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성경이 말하는 방언(26)

김승진 침신대 명예교수(역사신학·교회사)

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제11장

에필로그: 결론적인 요약

김승진
(Photo : ⓒ 침례교신학대학교)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이상에서 우리는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계통에서 주장하는 성령론(Pneumatology), 특히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 성령침례 혹은 성령세례)과 방언(Tongue 혹은 Tongues)에 관한 입장을 성경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큰 프로테스탄트 교단인 남침례교총회(SBC, Southern Baptist Convention)에 속한 침례교회들이, 성령뱁티즘과 방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입장에 대해서도 살펴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제11장 에필로그에서는 앞 장들의 내용과 설명이 다소 중복되기도 하겠지만, "성경이 말하는 성령뱁티즘"과 "성경이 말하는 방언"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들을 제기하고 답변하면서 필자 나름의 결론을 요약하여 정리합니다:

1. UT방언 기도가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은 증거인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UT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 성령침례 혹은 성령세례)을 받은 증거라는 주장은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성경구절이 사도행전 1장 4-5절과 2장 1-13절인데,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날에 사도들이 말했던 방언은 UT방언이 아니라 LT방언이었음이 명백합니다(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 집안 사람들이 말했던 방언과 19장에서 에베소에 살고 있던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임해서 말했던 방언도 역시 LT방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을 쓴 누가가 위의 세 경우에서 동일한 복수형 단어(glossai, glossais)를 사용하고 있고 방언을 "말했다"(lalein)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했다"고 적고 있지 않습니다. 한 성서기자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같은 책에서 동일한 복수형단어와 문장을 사용했다는 것은 당연히 동일한 의미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습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 성령침례, 성령세례)의 의미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뱁티즘"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과연 UT방언 주창자들의 주장처럼 UT방언 기도를 하게 되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구원받은 신자가 또 다른 "구원 후의 체험"(post-salvation experience)으로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 것일까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신자가 성령을 못 받았거나 성령뱁티즘을 못 받았을 수 있는 것일까요?

