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5 결국 ‘자기’가 문제의 핵심이다!Jul 16, 2015 03:40 AM KST

앞서 살펴본 대로, ‘인간’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종교의 문제들을 아무리 심도 있게 논해도 그 뿌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종교의 문제를 인간과 떼어 놓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가 표방하는 절대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런 경향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대체로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우리는 종교의 원론적인 차원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이상적이고 원리적인 이야기만 하니 그럴 듯 해보이기는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위나 정오를 판정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종교에 대한 많은 논의가 공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을 덮어놓고 종교만 살피려하기 때문입니다.

[하태영 칼럼] 하나님 없는 시대의 그리스도인Jul 07, 2015 11:32 PM KST

출애굽과 같은 불가능한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암울한 현실에서 가져볼만한 질문입니다. 출애굽기는 그 배경을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이라든지, 그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등 신화적인 방식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출 3:1-8). 이는 고대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저 불가사의한 이야기들 속에는 고대 사람들이 겪은 일들에 대한 상징체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상징들을 통해서 고대의 이야기들이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재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정재현의 신앙성찰] 그렇다면 ‘인간’은?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4 그렇다면 ‘인간’은?Jun 24, 2015 07:03 AM KST

앞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독실한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가당착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교회를 앞세운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그것도 내가 속한 교회만이라 하니 자기절대화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 교회나 그리스도교라는 범주를 기준으로 설정하는 것이 의도하지 않은 오류를 얼마나 심각하게 자아내는지를 진솔하게 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성경도 무슨 법전인양, 휘두르는 칼처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들이 아직도 생소하거나 여전히 꺼려진다면 멀리 갈 것도 없이 인간을 스스로 살펴봅시다. 나 자신을 보자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교회, 그리스도교, 성경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우리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비/의도적으로,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지요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3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에 대하여Jun 08, 2015 11:22 AM KST

교회보다 그리스도교가 더 크고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것이라고만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성서에 갇혀 계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럴 수 없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말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물론 이 구호는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뭘 어떻게 생각해? 당연한 거지!”라고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착실히 하시는 분들에게 교회와 구원의 분리불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언제나 옳고 당연한 것입니다. 아니라면 교회생활을 열심히 할 이유도 없겠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사에서도 이런 구호는 꽤 일찍이 등장했습니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중세 초기인 7세기의 키프리우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꽤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구호라고 하겠습니다. 이교도들과의 싸움을 위한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중세 절정기인 13세기 교황 보나파시오가 교회의 치리를 목적으로 이 구호를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대의 전환이 근세로, 현대로 넘어오면서 세상이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듯이 보이자 교회는 다시 빗장을 걸어 잠그듯이 이 구호를 재천명했습니다. 현대가 시작할 무렵인 1860년대에 열렸던 가톨릭교회의 제 1차 바티칸공의회에서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가톨릭교회는 그로부터 100년 뒤인 1960년대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이 고전적 구호를 폐지하고 현대로의 전환의 길목에서 근대적 방식으로 정책을 바꾸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구호는 가톨릭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니 개신교회의 경우도 이 선언은 포기할 수 없는 기조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개신교회가 이 구호를 오히려 더욱 목청 돋우어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한 교회가 전권을 쥐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2교회-그리스도교-성서-하나님의 관계May 26, 2015 09:44 AM KST

서로 다른 여러 종교들이 함께 있는 오늘날의 모습을 ‘다종교상황’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대해 살피기에 앞서 그리스도교 안에서 좀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뼈대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각도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핵심들을 추려본다면 교회, 그리스도교, 성서, 하나님, 이렇게 열거해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더 많은 핵심들을 말할 수 있겠지만 이들이 서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뼈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동의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넷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넷이 모두 같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미 차원이 다르니 액면 그대로 무조건 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적어도 소유 또는 귀속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고 보는 가장 일반적인 입장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만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고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경전으로서 그 수용과 해석의 권한이 전적으로 그리스도교에 속하며 그러한 그리스도교는 현실에서 교회로 결집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 넷은 등호(=)를 써서 ‘교회=그리스도교=성경=하나님’이라고 정리됩니다. 순서를 정반대로 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를 구성하는 요체로서 전부이며 그리스도교는 성경을 경전으로 채택하고 전수하는 권한과 의무를 지닌 독자적 종교이고 성경은 하나님을 이 세상에 알려주는 유일한 계시 또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대단히 돈독한 신앙으로 보입니다.

