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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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창세기 12:1-5, 히브리서 13:10-15, 요한복음 14:27-31

설교문

장대익 교수가 말하듯이, 언제부턴가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턴가 나와 견해가 같은 사람들과만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SNS가 발달하면서 이 현상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러자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effect)가 일어났습니다. 반향실 효과란, 밀폐된 공간에서 말하면 내 소리만 들리는 현상입니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이야기하니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실 사람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내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면 불안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기가 믿고 있는 것과 일관된 생각을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만 귀를 엽니다.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 믿음과 다른 이야기는 '인지적 부담'을 가지고 점검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부담을 줄이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휴먼 네트워크 : 무리 짓고 분열하는 인간관계의 모든 것』(바다출판사, 2021)의 저자 매슈 O. 잭슨은 이걸 '동종선호' 현상이라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잘 뭉칩니다. 자신과 성향이 비슷할수록 상대를 예측하기 쉽고, 협력하기 쉬우며, 인간관계에 드는 스트레스가 줄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강력한 동종선호의 결과는 극심한 분열입니다. 나와 비슷한 것에 안정감을 느끼는 마음을 뒤집으면 곧 나와 다른 것에 불안감을 느끼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아주 작은 차이도 분열의 씨앗이 됩니다. 끼리끼리 모이고 섞이길 거부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이 사회적 비유동성을 키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비유동성이 사회적 불평등을 키울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요지입니다.

예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라고 말씀하시자, 이 말을 듣고 있던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즉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요한복음 8:33)라고 받아쳤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온갖 편견과 프레임에 스스로 노예가 된 것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장로들의 전통'으로 만들어 자기들은 의롭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정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마태 15:1-20, 마가 7:1-23) 현대 뇌인지 과학에서는 이런 것을 '변화맹'(change blindness)이라고 합니다. 자기 관심 영역 바깥의 상황이나 사물이 변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현상입니다. 미국의 한 대학 교수팀이 학생들에게 농구경기 영상을 보여주며 선수들의 패스 횟수를 세게 했습니다. 게임 중간에 고릴라 복장을 한 기괴한 인물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선수들 사이를 유유히 가로질러 지나가게 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절반가량은 고릴라의 출현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아니라, 알고 싶어 하는 만큼만 보이기 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영리한 존재라고 자부하는 인간의 뇌는 이렇게 잘 속습니다. 같은 것을 보고도, 또 같은 시공간 안에 있어도, 우리의 뇌는 각기 다르게 코딩된 정보를 접수하고 저장합니다. 그래서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아르테, 2017)의 저자 장동선 박사는 "뇌가 믿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뇌도 늘 속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합니다.

주중에 한 교우님께서 저에게 허향숙 시인의 <탄생>을 보내주셨습니다. 제가 어쭙잖게 종종 설교에 시를 인용하니 제대로 공부하라고 보내주시는 것 같아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허향숙 님의 시, <탄생>입니다. "시인이 그랬어 / 장미에 가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 가시나무에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 눈이 번쩍 떠졌어 / 고 정 관 념 / 자라면서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 사념들 / 곰팡이 포자처럼 / 은밀하게 침투한 편견들 / 벼랑이 파도를 놓치거나 / 구름이 하늘을 흐르게 하거나 / 향기가 바람을 흔들어 깨운다는 / 생각의 전이 / 통념을 벗고 새로운 / 관념으로 갈아입으니 / 세계가 낯설고 경이롭게 / 나는 다시 태어나 한 생을 얻네."

아마도 허 시인은 정호승 시인의 <가시>를 읽은 듯합니다.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 이토록 가시 많은 나무에 /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라"라고 한 그 시 말입니다. 필시 이 대목에서 허 시인은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관습적으로 생각하던 것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벼랑이 파도를 놓치거나 / 구름이 하늘을 흐르게 하거나 / 향기가 바람을 흔들어 깨운다는 / 생각의 전이[轉移]"가 일어납니다. 통념을 벗으니 "세계가 낯설고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는 다시 태어나 한 생을 얻"었다고 기쁘게 노래합니다.