성령뱁티즘에 관해서 복음서 각 책에서 한 번씩 네 번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마 3:11-12; 막 1:7-8; 눅 3:16-17; 요 1:32-34). 복음서들에 언급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시리라"라는 침례 요한의 예언들에서 단 한번도 UT방언을 하게 될 것이라는 언급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침례 요한이 "나는 너희에게 물로 뱁티즘을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시리라"(막 1:8)고 말했을 때와, 요한복음에서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는 이인 줄 알라"(요 1:33)고 말했을 때에도, 그는 제자들이 UT방언으로 기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침례 요한은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실 주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했을뿐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침례 요한은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과 불뱁티즘(Fire Baptism)을 언급하면서, 양자를 비교하며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마 3:11-12), "나(침례 요한-필자 주)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뱁티즘을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예수 그리스도-필자 주)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뱁티즘을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눅 3:16-17) "요한(침례 요한-필자 주)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뱁티즘을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예수 그리스도-필자 주)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 게 뱁티즘을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 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뱁티즘을 베푸실 것"이라는 말은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리라"(마 3:12; 눅 3:17)는 말과 연결이 되고, "불로 뱁티즘을 베푸실 것"이라는 말은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는 말과 연결이 됩니다. 여기에서 UT방언 기도를 하게 되리라는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은 신자(Believer) 즉 알곡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불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불신자(Unbeliever) 즉 쭉정이는 불태움을 당해 버려짐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침례 요한-필자 주)은 물로 뱁티즘을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행 1:4-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 사도행전 2장 1-4절입니다. 특히 4절에서 누가는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썼는데, 이 표현에서 그들이 "성령을 받음"과 동시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썼습니다. UT방언이 성령뱁티즘을 받은 증거라고 주장하는 UT방언 주창자들은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는 예수님의 예언과 약속이,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LT방언이었고, 성령뱁티즘과 성령충만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그들이 오순절 성령을 "받음으로" 인해서 그들은 성령뱁티즘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오순절날 제자들이 받게 될 성령이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16장에서 거듭 반복해서 말씀하신 "보혜사 성령" 혹은 "진리의 성령"(요 14:16, 26; 15:26; 16:7, 13)이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이 성령을 받게 될 것을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리라"(행 1: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충만과도 무관한 것이고 LT방언과도 무관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1장 16-18절에도 동일한 예수님의 예언이 등장하지만, 여기서도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이방인인 고넬료 집안 사람들-필자 주)에게도 주셨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을 때 그들도 예루살렘의 유대인 신자들처럼 성령의 선물(Gift of the Holy Spirit, 선물로서의 성령)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은 것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보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방언을 한 것이 성령뱁티즘을 받은 증거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때 그들이 했던 방언 역시 사도행전 2장에서 사용했던 동일한 복수형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그 방언은 LT방언(행 10:46, "이는 방언을 말하며")이었습니다. UT방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UT방언에 관한 언급이 있는 고린도전서에서조차도, "성령뱁티즘"이라는 표현이 유일하게 등장하는 고린도전서 12장 13절("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에서 방언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이곳에서 사용된 "성령뱁티즘"은 진정으로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은 자가 그리스도의 몸(우주적 교회, Universal Church, 시공을 초월한 예수 믿은 모든 신자들의 공동체-필자 주)으로 연합된다는 "사실"(fact)을 묘사한 표현입니다. UT방언으로 기도하거나 몸에 경련이나 진동을 하거나 몸이 바닥에 넘어져 쓰러지거나 하는 등 소위 말하는 "성령체험"(spiritual experience)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이 구절에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은 어떤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거듭나게 된다(중생, 신생, 위로부터의 출생, 영적 출생 spiritual birth)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거듭남과 동시에 성령의 강물 속으로 풍덩 빠뜨려져 "한 몸"(one body) 즉 우주적 교회(Universal Church)의 일원(一員)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아 한 몸이 되었다(by one Spirit are we all baptized into one body-KJV, For we were all baptized by one Spirit into one body-NIV)"고 했을 때 사용된 동사의 시제는 "부정과거형"(단순과거형, aorist)입니다. 이 동사는 과거 어느 순간에 일어났던 사건을 점적 시각(點的 時刻)으로 나타내는 시제입니다. 카메라 촬영에 비유를 한다면 스냅샷(Snap-shot), 즉 순간포착 촬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연속적인 사건이 아니라 순간적인 사건, 즉 과거에 한 차례 이미 발생했던 사건을 가리킵니다. 성경 어디에도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으라"고 명령형 문장을 사용한 경우는 한번도 없습니다. 어떤 죄인이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었으면 그 순간에 그는 이미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았다(성령으로 뱁타이즈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우리가...... 다"(we...... all)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우리 중에...... 일부"(some)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은 "우리 모두"(we all)가 다 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았고 그래서 한 몸(one body)인 우주적 교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we)는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내는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들과 그 서신을 받는 고린도교회 성도들 전부(all)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UT방언 기도를 하는 일부 성도들만을 가리키면서 그들이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회개를 하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은 신자들은 "누구나"(everyone)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은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주적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여,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by one Spirit-KJV, NIV) 뱁티즘을 받아 "한 몸이 되었다"(into one body)는 사실(fact)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었던 순간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성령을 받았고, 이미 성령뱁티즘을 받았고(이미 성령으로 뱁타이즈 되었고), 이미 성령으로 인(印)침을 받았고, 그래서 그 신자의 마음 속에 성령이 지속적으로 내주(內住)해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과 관련하여 순종해야 할 한 가지 명령은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엡 5:18, plerousthe en pneumati, be filled with the Spirit-KJV, NIV)입니다. 여기서 이 동사는 수동태, 현재형, 명령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화될 때까지, 날마다 매 순간마다 예수님을 더 많이 닮기 위해서, 보다 더 거룩해지기 위해서, 더욱 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힘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령이 주인된 상태, 그래서 성령께서 그를 온전히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는 상태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은 그리스도인들(신자들, believers)은 "다"(all, 모두) 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아(고전 12:13)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이미 우주적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뱁티즘을 받은 신자들(believers)에게 성령과 관련하여 남아 있는 유일한 명령은 "너희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입니다.

