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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비판에서 신앙성찰로(3):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을 중심으로
글 · 파울로 연세대학교 신학박사(Ph. D.)

입력 Aug 08, 2021 01:01 PM KST

4. 인간학적 본질에서 드러나는 종교의 비밀

인간의 본질을 의식으로 규정한 포이어바흐는 인간 정신의 요소를 지성, 의지, 감정으로 나누어 살피면서 인간이 신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요소들에 입각해 일련의 투사 과정을 전개해 왔음을 드러낸다. 종교와 연관해 인류의 정신문화사를 합리주의와 의지주의 그리고 신비주의라는 구도로 구분할 때 이러한 구도들이 더는 줄일 수 없는 인간 정신의 세 가지 요소, 즉 지성, 의지,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드러내는 예리한 분석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정신의 요소들 간에는 밀고 당기는 밀당의 관계가 성립하는데 그래서 어느 한쪽의 요소로 환원되면서 왜곡이 발생하는 과정을 불가피하게 겪어 왔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인간 정신의 요소의 최고봉으로 이성을 내세웠고 이성을 중심으로 나머지 요소들을 묶어내려고 시도했다. 명목상은 분열된 정신의 통일 내지는 종합이었지만 실제로는 어느 한 요소로 다른 요소들을 집중시키는 환원의 방식을 채택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지주의 흐름 속에서 당연하게도 저항의 몸부림이 일어났으니 살과 피를 가진 육체의 반동이 시작된 것이다. 형이상학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포이바흐의 인간학적 유물론이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관념론의 형식을 취하는 주지주의에 저항해 포이어바흐는 인간 정신의 요소를 비교적 균형있게 다루면서 이러한 정신 요소들이 신과의 관계 속에서 각각 어떤 그림을 그려나갔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신과의 관계에서 지성, 의지, 감정의 요소로 투사의 준거가 옮겨감에 따라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점차 강화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포이어바흐는 먼저 종교란 무한한 의식을 그 본질로 하는 인간의 자기대상화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해 인성과 신성을 구분하는 대표적 속성인 유한성과 무한성의 관계를 고찰하면서 이 둘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러면서 모순 없는 통일로서의 논리적 동일성을 그 속성으로 하는 지성이야말로 신의 1차적 속성임을 확인하며 신적 투사의 첫 차원이 지성에서부터 열리게 됨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성의 차원에서 투사된 신은 무한한 힘의 정점으로 드높여진 탓에 자기 확인 욕구에 충실한 인간에게 안정과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래서 인간은 배타적 자기긍정 욕구에 기인해 신의 인격화를 도모해 도덕적 완전자로서의 신을 그리는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이른 바 의지적 차원에서 신적 투사가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도덕적 완전자로서의 신의 명령이 인간에게 율법으로, 이른 바 족쇄로 다가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식의 늪에 빠지게 하고 말았다. 신 안에서 안정과 만족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 인간은 율법에 매여 죄의식에 사로잡힌 인간 자신을 감싸주고 용서해주며 넉넉히 품어주는 신을 그리게 되는데 최종적으로 신적 투사의 마지막 차원을 보여주는 감정의 차원에서의 투사가 벌어져서 사랑의 신을 옹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4.1 신적 지성보다 앞선 인간의 지성에 대하여

