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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심(詩心) 잃은 설교는 종교독이 될 수 있다
김경재 박사(한신대학교 명예교수, 혜암신학연구소 편집고문)

입력 Aug 01, 2022 09:36 P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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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지유석 기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목사는 '시인'이어야 한다 (김재준)

장공 김재준 목사(1901-1987)가 82세가 되던 해에 쓴 짧은 글 <목사의 심정>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무엇보다도 목사는 '시인'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김재준의 진보적 신학 입장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험난한 한국 기독교사와 한국역사 현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老將)의 조언이니 누구든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강단에서 설교 임무를 담당하는 목사의 경우는 더욱 깊이 그 말씀 의미를 되새김해야 하겠다.

왜 목사의 자격규정 중에서 '시심'(詩心)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셨을까? 설교는 설교자의 개똥철학이나 인생관을 넉살스럽게 펼쳐내는 장마당이 아니다. 정통교리의 반복학습 시간도 아니고 도덕강론 시간도 아니다. 설교 시간은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카이로스 시간이다. 수십 년 혈루증에 시달리던 여인이 예수의 옷깃을 남모르게 만지고 싶은 생각이 나듯이(막5:25-34), 하나님의 옷깃을 만지고 싶은 심정이 우러나도록 돕는 간호보조사가 설교자이다.

설교는 본질적으로 성경말씀이라는 언어 속에 숨어 들어있는 생명의 빛과 은혜와 진리를 다시 새롭게 되살려내는 신령한 산파술이요 연금술이다. 출산을 돕는 조산원이나 연금술사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빛과 진리의 능력 속에서 설교자가 먼저 사로잡히고, 자기가 타향에서 살고 있음을 발견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자세로 맘을 다짐하고 청중에게 권고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본질은 시작(詩作)이고, 시인의 사명은 귀향(歸鄕)이다 (하이데거)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는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기독교 신학에게도 끼친 사상가이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의 핵심 문제가 '존재물음'(die Seinsfrage)이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철학에 대하여 잘 모르는 필자가 목사의 자격 규정으로서 시심(詩心)을 논하는 이 자리에서 그 철학자의 시론(詩論)을 잠시 언급하려는 목적은 철학자, 시인, 진정한 사상가, 그리고 성직자가 해야 할 일의 본질이 '존재물음'이고 '실존구조'를 밝히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사상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에게 우선 그의 철학 용어에서 자주 나오는 세 마디 철학적 어휘들 '존재'(Sein), '존재자'(Seiende), 그리고 '현존재'(Dasein) 그 셋을 구별해서 이해해야 한다. 쉽게 그 세 가지를 구별하면 '존재'는 이렇게 혹은 저렇게 있는 것들이 아니라 "있음 그 자체, 존재 그 자체, 순수존재"를 지시하는 어휘이다. 진리, 하나, 하느님 등과 같은 어휘이다. '존재자'란 형이하학적 물질형태로서나 형이상학적 이념형태로서나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기독교적 사유체계에서 말하면 모든 유한한 피조물을 의미한다. '현존재' 혹은 '현존'은 인간실존을 말하며, 자기 존재 곧 실존적 자기의 '존재론적 능력과 지반'(the power & ground of being/ Tillich)을 묻고 자기 안에서 직감으로써 느끼는 인간존재를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존재물음'에서 세 가지 존재 양태들은 다르지만, 결국 그것들과의 관계, 의미, 얽힘, 상호 원융회통을 질문하고, 이해하고, 언어로서 표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자는 바로 '현존재' 인간실존 그 자체 뿐이다. 진리나 하느님이 아무리 '절대적 초월자, 포괄자'라고 할지라도 인간실존 안에서 이해되고 감지되지 않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추상적 가설이 될 뿐이다. 인간실존은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자 거기(Da)에 신비자 존재(Sein/ 하느님)가 현전(現前)하기 때문에 인간실존을 '현존재'(Dasein)라고 부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로서 인간은 그러한 본래적 있음의 고유성과 깨어있음을 지탱하지 못하고 일상성에 매몰된 도구적 대상자, 정치ㆍ경제적 동물, 과학적 세계지배자, 심지어 철학적-종교적 우상 제작자로서 전락하고 타락하여 본래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 곧 '고향'을 상실한 자가 된다. 겉모습은 살진 돼지처럼 풍요할지 모르나 속은 춥고, 허전하고, 외롭고, 게걸든 동물처럼 항상 갖기와 먹기를 탐하고 불안하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인간학은 그 본질에 있어서 치열한 현상학적인 '존재론적 인간학'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신론(神論)이라고 증언, 변증, 서술하는 '신에 관한 도그마'들이 하이데거 비판적 통찰에 의하면, 인간이 규정한 하나님에 관한 이론들이어서 진지한 '존재물음'에 방해가 되고 종교적 우상놀이에 빠질 위험이 있다. 자기가 마치 하나님 되심을 지켜드리는 근위병처럼 행세하는 신학자나 목회자를 볼 때면 안쓰러운 맘이 든다. 대체로 그런 근위병들의 인간 심성은 메말라 있기 마련이고 정통신학 보관자로서 교만하고 형제비판을 일삼는다.