저는 사진 작품을 참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다큐멘터리 사진을 매우 좋아합니다. 아쉽게도 코로나로 교회당에 오시지 못하지만, 혹 다른 일로 이화에 오실 일이 있으면 지금 대학박물관 앞 이화 아트파빌리온에서 열리는 대학교회 행정간사 김진선 선생의 사진전을 보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나를 멈춰서게 한 것들>이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회는 최근 재개발로 사라지고 있는, 혹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서대문구 북아현동과 마포구 염리동 일대를 발로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전시하는데, 이 전시회는 현대 음악가 이재구 선생이 작곡한 작품들과 함께 공유하는 <사진-음악 협업 전시회>입니다. 일찍이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그의 책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이 가져다주는 체험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두 요소를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스투디움은 사회적으로 인정된 전형적인 정보들로 프레임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어떤 것들입니다. 푼크툼은 이 프레임의 바깥에서 활보하는 낯설고 우연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푼크툼은 찰나의 번개와 같은 영감을 통해 울림과 감동을 주고 프레임 밖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줍니다. 김진선 선생의 작품들에는 좁은 골목의 오르막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마주친 고양이 무리, 사람들의 눈길이 잘 가지 않는 그늘 아래 핀 이름 모를 꽃나무들, 그리고 얽히고설킨 전깃줄 위의 참새와 비둘기들 등 '작가의 발걸음을 멈춰 서게 한 것들'이 나오는데, 바로 이것이 푼크툼입니다. 이 전시회는 우리의 익숙한 '프레임 바깥의 진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작자 미상의 시 <젊은 수도자에게>을 읽어봅니다. 왠지 이 전시회와 잘 어울립니다. "고뇌하는 너의 가슴속에만 /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 모든 마당과 / 모든 숲 / 모든 집 속에서 / 그리고 모든 사람들 속에서 /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 목적지에서 / 모든 여행길에서 / 모든 순례길에서 /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 (중략) / 마음속의 광명뿐 아니라 / 세상의 빛줄기 속에서도 / 진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 온갖 색깔과 어둠조차 /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 진정으로 진리를 본다면 / 진정으로 사랑하기 원한다면 / 그리고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 광활한 우주의 어느 구석에서도 / 진리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스페인에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라는 순례길이 있습니다. 보통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부릅니다. 과거에는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어 유럽의 3대 순례지로 번영했던 곳인데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 성당'까지 가는, 수백에서 수천 킬로미터의 여러 다른 길을 가리킵니다. 한국인들은 보통 프랑스의 생장(Saint Jean)에서 출발해 한 달 남짓 걸리는 길을 가장 선호한다고 하지요. '산티아고'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의 라틴어 이름으로 '성 야고보'라는 뜻입니다. 그는 당시의 '땅 끝'인 이베리아반도 끝까지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길을 올해 나이가 70인 김인식 선생이 걸었습니다. 침묵 속에 33일을 걸었습니다. 스페인의 한적한 들판 길, 꼭대기에 십자가가 서 있는 길, 멀리 마음이 내려다보이는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자유롭기 위해 혼자서 걸었습니다. 온종일 아무 생각 없이 걸었습니다. 마주 오는 사람이나 앞질러 가는 이에게 "부엔 카미노", 이 한마디면 족했다고 합니다. 말 만들어 내는 세상에서 말을 듣지 않아 좋았고, 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습니다. 지쳐서 다리가 무거워지면 성당에 들러 장의자에 앉아 말없이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다 나오면 됐습니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이베리아반도를 횡단하는 침묵의 길 800km를 그는 그렇게 걸었습니다.

걷다가 그는 종종 이상한 기분에 빠졌습니다. "언젠가 이 길을 걸어 본 적이 있었던 듯한 느낌", 즉 데자뷔(deja vu)를 경험했습니다. 70년이라는 긴 인생의 길에서 수많은 길과 고개, 산맥을 넘어왔기에 그런 기시감(旣視感)을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와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장면을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 갑작스럽고 강렬한 느낌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걷고 또 걷다가 그는 뜻밖에도 마음속 깊이 애써 묻어놓았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이 세상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없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지요.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냈습니다. "옹이 없는 나무 없듯 상처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애써 외면했던 아버지를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나다니, 정말 그럴 줄 몰랐다.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지는 않았다. 그러나 화해는 한 것 같았다. 뜨거운 눈물이 그랬다." 그는 그렇게 회고합니다. 대못처럼 가슴 깊이 박힌 상처 때문에 참으로 어려운 것이 아버지와의 화해인데, 순례자는 마음속으로 주기도문을 외우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날마다 용서의 언덕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디뎠습니다. (김인식, 『자유로운 영혼으로 혼자 걸었습니다 : 침묵과 함께 33일을 걸으며 만난 산티아고 블루』, 마음의 숲, 2021).

