다양한 특집글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1945년 해방 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경재 교수는 '사이-너머'의 신학자였다"

장공기념사업회가 최근 고 숨밭 김경재 선생을 기리며 '장공과 숨밭'이란 제목으로 2025 콜로키움을 갖고 유튜브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