[기고] 케직(Keswick)운동의 영성②May 26, 2015 09:07 AM KST

1875년 7월 케직사경회(Keswick Convention)는 “성경적 성결의 증진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모임”으로서 호수지역의 휴양도시 케직에서 열렸다. 옥스퍼드 집회에서 크게 은혜를 받고 “안식하는 신앙”(resting faith)을 경험한 성공회 참사회 의원 배터스비(Thomas Dundas Hartford Battersby)가 브라이턴 집회에서 케직사경회를 계획하였고, 다음해 1875년 7월에 그가 시무하는 케직 성 요한 교회의 목사관의 아름다운 뜰에서 작은 규모로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를 계획했을 때 그는 자신의 계획이 영구적이고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저택 부지에 수백 명을 초청했을 때와 비슷하게 생각했다. 이 사경회는 비공식적으로 소집되었고 집회운영은 “성령이 교회를 주관한다”는 견고한 원칙과 이에 반하지 않는 다른 규칙들에 대하여는 융통성을 발휘했다(Pierson, 신현수, 38).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1 ‘종교’와 ‘다종교상황’이라는 것May 16, 2015 09:07 AM KST

과학의 출현이 새로이 열었다는 근세를 탈종교화 또는 세속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중세 종교의 자리를 과학이 대신하여 인간을 더욱 확실히 잘 살게 해 줄 것이고 결국 인류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과학주의까지 치달아갔지만 그것은 곧 근세 붕괴의 서주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이 시작된 우리 시대인 현대는 아직도 엮어져가는 중이라 잠정적으로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앞선 근대와 연속적이라는 뜻에서는 ‘후기근대’이기도 하고 불연속적이라는 뜻에서는 ‘탈근대’이기도 할 것입니다.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는 우리의 시대에 종교의 퇴조를 여러 모로 예견한 이들이 꽤 있었지만 세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종교의 운명을 그렇게 점쳤던 말들이 딱히 맞아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굳이 즐거워할 일만도 아닌 것은 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무종교인들이 그 어떤 종교인보다도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것도 엄연히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강남순 노트] 이론은 실천이다: ‘연장’으로서의 이론May 02, 2015 07:59 AM KST

내가 강의시간에 또는 강연을 할 때에 거의 언제나 받는 '단골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이론과 실천/운동' 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이번학기 데리다 세미나를 하면서, 마지막 시간에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데리다 '이전'과 '이후'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수의 학생들이 데리다의 해체이론이 얼마나 자신들의 구체적인 사유방식을 바꾸게 되었으며, '실천적'인가를 '고백'하였다. 자신들이 신문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 정치적인 이슈들에 대하여 스스로 비판적 해석을 하는 방식등 참으로 구체적인 실천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데리다를 공부하는데에 그러한 실천적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평소에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나로서는 이러한 학생들의 경험을 듣는 것이 즐거운 일이다.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단골 질문'을 받을 때, 내가 답변하는 내용을 간략하게(?) 이 공간에 나눈다

[시론] 선물(膳物), 촌지(寸志), 뇌물(賂物)Apr 18, 2015 06:37 AM KST

1960년대 말, 선친께서 목회하던 교회에서 부흥사경회가 있었다. 마지막 집회 때 부흥사는 “목사에게 양복을 선물하면서 자기 이름을 안주머니에 새기면, 목사가 그 양복 입을 때마다 선물한 사람 위해 기도할 것”이라고 하면서, 양복을 선물할 사람이 있으면 손들라고 했다. 부흥강사는 세 벌을 선물받았고, 덕분에 가난하게 사셨던 선친도 새 양복 한 벌을 입으셨다. 선친께서 소매 끝이 닳을 때까지 입으셨는데, 양복을 입을 때마다 선물한 교인을 위해 기도하셨는지는 모르겠다.

[하태영 칼럼] 물질에 중독된 시대Apr 10, 2015 11:46 PM KST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물질이 꼭 필요합니다. 아무리 궁핍한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물질은 있어야 합니다. 연전에 성철 스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물건으로 일생동안 입고 사용한 누더기 옷 한 벌, 지팡이 하나, 고무신 한 켤레 이렇게 세 가지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가를 대변하는 유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가난하게 산 사람도 최소한의 물질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일생 동안 먹은 밥만 해도 상당량일 것입니다.