"떠나라 / 낯선 곳으로 / 아메리카가 아니라 /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 단 한 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 그대 떠나라 / 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아름다움으로 /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 그리하여 / 할머니조차 / 새로움이 되는 곳 / 그 낯선 곳으로 / 떠나라 / 그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 빈주먹조차 버리고 / 떠나라 / 떠나는 것이야말로 / 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 / 최초의 탄생이다 / 떠나라." (고은, <낯선 곳>) 김인식 선생의 떠남은 그의 상처로부터의 떠남이었고 그의 순례는 하루하루 반복된 습관으로부터의 떠남이었습니다.

아브람이 고향 땅 하란(Haran)을 떠날 때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의 본문처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어디로 갈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성서에 기록된 대로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세기 12:4), 그로 인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2)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본문처럼,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고별인사를 하시며 불안과 염려에 떠는 제자들을 이렇게 위로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그리고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함이로라" 하시며 주님은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라고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요한복음 14:31) 성서의 역사는 이렇듯 생명과 부활의 언약을 향해 자기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에서 용감하게 일어나 떠나는 사람들의 믿음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자신의 '프레임 바깥'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새 창조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닫힌 사회'가 되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나와 견해가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휴먼 네트워크는 서서히 닫히고 공감력은 극히 떨어졌습니다. 이윽고 '내 편 네 편'으로 나누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면서 어떤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고 꼬리표를 붙이며 혐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안에서 성찰과 반문(反問)의 능력은 사라졌습니다. 내가 보고 느낀 그 순간의 인지와 감정들이 사실일까 아무도 되묻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문기사에서 어떤 사람을 보고 '저 사람 나쁜 사람이다'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이면엔 무엇이 있을까? 나의 어떤 경험들이 그를 이렇게 보게 하는 걸까?'라고 묻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마치 '차안대'(遮眼帶)를 쓴 경주마처럼 오직 앞만 보고 달리게 되었습니다. 차안대란 경주마 눈에 착용하는 컵 모양의 장구로 다른 말이 가까이 다가와도 보이지 않게 하여 심리적 불안감 없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게 만든 장비입니다. 그런데 영어권에서 이 차안대, 곧 '블라인더'(blinder)는 큰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을 빗대어 말할 때 사용합니다. 말 그대로 눈이 가려져 자기 생각과 자기 관점에만 몰두하여 옆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자기 프레임 밖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모두는 그렇게 자기의 세계 안에 갇혀 버렸습니다. 서로 다른 유튜브에 갇힌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는 마치 자폐성 장애(自閉症 autism)를 앓고 있는 아이와 비슷합니다. 외부 세계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과 효과적으로 관계를 형성할 능력도 거의 없으며, 온통 내적인 소망이나 감정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을 우리는 자폐성 장애라 부릅니다. 그런데 어찌 이것을 어린아이들의 발달장애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 모두가 이 장애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성서를 읽다가 저는 오늘날 우리의 이런 모습이 세 공관복음서에 자세히 기록된 '거라사의 광인'을 닮았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마가복음 5:1-20, 마태복음 8:28-34, 누가복음 8:26-39)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 거라사 지방에 이르렀을 때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고랑과 쇠사슬에 매여" 있었으나 그것들을 끊고 깨뜨렸으며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몹시 사나워" 누구도 그가 있는 무덤 사잇길로 지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희철 목사님이 잘 묘사하듯이(『(40가지 키워드로 읽는 사순절 묵상집) 지킴 20, 버림 20』, 겨자나무, 2014), 그의 머리는 필시 '봉두난발'(蓬頭亂髮)이었을 겁니다. 웃자란 쑥 줄기와 같이 긴 머리카락이 마구 흐트러져 뒤엉킨 쑥대머리였을 것입니다. 손과 발에는 쇠고랑과 쇠사슬의 흔적이 깊숙이 패였을 것이고, 온몸은 스스로 낸 상처투성이였을 겁니다. 알몸으로 지내면서 시도 때도 없이 질러대는 괴성, 그는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왜 일까요. 이 거라사 광인의 모습에서 오늘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희망을 잃고 점점 죽음으로 기우는, 겉모습은 말끔해도 속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온갖 것에 묶여 있고 통제를 받는, 나를 알아달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아무도 듣는 이가 없는, 밖에서 입는 상처뿐 아니라 스스로 입힌 상처로 신음하는, 그런 나를 그 어떤 것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그래서 외딴섬처럼 혼자만의 방에 갇혀 사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예수께서는 한 사람의 생을 이렇듯 철저하게 무너뜨린 악한 귀신을 말씀으로 내쫓아 그를 온전하게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마을로 되돌려 보내셨습니다.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더는 귀신 들린 사람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기쁨에 넘쳐 온 성내(데가볼리)를 다니며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 행하셨는지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복음서가 전합니다. 오늘 거라사의 광인과 같은 우리들에게도 주님이 주시는 그 자유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시편 146:7)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이사야 61:1-3, 누가복음 4:18) 주신다고 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갈라디아서 5:1)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든 온갖 편견과 무지와 프레임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속박하는 거짓 진리가 아니라 우리는 자유롭게 하시는 참 진리 안에 살아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순례자입니다. 인생은 순례입니다. 순례자를 '필그림'(pilgrim)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페르 아그룸'(per argum)인데, 그 뜻은 '들판을 가로질러'입니다. 어떤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대지를 걷는 나그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순례란 버스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순례란 기차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발로 대지를 걷는 것입니다. 영혼의 나침반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보고 믿음으로 걷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누구입니까? 나그네란 새로운 변화에 열린 사람입니다. '프레임 바깥'을 보는 사람입니다. '스투디움'이 아니라 '푼크툼'에 열린 사람입니다. 매일 나 스스로를 부수고 깨뜨리려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디아스포라가 되려고 늘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스스로 멈추고 안주하는 순간 나 자신을 깨뜨려 밖으로 나가려고 하고, 주류가 되어 편해지는 순간 경계인이 되어 불편해지려고 하고, 안도감으로 느슨해지는 순간 나 자신을 부정해 다시 깨달으려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사람입니다. (전후석, 『당신의 수식어, 더 큰 세상을 위한 디아스포라 이야기』, 창비교육, 2021).