포이어바흐는 투사의 첫 차원으로 지성의 본질로서의 신을 말한다. 서두에서 살핀바와 같이 종교는 무한한 의식을 그 본질로 하는 인간의 자기대상화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인간의 유한성에 터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자의식으로부터 무한성 그리고 완전성이 그려지기 마련이며 또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가 전제되거나 요청됨으로써 인간 스스로 유한성을 의식한다. 이처럼 유한성과 무한성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 같아 보이나 서로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는 동격의 위상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는 것이다. 만일 종교의 대상인 신적 본질이 실제로 인간의 본질과 다른 것이라면 분열과 갈등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완전성-무한성과 불완전성-유한성이 서로 전제하거나 요청하면서 서로 상응하고 대립하고 있다는 점은 사실상 서로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분열은 서로 모순을 일으키면서도 하나가 되어야 하며 하나가 될 수 있는, 그래서 실제로 하나인 본질 속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로 상응하며 대립함으로써 분열하는 신성(완전성, 무한성)과 인성(불완전성, 유한성)은 짝을 이루고 있는 하나로 사실상 동어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키는 본질로 무모순의 의식으로서 모순이 없는 통일이며 논리적 동일성의 원천인 오성(혹은 지성)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이어바흐는 자기활동으로서의 사물의 본성에서 나오는 필연성이며 규칙의 규칙이며 절대적 척도며 척도의 척도로서의 지성의 지위를 확인하며 지성이야말로 여타의 것에서 비롯되거나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이고 독립된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지성이 스스로의 본질을 근원적 본질, 제1의 본질, 세계 이전의 본질로서 정립한다고 역설한 포이어바흐는 이러한 지성의 근원성이야말로 세계의 근거이자 목적까지 지배하는 것으로 신의 일차적 속성을 나타내주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원초적 본질로서의 지성은 만물의 제1원인을 신이라 일컬으며 그 신으로부터 만물을 도출한다. 이러한 지성의 근원성, 원천성이 투사의 첫 차원을 이루며 또 응당 그래야 할 것은 아래의 포이어바흐의 언명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성에 모순되는 것은 신에게 모순된다...이성은 스스로의 본질과 일치하는 신, 이성의 권위를 벗어나지 않고 이성의 본질을 표현하는 신만을 믿을 수 있다. 곧 이성은 스스로만을 믿고 자기본질의 실재성과 진리만을 믿는다. 이성은 자신을 신에게 의존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을 자신에게 의존시킨다...신은 자신에게, 곧 이성에 모순되는 어떤 것도 아니며 모순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비이성적인 것은 전능도 어찌할 수 없다. 신적인 전능 위에 이성의 더 높은 힘이 자리잡고 있다. 신의 본질 위에 오성의 본질이 신에 의해서 긍정되어야 하는 것과 부정되어야 하는 것,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의 척도로서 군림한다."(<기독교의 본질>, 109)

그의 지적처럼 그리스도교는 유구한 세월 동안 신의 전능성을 판단하는 척도로서 지성(또는 이성)을 앞세워 왔다. 때문에 형이상학적 본질로서의 신을 스스로에 만족하는 지성으로 여겼으며 역으로 자기 자신에 만족하는 지성이야말로 형이상학적 본질로서의 신으로 일컬어져 왔음은 물론이다. 또 그 절정에 헤겔에 의해 집성을 이룬 인식론적 형이상학의 있음과 앎의 같음(사유와 존재의 일치)으로서의 참 추구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포이어바흐는 이러한 지성에 대한 찬미가 다름 아닌 지성 자체의 신격화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발한다.

"그대는 비이성적이고 정열적인 본질을 지닌 신을 믿을 수가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정열적이고 비이성적인 본질을 신적 본질로 가정한다는 것이 그대의 오성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신 안에서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을 대상화할 것인가? 그대가 신 안에서 긍정하고 대상화하는 것은 그대 자신의 오성이다. 신은 그대의 최고 개념이고 오성이며 그대의 최고 사유 능력이다. 신은 "모든 실재성의 핵심", 곧 모든 오성진리의 핵심이다. 내가 오성 안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신 안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정립한다."(<기독교의 본질>, 109.)