[김영한 칼럼] 십자가 안에서 세상 고난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Apr 02, 2015 08:16 AM KST

사순절의 절정에 이른 고난주간이 진행되고 있다. 이 고난주간은 단순히 종교적 의미의 개인적 경건의 차원을 넘어서서 인간의 죄와 고통의 현장에 찾아와 주시는 고난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는 단순히 경건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와 고통 가운데 있는 전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강석찬 시론] 부활절 연합예배 꼭 드려야 할까?

[강석찬 시론] 부활절 연합예배 꼭 드려야 할까?Apr 01, 2015 01:04 PM KST

춘분이 지난 밤하늘에 만월을 향해 달이 차오르고 있다. 저 달이 차고 주일을 맞이하면 부활주일이다. 지금은 고난주간, 부활주일이 다가온다. 교회력의 중심은 부활절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인 사건이다. 물론 하나님의 화육(化肉)사건인 성탄절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의 시작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부터였다. 첫 번 오순절 성령강림 후, 성령 충만했던 베드로의 설교의 주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였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의 존속이 가능했을까?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앙적인 행위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활절을 기억하며 지킨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다.

[강남순 노트] 무수한 선택들과의 대면Apr 01, 2015 08:57 AM KST

1.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상 무수한 선택과 결단을 알게 모르게 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눈을 뜨는 순간 부터 , 우리는 크고 작은 선택들과 우리는 늘 대면해야 한다. 독일인 비행조종사가 자신만이 아니라 150여명의 사람들의 생명까지 함께 죽음으로 모는 '선택'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종교와 신의 이름으로 끔찍한 폭력과 증오와 살상을 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독일 비행사의 '선택' 이야기를 뉴스로 들으며, 그 끔찍한 선택 이야기를 지우고 싶어서 일까...다른 종류의 '선택'에 대한 최근 이야기를 떠 올린다. 나의 학생의 '선택,' 그 선택 앞에서의 선생인 나의 '선택,' 그리고 그 학생과 내가 함께 한 '공동의 선택' 이야기이다.

[강석찬 시론] “윤동주(尹東柱)”Mar 17, 2015 08:34 AM KST

윤동주,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北間島)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복강(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늑탈(勒奪)되어 나라와 땅과 말을 빼앗기고 이름을 바꾸어야만 했던 수치와 고난을 당한 우리 민족이 해방되는 날을 겨우 6개월 앞두고 28살의 청년문사(靑年文士)로 생명의 시간이 멈춘 시인(詩人)이다. 그를 민족시인, 저항시인이라 부른다. 시인의 조카사위인 시론자(時論者)는 윤동주를 신앙시인(信仰詩人)이라 생각한다. 그의 이름을 가만히 부르면, 시인이 24살에 쓴, 서시(序詩, 1941.11.20)의 구절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 마음 밭에 씨앗이 되어 싹이 튼다. 시인은 이 한 구절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았다. 하나님 앞에 선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백했다. 시(詩)만 쓴 것이 아니다. 윤동주는 자신이 쓴 시(詩)를 몸으로 살았다. 그래서 그의 시 앞에 서면, 그의 맑고 향기로운 영혼처럼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난다.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지났어도 윤동주는 이 “때”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다.

[김경재 칼럼] ‘DMZ 가로질러 걷기 세계여성운동’ 소식을 듣고Mar 12, 2015 11:11 AM KST

꽃샘추위가 한바탕 심술을 부리고 지나간 3월12일 아침 신문에 반갑고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가 떴다. 노벨 수상자 여성 2명을 포함한 세계 여성들 30여명이 다가오는 생명의 달 5월에 한반도의 비무장지대(DMZ)를 상징적으로 가로질러 걸어감으로써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기 위한 평화정책 이니시어티브를 시작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행사의 공식 명칭은 (Women Cross DMZ)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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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니체의 허무주의란 무엇인가?

"니체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오늘 우리의 세계는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무-진리, 무-가치, 무-의미, 무-도덕이 인간의 세계를 지배한다. 하나님 없는 인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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