성서의 하나님은 '나그네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프레임 바깥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이사야 55:9)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옛것에 집착하지 않으십니다. 새 일을 꾸미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사야 43:1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가장 잘 응답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동하는 사람입니다. 순례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프레임 밖으로 탈주(脫走)하는 사람입니다. 이주연 목사님의 말처럼, 자신의 길들어진 습관의 익숙함, 과거의 업적에 대한 도취, 이미 획득한 소유에 대한 집착,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새로운 역사 앞에 자신을 여는 사람입니다. (이주연, 「산마루 서신」 2006.2.27.)

그러므로 여러분의 순례를 멈추지 마십시오. 세상의 어떤 진리에도 머물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복음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outside the city gate)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outside the camp)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브리서 13:12-13)라고 성서는 권유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enduring city)이 없"고, 우리는 "장차 올 것(the city that is to come)"(히브리서 13:14)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문 밖'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문'(camp)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주님은, 오늘 읽은 공동기도문과 같이, "바람처럼 우리의 발걸음에 앞서 가십니다... 비둘기처럼 우리를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십니다."(크리스티나 토제티, <성령께>) 이 주님께서 모두 자기 자리에 주저앉아 자기 세계에 갇힌 우리들을 손을 잡아 이끄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요한복음 14:31)

이 주님의 손을 잡고 참 자유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허향숙 시인처럼 통념을 벗고 새로운 생각으로 옷을 갈아입으니 세계가 낯설고 경이로워지며 "나는 다시 태어나 한 생을 얻"는 환희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참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순례하는 여러분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행복이, 가는 길목마다 행운이, 서는 곳마다 축복이, 그리고 앉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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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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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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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