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용기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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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26:3-7, 고린도전서 16:13-14, 마태복음 26:41

설교문

사람은 강해지길 원합니다. 약해지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게 강해질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인간의 모든 역사의 모든 시기에 물었던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더 간절히 묻는 질문입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본문인 고린도전서 16:13-14절은 사람이 어떻게 강해질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사도 바울의 유명한 두 구절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강건함'은 남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므로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 성서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 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바울은 사람을 진정으로 강하게 만드는 데 네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깨어 있음, 둘째로 믿음, 셋째로 용기, 그리고 넷째로 사랑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합할 때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간과하지만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주목한 것처럼, 바울은 이 구절에서 여러 번 "되라"(be)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폴 틸리히, 『영원한 지금』 참조). "Be watchful"(깨어 있으십시오), "Be courageous"(용감 하십시오), "Be strong"(힘을 내십시오), 그리고 "Let all that you do be done in love"(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바울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이 "되라"라는 동사를 주목해야 합니다. 영어의 "be" 동사는 무엇이 '있다' 혹은 '존재하다'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되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아닌 어떤 존재가 되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 자신이 되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에게 그가 이전에 아니었던 무언가가 되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 되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이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나무에게 쇠기둥이 되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풀에게 나무가 되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가시나무에게 열매를, 잡초에게 곡식을, 마른 샘에게 물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냉담한 자에게 사랑을, 비겁한 자에게 용기를, 혹은 연약한 자에게 힘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은 존재에게 그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 존재는 우리를 비웃거나 비난할 겁니다. 우리는 어떤 무엇에게나 혹은 어느 누구에게나 단지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으라거나 혹은 그가 그 자신이 되라고 요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씨앗이 여러 종류의 땅에 떨어져 그중 오직 하나의 땅에서만 열매가 맺히는 것에 관한 비유가 나옵니다.(마태 13:1-8) 청함(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뽑힌 사람)는 적다는 말씀도 나옵니다.(마태 22:14)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기리라는 무서운 말씀도 나옵니다.(누가복음 19:26) 빛에서 태어나 빛의 자녀가 되는 자들과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의 자식들이 되는 사람들 사이의 대조도 나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 에베소서 5:8) 그리고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무엇을 만드시든 그분에게 맞설 수 없는 진흙과도 같은 인간에 대한 비유도 나옵니다.(로마서 9:21-24) 이 구절들을 근거로 목사님들은 이렇게 설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는 성취하고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나 모두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그 기회를 잘 사용하고, 어떤 이들은 게을러서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의 운명은 그러므로 자기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봐서 압니다. 기회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과정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정의롭지 않습니다. 이미 강하기 때문에, 이미 옥토에 심겼기 때문에, 이미 빛에서 태어난 자녀이기 때문에 '강건하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강한 체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아닌 존재라 스스로 속이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당신 자신이 되고자 한다면, 당신의 약함은 당신의 강함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른바 '흙수저'인 사람들에게 '당신이 약자인 걸 받아들이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겁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겁쟁인 걸 받아들이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믿음이 갈대와 같이 흔들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 사랑"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당신이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상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에 대해 또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겁니다. 강해지기 위한 첫걸음은 자신의 약함을 시인하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기만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것이 정직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든, 선생님이든, 상담가든, 목회자든 아무도 누구에게 거침없이 무엇이 "되라"(be)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라는 요구는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린도후서 13: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약해지셨습니다. 인간의 약함에 참여하기 위해 스스로 약해지셨습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신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연약한 백성은 구하여 주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십니다"(시편 18:27)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약한 자에게 강한 자라 되라고, 될 수 있다고 강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로마서 5: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에게 왜 강한 자가 되지 못하느냐 다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우리의 약함에 참여하셔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이사야 53:4)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이사야 42:3) 자비로운 하나님은 성과를 내기 위해 다그치는 폭군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깨어 있으라"(Be watchful)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태복음 26:41)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에 깨어 있으라는 말입니까? 사람이 진정으로 강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강함 안에 약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강함 안에 약함이 존재합니다. 용기 안에 비겁함이 존재합니다. 모든 신앙 안에는 의혹과 불신앙이 있습니다. 모든 사랑 안에는 증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한 자는 자신의 강함에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의 사랑을 과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캐롤 위머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구원받은 자임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죄인이었음을 속삭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선택했다고. / 교만한 마음으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실수하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 강한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힘주시기를 기도한다고. / 성공했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했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 빚을 다 갚을 수 없다고 /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혼란스러움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구한다고. / 온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많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믿는다고. / 삶의 고통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몫의 고통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찾는다고. /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권위가 내게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을 뿐이라고."

