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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니체의 허무주의란 무엇인가?
김균진 연세대 명예교수(혜암신학연구소 소장)

입력 Oct 07, 2021 04:18 P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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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김균진 연세대 명예교수(혜암신학연구소 소장)

1. 일반적으로 우리는 니체의 허무주의(nihilism)를, "모든 것은 허무하다", "덧없다",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이같은 통속적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본래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에서 생성한 개념이다. 형이상학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차안의 세계(physis) 저 너머(meta)에 있는 피안의 세계를 설정하고, 피안의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차안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핵심은 차안의 세계와 피안의 세계의 이원론에 있다. 차안의 세계는 가변적이고 일시적이라면, 피안의 세계는 변함이 없는 영원한 세계이다.

이같은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동양과 서양을 막라한 고대 시대의 공통된 세계관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의 거의 모든 종교 및 철학 사상들은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고대 유럽에서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가르친 대표적 인물은 플라톤이었다. 그에 따르면 차안의 세계는 되어감(Werden)과 변화 속에 있는 가상(Schein)의 세계라면, 후자는 참 본질의 세계로 생각된다. 전자는 지나가버리는 허무한 것이라면, 후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세계로 생각된다. 차안의 삶은 언젠가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일시적인 것이라면, 피안의 삶은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영원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리하여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인간의 영혼 불멸을 이야기하게 된다.

니체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어 로마 제국으로 확장된 기독교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수용한다. 이리하여 기독교는 차안과 피안의 이원론을 가르치게 된다. 형이상학적 피안의 세계의 중심점, 곧 "꼭대기"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피안의 세계는 오직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이다. 이 하나님으로부터 형이상학은 도덕 체계를 만들고, 이 체계를 차안의 인간에게 강요한다. 죽은 다음에 피안의 세계, 곧 "저 천당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자 한다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도덕 체계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원한 유황불에 타는 벌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인간을 위협한다.

2. 니체에 따르면, 기독교가 요구하는 도덕 체계는 인간의 삶의 생동성을 제약하고, 그것을 약화시키는 기능을 가진다. 한 마디로 그것은 인간의 삶에 대해 "적대적"이다(feindlich). 피안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 욕구들을 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기독교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도덕은, 인간을 자신의 노예로 만드는 "노예도덕"이다. 이같은 도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기독교는 인간의 삶에 적대적인 종교이다. 이 종교의 중심점에 있는 하나님은 삶에 적대적인 하나님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삶을 무의미한 것, 일시적인 것, 그러므로 헛된 것이라 가르치면서, 피안의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가르친다. 이리하여 인간의 삶의 생동성을 불구로 만들어버린다. 그것은 삶에 적대적인 것을 참 "가치"가 있고, 참 "의미"가 있는 "참된 것"이라 가르친다. 따라서 기독교가 가르치는 참 가치와 의미는 삶에 적대적이다.

이같은 현실을 벗어나 인간의 삶의 생동성을 되찾고자 한다면, 기독교의 형이상학을 버려야 한다. 형이상학적 세계 꼭대기에 있는 하나님을 부인해야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형이상학적 진리와 가치와 의미와 도덕을 폐기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머리 속에서 "만들어 낸 것"(Erfindung)에 불과하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진리, 가치, 의미, 도덕적 규범 없이 살아야 한다.

바로 여기에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의 정체가 있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단지 "모든 것이 허무하다", "덧없다"는 삶에 대한 감상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시하는 특정 규범에 따른 진리, 가치, 의미, 도덕이 "없다"(nihil)는 것을 뜻한다. 특정한 규범에 따른 진리, 가치, 의미, 도덕이 없는 상태, 무의 상태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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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Gustav Schultze, 1882)
▲의심의 대가로 손꼽히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3. 이같은 허무주의의 상태를 니체는 자연의 짐승들에게서 발견한다. 자연의 짐승들은 특정한진리, 가치, 의미, 도덕적 규범에 따라 살지 않는다. 그들은 자연적 충동 내지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그들에게는 맹목적 "삶에의 의지"와 "힘에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짐승들은 충만한 삶의 생동성을 가진다. 그들에게는 "부끄러움"(Scham)과 "죄책감"(Schuld)이란 게 없다. 한 마리의 수컷이 여러 마리의 암컷과 동시다발적으로 교미를 가져도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다른 짐승의 먹이를 빼앗아 먹거나 둥지를 차지해도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와 같이 특정한 규범에 따른 진리, 가치, 의미, 도덕 없이 살아가는 자연의 짐승과 같은 상태를 가리켜 니체는 허무주의라 부른다.