인식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정립한다는 포이어바흐의 언명은 헤겔의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말하는 것으로 아는 대로 있는 있음을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처럼 앎(사유)과 있음(존재)의 같음(동일성)으로서의 진리 추구라는 전통적이며 복고적 형이상학의 기준을 형이상학적 본질로서의 신이 만족시켰다기 보다는 도리어 그러한 기준이야말로 형이상학적 본질로서의 신을 좌지우지 하는 척도로 군림했다는 통찰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역으로 재차 확인되는 것은 우리 인간이 말하는 신이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인식론적 틀에 의해 주물러진 무엇일 수밖에 없다는 투사의 불가피성이다. 고든 카우프만이 <신학 방법론>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유한한 인식 구조 탓에 있음의 순서가 아닌 앎의 순서를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은 신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으며 따라서 각각의 앎의 틀에 입각해서 그 틀에 잡히는 만큼만 신을 아니 신이라 사유하는 무엇을 단편적으로 포착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지엽적으로 포착된 신 이미지에 불과한 것을 신 자체로 여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으니 그것은 자기 믿음을 우상화한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포이어바흐는 이어 지성의 또 다른 속성으로서 통일성을 강조하며 이것 역시 지성이 신성으로 등극하는 중요한 성질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그에 따르면 지성은 스스로를 절대적 통일성으로 의식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니며 지성에 적합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은 지성에서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타당한 법칙이다. 또 무한한 본질로서의 지성을 말하며 이러한 무한성이 실존과 본성의 통일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결국 스스로와 동일하며 같기만 하고 다름이란 애당초 없는 것, 본질과 실존 속에 불가분하게 존재하는 것이 무한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를 만족시키는 것이 바로 오성이라고 강조한다.

포이어바흐는 지성은 본질을 그 자체 안에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지성은 스스로와 대응할 수 있는 것을 갖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그에 의하면 지성 보다 높은 것은 없으며 지성 그 자체가 모든 하부 계통의 최상의 원리로서 다른 사물이나 본질을 종속시킨다. 신 안에서 본질과 실존이 구별되지 않듯이 지성 안에서도 주어가 술어이며 술어가 주어가 된다. 포이어바흐는 이를 두고 신의 주술 동일성은 바로 지성 자체의 개념에서 도출해 낸 개념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빠트리지 않는다. 사변 철학자들이나 대다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신이 툭 까놓고 말해서 지성이 아니냐는 반문이다.

그러면서 포이어바흐는 지성의 본질로서의 신이 투사의 첫 차원을 이루는 데 있어서 지성의 또 다른 성질인 필연성의 본질도 들었다. 지성의 이러한 성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는 세계의 내적 필연성을 소개했다. 포이어바흐는 세계를 가장 고유하고 가장 내적인 필연성, 필연적인 필연성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그 이유로 세계 없이는 어떤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으며 필연성 없이는 어떤 이성도 어떤 지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세계는 무에서 생겨났지만 그 무는 세계 없이는 진짜 무일 뿐이란 얘기다. 그의 시선에서 세계의 존재는 지성적이나 세계의 비존재는 무지성적이며 따라서 진리가 아니다. 포이어바흐에게서 세계는 그 자체로부터 그 자체에 의해 필연적인 것인데 이러한 세계의 필연성이야말로 곧 지성의 필연성이란 점도 들었다.

그러면 이처럼 지성적 차원에서 투사된 신은 투사하는 인간과 각각 어떤 모습을 그리며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일까? 종교와 연관해 살펴볼 때 지성의 본질로서의 신을 든든히 지탱하는 것을 그 역할로 하는 교리의 특성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모두 해소될 수 없는 신적인 이성성, 즉 초이성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게 포이어바흐의 설명이다. 그의 이 같은 관점은 다음과 같은 언명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적어도 행복한 생활 상태에 있는 한 죽고 싶지 않다는 소원을 갖는다. 이 소원은 근원적으로 자기보존욕과 일치한다. 살아있는 것은 자기를 주장하려 하고 살려고 하며 따라서 죽으려 하지 않는다...이성은 이 희망을 채워줄 수가 없다...또 이성은 단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증명을 줄 뿐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이성은 나에게 나의 인격이 계속된다는 확신을 줄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로 이 확실성을 바라고 있다. 이러한 확실성에는 직접적, 감성적 보증이나 사실에 의한 확증이 필요하다."(<기독교의 본질>, 235)