교우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강한 자라고 스스로 생각할 때, 혹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때, 깨어 있으십시오. 자기의 강함 안의 약함을 보지 못하는 강함은 진정한 강함이 아닙니다. 자기를 제어할 능력이 없는 강함은 진짜 강함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내 안의 숨은 약함에 정직하지 않는다면 그 약함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증오와 폭력의 활화산으로 터질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강한 자라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혹은 주변 사람들이 그렇다고 이야기한다면 깨어 있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에게 당신처럼 되라고, 또는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라고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의 강함으로 그들을 파괴할 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둘째로 믿음 위에 굳게 서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대개 강한 확신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 확신 위에 자기 인생의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 위에, 우주 만물을 지탱하고 있는 영원한 터전 위에 자신을 세우라고 말합니다. 흔들리고 변화하는 터전들이 아니라 그 흔들리고 변화하는 모든 터전들 아래 놓여 있는 '궁극적인 터전' 위에 인생의 집을 세우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지진이 나고 홍수가 나도 그 집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견고하고 영원한 터전 위에 세운 집이 진정으로 강한 집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이런저런 터전들이 아니라 그런 터전들을 놓으시고 그것들을 흔드실 수 있는 분 위에 서야 합니다, 시편 102편 기자는,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편 102:25-27)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바로 이 '영존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모든 터전의 터전,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터전, 우리의 '존재의 근거'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노래하는 것처럼 이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반석"(이사야 26:4)입니다. 시편 62편 기자의 아름다운 노래처럼,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할]"(시편 62:6)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진정한 강함에는 '용기'(courage)가 포함된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본문에서 "남자답게 강건하라"(13절)라는 구절은 "용기 있는 사람이 되라"(be person of courage)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용기는 무엇입니까? 그가 말하는 용기는 어떤 용기입니까? 혹 내가 큰 믿음을 가지고 높은 성벽 위에서 뛰어내려도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명하시어 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해주시리라는 그것이 용기일까요? (마태 4:6, 누가 4:9 참조) 바울이 말하는 용기는 자기 내면의 분열로 인한 '근심을 짊어지는 용기'입니다. 인간은 분열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근심과 염려와 불안으로 쪼개져 있습니다.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좌절감과 수치심과 분노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한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에서 최근 5년간 우울증 환자는 35.1%가 증가하여 90만 명이 넘었습니다. 불안장애 환자는 32.3% 증가하며 90만에 육박합니다. 환자의 증가 폭이 가장 컸던 연령대는 모두 20대입니다. 그중 여성이 남성보다 1.6~2.1배나 더 많습니다.(경향신문 2022.6.25.) 지난 17년 동안이나 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의 자살률은 2001년에서 2011년까지 10년 동안에 무려 100%가 증가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자살은 10대, 20대, 30대 모두의 '사망 원인 1위'입니다 또 40~50대의 사망 원인 2위입니다.(시사저널, 2022.7.9.) 한국사회가 그리고 한국인의 영혼 깊은 내면이 좌절감과 수치심과 분노와 근심, 불안, 염려로 깨지고, 쪼개지고, 상했습니다. 깊이 병들었습니다. 누군가는 남을 '용감하게'(?) 혐오함으로 혐오하는 그 순간만큼은 혐오 당하는 타자들을 짓밟으며 잠시나마 존재의 의미와 우월감을 회복하려 들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는 '성경은 무오하다'라고 외치며 남을 정죄하면서 '성경을 해석하는 나는 무오하니까 내 말에 절대복종하라'라는 맹목적 믿음으로 자기의 근심과 불안과 약함을 회피하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용기는 자기의 분열에 대한 근심을 짊어지는 용기입니다. 자기 내면의 어두움을 직시하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을 남에게 투사(投射)하지 않고 스스로 품을 수 있는 용기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진정한 강함입니다. 모든 강함 안에 약함이, 모든 용기 안에 비겁함이, 모든 신앙 안에 의혹과 불신앙이, 또 모든 사랑 안에 증오가, 모든 빛 안에 그늘이, 그리고 모든 존재 안에 비존재(非存在)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진짜 용기입니다. 그 용기로부터 가장 위대한 강함이 나옵니다. 