그래서 니체는 끊임없이 "인간은 짐승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에 대한 진화론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은, 니체에 대한 진화론적 인간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인간들에게로 가지 말고, 숲 속에 머물러라! 차라리 짐승들에게로 가라. 왜 너는 나처럼 곰들 중에 한 마리의 곰, 새들 중에 한 마리의 새이고자 하지 않느냐?" "너희는 벌레에서 인간이 되었다. 너희 속에 있는 많은 것이 아직도 벌레이다. 한 때 너희는 원숭이였다. 지금도 인간은 어떤 다른 원숭이보다 더많이 원숭이이다." 그의 저서 「기쁜 학문」에 따르면, "사람처럼 짐승도 자기의 권리를 가진다. 그래서 짐승도 자유롭게 다니고 싶어 한다. 나의 사랑하는 이웃 인간이여,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너 역시 아직도 짐승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벌레에서 진화한 존재이다. 그는 원숭이에서 진화한, 원숭이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그는 짐승들처럼 무-진리, 무-가치, 무-의미, 무-도덕 속에서 살아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가 조금도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삶의 생동성이 조금도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특정한 규범에 따른 절대적 진리, 절대적 가치와 의미, 절대적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자기 머리 속에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과 종교도, 관념주의 철학(특히 헤겔 철학)의 관념들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일체의 진리, 관념, 가치, 의미, 도덕은 거부된다. 따라서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인간이 특정 규범에 따라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인간의 삶의 생동성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이다.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니체가 발견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니체가 생존하던 당시에 나타나기 시작한 사회적 현상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과학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배제되는 "과학적 무신론"이 승리하는 현상을 보면서, 니체는 이른바 허무주의 시대가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이 배제될 때, 하나님이 그 "꼭대기"를 형성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허물어지는 것을 그는 보았다. 지금까지 유럽 세계를 지배하던 진리, 가치, 의미, 도덕이 사라지는 것을 그는 보았다. 곧 허무주의 시대가 시작하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래서 니체는 허무주의 시대가 이미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지기까지는 2, 3세기가 걸릴 것이라고 예고한다. 그래서 니체는 시대의 "예언자"라 불리기도 한다.

4, 니체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오늘 우리의 세계는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무-진리, 무-가치, 무-의미, 무-도덕이 인간의 세계를 지배한다. 하나님 없는 인간에게 모든 것이 자유의 이름으로 허용되었다. 누가 무엇을 하든지, 무엇이라 말할 수가 없는 세계가 되었다. 니체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죽었다."

그러나 니체의 예언은 적중하지 않다. 그의 허무주의는 다음의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곧 인간은 허무주의 속에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무-진리, 무-가치, 무-의미, 무-도덕 속에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진리와 가치와 의미와 도덕을 폐기될 때, 돈과 섹스가 최고의 진리와 가치와 의미와 도덕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이 폐기될 때,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고 살아간다. 돈과 섹스가 그를 지배하는 그의 하나님이 된다. 거짓된 진리, 거짓된 가치, 거짓된 의미, 거짓된 도덕이 그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그의 삶은 짐승의 삶처럼 목적이 없는 삶, 곧 "맹목적인" 삶이 되어버린다.

니체가 얘기한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의 인간은 짐승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더 많은 돈과 섹스에 헐떡이며 살아가는 짐승이다. 더 많은 소유와 섹스를 얻기 위한 "힘에의 의지"가 그를 지배한다. 그는 이른바 "초인"(Übermensch) 혹은 "위대한 인간"(der tolle Mensch)이 되었다. 수십 억, 수백 억원을 소유해도, 아파트를 수십 채 소유해도, 수많은 섹스 대상을 경험해도, 그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힘에의 의지"의 소유자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의 노예가 되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인간의 세계가 아닌가? 자연 짐승들의 세계처럼,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는 세계가 아닌가? 맹목적인, 다시 말해 목적을 알지 못하는 "힘에의 의지"가 세계 전체를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나타난 그 마지막 귀결은 자연의 파괴와 기후 재난과 코로나19가 아닌가? 이 세계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하나님 없이, 자연의 짐승처럼 사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사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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