그리스도의 부활과 마리아의 처녀성에서 나타난 초이성성

이처럼 자기보존욕에 충실한 인간은 죽지 않길 바라며 종교적 교리가 이성의 제한에 갇혀 있기보다 그 이성을 넘어서는 확실성을 보장해 주는 어떤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때문에 교리가 이성을 넘어서면 넘어서는 것일수록 더 신적인 것으로, 더 권위 있는 것으로 취급해 떠받드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적 특성은 무엇보다 예수의 부활과 그의 초자연적 탄생, 즉 동정녀 탄생에서 정점을 이룬다. 먼저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는 영속성에 대한 욕구와 소망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잘 부합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굴레 속에 있는 인간에게 "나의 인격이 계속될 수 있다"는 영속성의 보장을 뜻하기에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초이성성의 교리로 즐겨 받아들여지고 용납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인간은 죽은 뒤에도 자신의 인격이 계속되고 있다는 인격적 불멸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이다.(<기독교의 본질>, 236) 게다가 이 부활은 영지주의자들이나 주장할 법한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주관적인 보증에 머무르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이란 그야말로 확실한 몸의 부활, 육체의 부활이어야만 한다. 육체의 부활이야말로 가장 확실성이 담보된 것으로 포이어바흐의 말대로 직접적이면서도 감성적 보증에 해당하기에 그렇다. 재차 강조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이성과 정신의 추상적인 불멸성 보다는 인격적, 심정적 불멸성에 가장 잘 부합하는 육체의 부활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인격적 불멸성으로 수용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예수의 초자연적 탄생, 즉 동정녀 탄생을 들 수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는 처녀성과 모성이 결합한 초자연적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이성의 영역 안에서 해소되는 자연적 사건이 아닌 초자연적 사건인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의 주된 교리로 알려져 있는 게 사실이다. 처녀인 어머니 또는 어머니의 처녀성이라는 교리상의 모순은 자연과 이성에는 모순되나 심정과 환상에는 최고로 잘 어울리는 결합이라는 지적이다. 신의 아들을 잉태한 성모는 왜 처녀이면서 어머니여야만 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포이어바흐는 신의 눈의 관점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원죄의 본래적인 전염병원체인 정액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은 마리아의 수태, 즉 어머니의 처녀성은 죄, 곧 자아에 의해 더렵혀진 인류가 맞는 최초의 정화작용애 해당했다.

신의 눈의 관점에서 볼 때 원죄에 전염되지 않는 신, 즉 청정한 인간만이 인간을 정화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초자연적 심성을 가진 신에게 자연적인 생식과정은 혐오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더하여 태중에 있는 아들을 품어내는 처녀의 모성은 신이 인간이 되는 성육신의 사건이 결론적으로 신이 지닌 풍부한 모성애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는 지적도 눈여결 볼 대목이다.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이처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욕구 혹은 소망에 근거해 지성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신적 투사는 교리의 초이성성을 보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교리의 초이성성을 보장하는 신적 속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유발할 수 있다. 이 역시 지성적 차원에서의 접근을 피해갈 수 없을 터 우리는 지고의 지성으로서 존재하는 신 이미지를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사유를 기초로 하는 지성 그리고 그러한 지성의 신은 피조물에게는 없는 무엇, 즉 창조성을 갖고 있다. 신에게 창조성이라는 것은 자기를 사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신은 자기를 사유함으로써 세계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신의 창조성이 사유의 본질적 원리인 구별성에 잘 부합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구분함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 세계라는 설명이다.

"신은 스스로를 사유하고 스스로의 대상이 되며 스스로를 스스로와 구분한다. 이렇게 하여 구분이 나타나고 다른 종류의 구분을 지닌 세계가 발생한다...신 안에 있는 세계 산출의 원리가 궁극의 근거로 환원된다면 사유작용이 그 자신의 가장 단순한 요소에 따라 대상화된 것에 불과하다...그러므로 내가 신 안에 구분을 설정할 때 나는 이 사유 원리의 진리성과 필연성 이외의 무엇을 근거 짓고 대상화하는가?"(<기독교의 본질>, 172-173)

이처럼 지성적 차원에서 만나는 신은 이성의 영역을 넘어선 교리의 초이성성을 보장하는 꼴을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사유의 원리가 신이 스스로를 대상화 하여 구분하게 만들고 신과 구분된 세계를 산출하고 있다는 포이어바흐의 예리한 분석을 통해 지성적 차원에서 투사된 신이란 결국 신적 지성의 인간 자기 본질 차원에서의 투사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음미해볼 가치가 충분했다. 날고 뛰어봤자 아무리 이성을 넘어선 교리의 초이성성이라해도 그것은 인간이 요구하는 신적 지성의 자기대상화의 결과일 뿐이라는 포이어바흐의 진술에서 그의 냉철한 분석이 더욱 돋보인다. 

