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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은혜와 사랑 때문이지만 또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에게 회개와 믿음과 사랑과 눈물과 헌신과 섬김과 희생과 소망과 같은 값진 영적 유산을 물려준 신앙의 선배들 때문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값진 영적 유산을 물려주신 고마운 분들 중의 한 분이 한국의 무디라고 불리던 이성봉 목사님이셨습니다. 저는 주일 성수와 예배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11살 때인 1948년 8월 부모와 고향을 떠나 38선을 혼자 넘어 서울로 왔는데 2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피난 시절 대구에서 3년 동안 중학교를 다닐 때 이성봉 목사님께서 몇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저는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를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하곤 했습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를 빨아 먹듯이 온 몸으로 받아드리곤 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와 감동을 받곤 했는지 모릅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회개하고, 새벽기도를 하라고 하면 새벽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라고 하면 철야기도를 하고, 성경을 암송하라고 하면 성경을 암송하고, 안수기도를 받으라고 하면 안수기도를 받고, 이성봉 목사님이 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금요일 철야기도를 마치고 토요일 새벽 안수기도를 받을 때는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 드리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저를 알아보시고는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 되는 거지. 고놈 기특하다” 라고 칭찬해 주시면서 기도해주시곤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회개의 메시지는 저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었고, 은혜 사모의 메시지는 저의 삶을 지탱하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새벽기도와 은혜 사모의 영적 유산을 보물로 물려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서울신대 성봉 기념관 강당에 와서 기념강좌를 하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이성봉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통일과 십자가의 영성”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시작합니다. 우선 인간의 죄는 분노와 증오와 분쟁과 저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은혜는 긍휼과 용서와 화해와 통일과 축복으로 나타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창4:5-8은 가인의 죄가 분노와 증오와 분쟁과 저주로 나타난 것을 기록했습니다. 창27:41은 에서의 죄가 분노와 증오와 분쟁과 저주로 나타난 것을 기록했습니다. 창33:1-10은 하나님의 은혜가 야곱과 에서간의 긍휼과 용서와 화해와 축복으로 나타난 것을 기록했습니다. 겔37:15-17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에스겔의 사역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이 화해와 통일을 이루게 될 것을 기록했습니다. 사19:23-25은 이스라엘이 원수였던 애굽과 앗수르와 화해하고 교류하며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엡2:11-18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서로서로 원수 되었던 인간들이 서로서로 화해하게 된 것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갈3:28도 모든 인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을 선언했습니다. 엡1:10과 계7:9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계와 온 우주가 즉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통일 될 것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십자가의 영성을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영성이고 그리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영성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진정한 화해와 통일로 가는 길은 십자가의 영성을 지니고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화해와 통일로 가는 길목에는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죽음의 영성이 있어야 하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영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해와 통일은 하나님의 뜻과 비전입니다. 화해와 통일은 성경의 목표이며 완성 점입니다. 남북 통일은 물론 모든 민족과 세계와 우주의 통일은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고 성경의 목표이며 완성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 하나님의 뜻이고 경륜이고 예정이라고 선언했습니다(엡1:9,1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룬 궁극적인 사역은 죄인들과 하나님과의 화해와 화목과 하나됨 그리고 죄인들과 죄인들간의 화해와 화목과 하나됨이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3-16).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축복하시는 목적이 “땅의 모든 족속”의 구원과 축복에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지금은 원수 지간인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수르가 언젠가는 서로 왕래하고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며 세상에 복이 된다고 예언하셨습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찌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사19:23-25). 선지자 에스겔에게는 그의 손 안에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가 될 것을 예언하시며 분부하셨습니다.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37:17). 우리가 남북이나 세계의 통일을 논하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통일이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고 성경의 목표이며 완성 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통일이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기억하면서,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들이 살아야 할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삶과 그리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즉 십자가의 영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 집착입니다. 자기 가문, 자기 지역, 자기 민족, 자기 나라에 집착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적 본성입니다. 그래서 버리고 떠나며 항복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떠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소유와 지위를 버리는 버림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그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 마자 부모와 고향의 품을 버리고 떠나는 버림과 떠남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40세부터는 바로와 공주와 제 2의 고향 애굽을 버리고 떠나는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80세부터 120세에 이르기까지는 동족과 심지어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세 번의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훈련을 받으므로 결국 인류 구원과 화해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사실 인류의 구원과 화평과 통일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삶을 사셨고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떠나셨습니다.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항복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삶을 사셨고 그리고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버리시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하늘 영광 떠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님 섬기러 오신 주님 우리 위해 죽으셨네 종 되신 왕 우리 하나님…” (From heaven you came helpless babe. Entered our world your glory veiled.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give your life that we might live. This is our God the servant king…).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구원과 화평과 통일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삶을 사셨고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 중에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삶을 산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성 프랜시스였습니다. 프랜시스는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청빈과 약함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재산도 평안한 삶도 세상의 향락도 아버지로부터의 상속권도 아버지도 모두 버린 채 한 평생 가난과 청빈과 약함의 삶을 살았습니다. 프랜시스는 자기는 가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다고 선언하며 절대 청빈과 완전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하는 평화의 사도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목에는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약함의 삶이 있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장기려 박사님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버림과 떠남과 항복과 약함의 삶을 사셨고 무소유로 가난하게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이분들만큼 화해와 통일과 평화로 가는 길을 탄탄하게 닦아놓은 분들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삶은 우리들로 하여금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삶을 사신 우리 주님께서 결국 십자가 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나타내 보이셨고 구원과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이고 성경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운명과 삶을 변화시킵니다. 저주가 축복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원수 맺음이 화목으로 이기적 삶이 헌신의 삶으로 바뀌어집니다. 저는 십자가 복음의 특성을 네 마디로 요약해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달려서 죽은 십자가에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가 나타났습니다. 십자가에는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용서가 나타났고,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나타났고, 모든 종류의 죄인들과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화해와 평화가 나타났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엡2:4,5,13).