2. 성경은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언어 혹은 외국어로서의 방언과 중얼중얼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있습니다. 전자는 성령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인해서 배운 적도 없고 말해 본 적도 없는 언어 혹은 외국어를 말하는 표적(semeion, sign)으로서의 은사입니다. 필자는 이러한 방언을 LT방언(Language Tongue)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후자는 기도하는 중에 정상적인 언어(말)가 아닌 중얼중얼하는 방언기도입니다. 오늘날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 계통의 교회들과 이들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일부 교회들에서 성도들이 기도 중에 내는 이상한 소리를 그들은 성령의 은사라고 주장합니다. 필자는 이러한 방언을 UT방언(Unknown Tongue)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방언을 "사도행전에서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에서의 방언"으로 구분하면서, 전자는 언어 혹은 외국어로서의 방언이고, 후자는 성령의 은사로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방언기도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서도 대다수의 방언이라는 단어들은 언어 혹은 외국어로서의 방언(LT방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에는 방언이라는 단어에 대해 단수형(glossa)과 복수형(glossai)의 구분이 없이 거의 단수형으로만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방언에 대해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과 강의를 하고 저술을 하는 신학자들도 이 양자(兩者)를 구분하여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과 학생들에게 개념 상의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필자가 집중적으로 살펴본 KJV과 NIV 영어성경에서는 방언이라는 낱말에 대해 단수형(UT방언, speaking in tongue)과 복수형(LT방언, speaking in tongues)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물론 희랍어 원어성경에서는 단수와 복수가 당연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이 양자에 대한 구별이 없이 방언을 말하게 되면 "성경이 말하는 방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LT(Language Tongues) 방언은 전문적인 용어로 "제노글로씨아"(Xenoglossia)라고 합니다. 즉 언어 혹은 외국어로서의 방언입니다. 이 방언은 뜻과 메시지가 담겨 있고 따라서 의사전달이 가능한 언어(language)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서, 사용해 본 적도 없고 배워 본 적도 없는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행 2:11, the wonderful works of God-KJV, the wonders of God-NIV)을 말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러자 로마제국 내의 15개 내지 16개 지역으로부터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Diaspora Jews)은 자신들의 출신지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죽음과 부활의 소식을 알아 들었습니다. 이 LT방언은 뜻과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역이 가능했지만, 사도행전 2장 최초의 성령강림 사건에서는 통역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외국어로 말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신의 출신지 언어로 알아 들었습니다. 우주적인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그리고 급속한 복음의 확산을 위해,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표적(semeion, sign)을 유대인 그리스천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UT(Unknown Tongue) 방언은 전문적인 용어로 "글로쏠랄리아"(Glossolalia)라고 합니다. 즉 알아들을 수도 없고 뜻과 메시지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소리로서의 방언 혹은 방언기도입니다. LT방언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주어진 성령의 은사라면, UT방언은 인간으로부터 말미암은 발성현상입니다. 인간이 말이나 기도를 많이 하다보면 혀가 꼬이기도 하고 성대가 긴장되어 이상한 소리를 발하게도 됩니다. "할렐루야"를 수십번 반복해서 말하면 UT방언과 같은 발성을 하게 됩니다. 또한 심리적인 혹은 정신적인 이상상태(異常狀態)에서 중얼거리는 뜻모를 소리(gibberish, babble, mutter, mumbo-jumbo)를 발설할 수도 있습니다. 황홀경의 상태에서 내는 발성(ecstatic utterance)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UT방언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일까요?

UT방언 주창자들은 UT방언 체험을 마치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신비스러운 영적 체험인 것처럼 주장을 하지만, 인간으로부터 연유한 이상한 소리(humanly originated queer sound)일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UT방언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성령의 은사로 간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UT방언으로 인해서 고린도교회에 심각한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 있었다고 진단하였습니다. 그것은 통역 자체가 불가능한 의미없는 소리(meaningless voice)에 불과합니다. UT방언 속에는 전달가능한 의미 있는 메시지(meaningful message)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UT방언 주창자들이나 옹호자들은 거의 모두가 UT방언을 성령의 은사이며 성령뱁티즘(성령침례, 성령세례)을 받은 증거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한 중얼거림은 "하레 크리쉬나"(Hare Krishna)를 비롯해서 다른 종교인들의 기도(祈禱)나 주문(呪文)에서도 널리 발견될 수 있는 보편적인 육체적 현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UT방언에 대해 언급할 때에는,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의 일부가 과거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방종교에 몸담고 있었을 때에 행하던 악습(惡習)임을 상기시키며 그것을 비판했습니다(고전 12: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리고 고린도교회의 영적인 혼란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들은 사도 바울은, 알아들을 수도 없고 따라서 통역도 불가능한 UT방언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문제와 무질서를 치유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결코 UT방언 기도를 기독교적인 신앙행습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더우기 오늘날의 UT방언 주창자들처럼 그러한 방언으로 기도하도록 권장하거나 독려하지도 않았습니다.