이성에 모순되는 삼위일체설의 초이성성

교리의 초이성성의 적절한 예가 되고 있는 기독교적 삼위일체 교리 역시 같은 맥락 속에서 이해 가능하다.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각자 독립적 인격으로서 서로 다르나 이 셋이 하나라는 이성의 모순을 불러옴직한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은 그 초이성성 탓에 교리로 받아들여지고 인정된다.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타자성에 대한 경험을 조건으로 하는 인간의 사랑, 공동생활, 현실적으로 실현된 자의식, 다른 자아에 대한 본질적인 욕구를 모형으로 하여 신성에 관한 삼위일체설이 성립된다.

따라서 이처럼 사랑을 본질로 하는 신은 그의 타자의존성 탓에 다른 어떤 대상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데 구별성에 근거한 창조성을 신적 속성으로 하는 신은 그러나 자기 외에 어떤 다른 대상에서도 의존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신은 자기 외부의 어떤 다른 대상에 의존을 하여 자기의 본질적 신성인 자족성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대신에 신은 신 자체 안에서 타자의존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복수적 또는 다수적 신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데 이것이 기독교의 주요 교리인 삼위일체설의 태동 배경이라는 게 포이어바흐의 설명이다.

이는 필자가 보기에는 서방교회 전통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삼위일체론, 즉 존재론적 삼위일체론에 대한 자기 성찰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삼각구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신이 신 안에서 자족 가능함을 확인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나 창조 세계, 아니 인간이 없어도 되는 신의 자족성을 확인하는 것은 포이어바흐 식대로 인간의 자기긍정 욕망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인간이 원하는 대로의 신의 존재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자연스럽게 삼위가 세계, 특히 인간과 관계한다는 점에 새롭게 주목하며 이러한 구도를 만족시키는 동방교회 전통의 경륜적 삼위일체론의 상황화를 도모한다.

이는 인간 삶의 연관성 차원에서 실천성을 담보한 삼위일체론으로의 전환을 말해준다. 피조 세계와 인간 세계 내 사랑, 정의, 평등의 가치가 넘실거리게 해야 한다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으로의 발달 과정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포이어바흐의 투사의 불가피성을 감안할 때 사랑, 정의, 평등이라는 삼위 위격의 무게를 지닌 이들의 가치 역시 인간의 자기중심주의적인 배타적 자기긍정 욕구에 의한 신적 투사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냐는 반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금까지 지성적 차원에서 투사된 신과 투사하는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관계하는지를 살펴봤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놓고 볼 때 교부 시대부터 인간의 지성을 본 뜬, 아니 닮은 신은 그렇게 지고의 지성적 존재로 옹립해 왔고 모셔져 왔다에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신관은 중세 전성기의 스콜라 신학에서 정점을 이루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찌된 영문인지 지성의 필연성을 기초로 신의 존재를 이와 같이 설정했음에도 지성의 신 안에서는 제대로 된 만족을 누릴 수가 없었다. 정재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자기중심적 배타적 자기긍정 욕구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지성의 신은 무차별적 동일성이란 성격 때문에 인간만 바라보고 있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자연에 충실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망각했다고 지적한다. 지성적 신은 만물을 그 대상으로 하여 보편적이고 범신론적인 우주에 대한 일반적 사랑을 지녔을 뿐 인간을 대상으로 한 특별한 사랑을 지니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는 결국 포이어바흐의 분석처럼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을 채우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야 말았다.(<기독교의 본질>, 120) 때문에 종교 안에서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인간은 지고의 지성적 존재인 신 안에서는 고향을 찾은 것과 같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누리지 못하고 불안을 해소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지성적 신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신을 그리기 시작한다. 자기보존욕에 충실한 인간이 자기만족을 위한 밑거름으로서 신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려 하며 급기야 이를 충족시키는 또 다른 신 이미지를 그리게 되었다는 게 포이어바흐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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