그 용기로부터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 진정한 강함이 나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용기는 나와 같은 존재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영원하신 그분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졌음을 과감히 받아들이는 용기에서 나옵니다. 빛과 어두움이 혼재하는 나와 같은 존재가, 사랑과 증오를 오가는 나와 같은 존재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게 하시며 모든 어두움과 증오와 같은 비존재를 품어 새 존재가 되게 하시는 그분에게 내가 열납되었음을 인정하는 용기로부터 나옵니다. 시편 19편 기자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편 19:14)라고 노래했습니다. 여기서 '열납되다'(be acceptable)이라는 말의 뜻은 '기쁘게 받아들이다'입니다.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진정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진 경험은 햇볕과도 같다"라는 말이 있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우리의 존재를 열납하십니다. 무엇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무엇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오늘 부른 찬송(214장)처럼 "내 모습 이대로" 그냥 긍정하시고 기뻐하시고 받아주십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라는 20세기의 대(大)신학자는, "기독교의 복음을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도 받아주셨다는 이 한마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분열과 단절과 분리와 정죄의 공포가 가득한 곳에 우리를 기쁘게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칩니다. 무기력과 무의미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엄습'(掩襲, 불시에 찾아옴)합니다. 내가 갈망하던 살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아 절망이 내 목을 짓누를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천국처럼 '침노'(侵擄 - 마태 11:12)합니다. '너는 용납되었다'라고, '너는 열납되었다'라고, '너는 너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라고 선포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을 용납하게 됩니다. 자신을 용서하게 됩니다. 자신의 어둠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은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Let all that you do be done in love)라고 말합니다. 깨어서,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용기를 내래가 바울이 말하는 전부가 아닙니다. 거기에 그는 사랑을 덧붙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사랑에 예속시킵니다. 왜 바울은 이 한 구절을 특별히 덧붙였습니까? 우리는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강한 사람들의 모습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늘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무언가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람들은 친절하기도 하고 기꺼이 남을 도우려 합니다. 자신에게 스스로 이런 태도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종종 자기에게 요구하는 걸 다른 이들에게도 요구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요구한 것처럼 다른 누군가에게도 주저 없이 무엇이 "되라"(be)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되지 못하면 비난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개인적인 강함을 통해 폭군처럼 됩니다. '사랑 없이 강한 자'는 약한 자들에게 율법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율법은 약한 자들을 옭아맵니다. 약한 자들을 더 약하게 하고, 주눅 들게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더 가난하게 하고 비첨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없는 강함'은 폭력입니다. 그 폭력은 우선 다른 이들을 파괴하고 반드시 자기 자신도 파괴합니다. 사랑 없는 강함은 분리와 정죄와 심판과 통제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분열된 것을 하나로 만드는 힘입니다. 모든 깨어진 것들을, 모든 쪼개진 것들을, 모든 상한 것들에게 다시 잇고 다시 붙이고 다시 회복시키는 힘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의 힘입니다. 성경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몸을 부숴 피 흘려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습니다.(고린도후서 5:18-19)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약함과 인간의 고통에 참여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로마서 5:6)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린도전서 1:18)이라고 했습니다. 이 능력이 진정한 강함입니다. 이 사랑이 진정한 강함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약해지셨습니다. 스스로 낮추시고 자신을 비우시어 우리의 약함에 참여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린도전서 1:25)라고 증언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강한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약하고 무기력한 사람이 아니라 불안과 분열과 근심과 정죄의 공포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오늘 바울의 짧은 외침에 귀 기울여보십시오.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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