저는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신 분이 앗시스의 성자 프랜시스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복음을 우리 몸에 조금이라도 지닌다면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에 모슬렘이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나 증오나 저주는 자리 잡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본래부터 원수가 없었습니다. 기독교에는 본래부터 원수에 대한 미움도 증오도 저주도 없었습니다. 데모도 시위도 없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인권운동에도 있지 않았고 사회정의에도 있지 않았고 심오한 신학에도 있지 않았고 감동적인 설교에도 있지 않았고 고상한 윤리에도 있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어리석어 보이고 미련해 보이고 약해 보이는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복음을 우리 몸에 조금이라도 지닌다면 아무도 우리를 의심하거나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모슬렘이나 공산주의자들이 우리 한국교회를 의심하거나 경계하거나 두려워한다면 우리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복음을 우리 몸에 조금이라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경계하거나 두려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나 손양원 목사님이나 장기려 박사님이나 한경직 목사님을 경계하거나 두려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의심하고 서로 경계하고 서로 두려워하는데 어떻게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겠습니까?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남한의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과 신자들이, 우리 남한의 그리스도인 정치가들이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복음을 조금이라도 우리 몸에 지닐 수 있다면 남북의 관계는 곧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북한과의 대화와 관계를 여는 데는 사랑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2008년 1월 11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모임에서 고백한 일이 있었고, 2008년 12월 22일 한국선교역사기념관개관행사에 참석해서는 북한에 사랑을 베푸는 일 밖에는 다른 일이 없다고 저에게 말하면서 우리 정부가 그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조용기 목사님에게 제가 심부름을 할 테니 북한 동포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함께 해 나아가자고 말했습니다. 십자가 사랑에 미치는 대신 돈에 미치고 경제에 미치고 정치에 미치고 부귀와 명예에 미친 우리 한국교회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한번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복음을 우리 몸에 지니고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남한과 북한과 아시아와 세계에 나타내 보이면서 전할 수 있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여!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들을 십자가의 제물들로 만들어주시옵소서!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통일로 가는 길목에는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삶이 있어야 하지만 그 삶은 반드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군적” 기독교는 이 세상을 분노와 증오와 저주와 갈등과 대결과 전쟁으로 치닫게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적” 기독교만이 이 세상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통일로 가게 만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천여 년 전에 선언한 선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아니 그 선언 이외에 유효한 선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3-16).
분노와 증오와 저주와 갈등과 대결과 전쟁으로 치닫는 이 세상에 화목과 화평과 하나됨과 통일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고 오직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 밖에 없음을 우리는 사도 바울과 함께 다시 새롭게 선언하고 그 길을 가려고 최선의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상에 나타난 비극적이고 신비하고 역설적인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사건을 나를 위한 사건으로 조용히 무릎 꿇고 받아드릴 때 우리들에게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체험하게 됩니다.
그 최초의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예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만을 알기로 고백하며 작정했고, 십자가만을 전하기로 고백하며 작정했고,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로 고백하며 작정했고, 십자가만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다니기로 고백하며 작정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그 후예들이 걸어간 십자가의 길, 통일로 가는 길, 버림과 떠남과 항복의 길,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길로 조금이라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은혜로 저와 여러분들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이루는 작은 제물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