하이데거는 휄더린과 같이 말하기를 시인은 귀향(歸鄕, Heimkunft)의 노래로써 동시대인을 일깨워 시인적인 삶의 자리에로, 곧 고향으로 불러들이는 사명을 지닌 자이다. 고향은 지리적 어느 공간이 아니라 현존재가 하나님을 마음에, 몸에 모시고 사는 '충만하고 황홀한 지금 여기'인 것이다.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탕자의 귀향 비유'(누가15:1-32)는 집안 가산을 탕진하고 타락한 둘째 아들과 같은 도덕적 패륜아, 윤리적 타락자들을 회개시켜 교회에로 돌아오라는 '도덕적 설교'가 아니다. 그 아들의 본래 아버지 집, 곧 존재론적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귀향의 부름으로서 읽어야 한다. 아버지의 집 고향은 풍요롭고 따사롭고 정이 많고 웃음이 있는 곳이다.

시는 짓는 것이 아니라 낳는 것이다(함석헌)

시론(詩論)에서 서양철학의 하이데거 못지않게 깊은 경험과 통찰을 보여주는 한국의 사상가는 함석헌(1901-1989)이다. 1970-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시민사회 운동에 선구자 역할을 한 분으로서 함석헌의 공로보다도 시인으로서 그의 사상적 공헌이 후세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참된 시(詩)는 시인이 그의 문학적 역량을 가지고 시를 짓는 것(詩作)이 아니라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듯 수태하여 어린 아기를 낳는 행위와 닮은 것이고, 시인의 몸에서 시를 출산(出産)하는 것이라고 비유된다. 함석헌의 말을 들어본다.

시(詩)를 낳는다. 인생이라는 여죄수가 감방 안에서 아이를 낳는다. 사회, 교회, 가정 등등 그것들은 어찌보면 감옥이 아니냐? 그는 유화부인(柳花夫人)처럼 감방의 문틈으로 새어들어 오는 빛을 받아 남모르게 아기를 배었던 것이다. 이 세상은 분명 감옥이 아니더냐? 시를 낳았으면 그곳은 이미 감옥이 아니다. (시집 〈수평선 넘어〉 401쪽>

고구려 주몽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빌어서 함석헌은 시를 짓는 것은 일종의 초월적인 빛, 영감, 하늘의 정기를 받아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행위에 비유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은유를 하이데거가 말했는데, 존재 자체이신 신비한 진리, 생명, 하느님이 시인의 언어를 작은 집으로 삼고 그 안에 자기를 알 듯 모를 듯, 보일 듯 말 듯 현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언어는 비유 혹은 은유이며, 직접적인 설명문이 아닌 것이다. 특히 진리를 말하는 철학적 언어, 종교적 설교는 언어가 갖는 이중적 기능 때문에 늘 고통당한다. 진리를 드러내면서 기리우는 모순적 양면성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함석헌의 시 "비유"라는 시제(詩題)의 시를 음미해 보자.

드러내 놓으면서 숨김
숨기면서 드러내 놓음
가리움으로 보여줌
보여줌으로 가리움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있음
옅은 것 속에 깊은 것 들어있음
껍질 속에 들어있는 알
거짓 속에 들어있는 참

시간 속에 영원이 깃들었다
땅 위에 하늘이 내려와 앉았다
성령이 마리아의 뱃 속에 드셨다
말씀이 육(肉)이 되셨다

그것은 꽃 송이요
그것은 흐르는 시내요
그것은 비치는 호심(湖心)이요
그것은 음악이다.

설교를 담당하는 목사가 시인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는 말의 깊은 뜻은, 설교문장이나 표현이 문학적이거나 시작품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함석헌은 생각에는 "머리로서 하는 생각"과 "맘 샘에서 솟아나는 생각"이 구별된다고 말한 적 있다. 설교는 설교자의 영성의 샘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말씀의 영감이 떠오르는 것을 붙잡는다. 그래서 목사는 시인처럼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삶 속에서 그리고 성경 말씀 안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음성을 듣고 희미하게 비취는 진리의 빛을 심안(心眼)으로 붙잡아내서 생수와 같은 은혜로운 설교를 쏟아내야 한다. 성공적인 좋은 목사는 성경주석가나 교의학자이기 전에 시인이라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교리적 설교, 신학적 설교, 성경문자주의적 설교를 반복하면 교인은 서서히 '종교독'에 중독이 되면서 심령이 도리어 죽어가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그래서 장공이 말하기를 "목사는 항상 시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강조한 것이다. 생존하시는 최고령의 한국 신학계 문화신학자 유동식 선생은 이렇게 후배들에게 충고하신다: "예술이나 시를 모르는 종교나 신학은 바리새적인 율법주의가 되던지 천박한 감정에 휘둘리는 광신주의자가 된다."

한국 문단의 시인들 중에서, 구상(具常) 시인의 시작품 특성을 존재론적 성격이 짙다고 평론가는 말한다. 구상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세상에는 시(詩) 아닌 것이 정녕 하나도 없다.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것과 모든 일 속의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다가 시(詩)다." (〈造化 속에서〉 156쪽)

본 글은 혜암신학연구소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게재함을 밝힙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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