3. 예수님은 무슨 방언에 대해 말씀하셨는가? 제자들에게 UT방언으로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는가?

예수님은 복음서들에서 오직 한번만 방언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막 16:15-18)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뱁티즘을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필자 주, these signs-KJV, NIV)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따르게 될 다섯 가지 표적들을 말씀하시면서 두 번째로 "그들이 새 방언을 말할 것"(glossais lalesousin kainais)이라고 하셨습니다(막 16:17), 예수님은 "새"(kainais, new, 새로운, 생소한)라는 형용사 단어와 함께 "그들이 방언을 말할 것이다"(they shall speak with new tongues-KJV, they will speak in new tongues-NIV)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여기서 "방언"(glossais)이라는 단어는 복수형이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누가에 의해서 사용된 단어(lalein 'eterais glossais, speak in other tongues,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 16장 17절에서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유언이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LT방언, 즉 배운 적도 없고 말해 본 적도 없던 새로운 혹은 생소한 말(언어) 혹은 외국어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이 중얼중얼하는 UT방언 기도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새 방언을 "말하며"(말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방언으로 "기도하며"(기도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따를 다섯 가지 표적들 가운데 하나로서, UT방언으로 "기도할"(pray)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LT방언으로 "말할"(speak)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예언이 약 열흘 후 오순절날에 성령이 우주적으로 강림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성취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음과 동시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큰 일"(the wonderful works of God-KJV, the wonders of God-NIV)을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began to speak with other tongues-KJV,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NIV). 예수님께서 복음서들 가운데 유일하게 단 한 번 말씀하셨던 방언이라는 말은 LT방언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제자들이 그 분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침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을 목격했던 예수님의 제자 한 사람이,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소위 말하는 "주기도문"(Lord's Prayer)을 기도의 모본(example, model)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눅 11:1-4)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침례 요한-필자 주)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마 6:9-13 참조).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은 오늘날 UT방언 주창자들이 하는 "우다다다, 쌀라쑬라, 할렐룰룰" 하는 UT방언 기도를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뜻과 의미와 내용이 있는 언어로 하나님께 인격적인 기도를 드릴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끔찍한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자신과 제자들과 장차 이 땅 위에 세워질 교회를 위해서 매우 진지하게 꽤 긴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요 17:1). 이 기도를 "대제사장의 기도"(Prayer of the High Priest)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 기도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께 간절하게 아뢰었습니다. UT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체포당하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눅 22:44) 기도하실 때에도, 예수님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알아들을 수 있는 자신의 언어(아마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도하셨습니다. [김관운, "랄랄랄 우다다다는 방언이 아니다,"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 /watch?v=J8GuwiGHwps, 2019년 4월 21일 접속].

심지어 약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에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하며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하셨고,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중얼거리며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unintelligible) UT방언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신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것을 해야 하고 예수님이 하지 않으신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적도 없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적도 없는 UT방언 기도를, 성도들에게 사모하게 하며 그들을 부추겨서 UT방언 기도를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입니다.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진실한 마음이 담긴 우리의 말(언어)로 솔직하게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듣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분의 뜻에 따라, 그 분의 방법으로, 그 분의 때에, 우리의 말(언어)로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를 하지 말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결코 그들을 본받지 말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마 6:6-8)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use not vain repetitions as the heathen do-KJV, do not keep on babbling like pagans-NIV)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물론 예수님은 여기서 "중언부언하며" 하는 기도가 UT방언 기도라고 말씀하시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마 그 당시 어떤 이방인들이 습관적으로 자신들의 신(a god, an idol)에게 별 의미없이 많은 말을 하거나 공허한 말을 반복해서 기도했던가 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하는 그러한 기도는 인격적인 아버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나 대화가 될 수는 없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그들의 신(a god, an idol)이 들으실 줄 안다고 예수님은 비꼬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처럼 의미와 메시지가 포함된 말(언어)이 아니라 소리(voice)를 반복적으로 내는 UT방언 기도를 예수님께서 인정하시고 그렇게 하라고 권면하셨을까요? 예수님은 UT방언 기도를 하신 적도 없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적도 없었습니다. 단 한번 예수님께서 유언으로 말씀하신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라는 말은 "생소한 LT방언을 말할"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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