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종교의 한계 넘어 무신론적 인간학 살아내야 한다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전직 지질학자

입력 May 06, 2021 08:04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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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나사 홈페이지 갈무리)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바라 본 남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모습

2차 세계대전 중,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자신의 독일교회가 히틀러의 나치정부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에 반대하여 기독교를 종교로부터 분리할 것을 촉구했으며, "종교 없는 기독교"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오늘처럼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의 국가적 위기에서 교회는 본회퍼 목사의 도전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따라서 종교의 한계 넘어 유신론적 신학을 떠나 보내고 무신론적 인간학을 살아내어야 한다.

지난 1년여 동안에 코로나바이러스19로 지금까지 지구촌에서 3백20만 명이 생명을 잃었으며, 확진자수는 1억5천만 명에 이르고 있다. 또한 사망자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참고: Covid-19 실시간 상황판 https://coronaboard.kr/) 현대 종교인들은 이와같은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의 지구적인 위기상황에서 종교의 참된 의미에 대해 솔직하게 이성적으로 숙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신을 숭배하는 종교인들과 특히 교회기독교인들의 의식과 인간성이 시대적 환경에서 퇴폐했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문자근본주의의 광신적인 신자들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기독교인들의 내세적인 믿음이 이러한 위기에서 자신들은 물론 이웃들에게 설득력과 효력을 상실한체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국가적 위기에서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기능과 목적이 무엇인지 심층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가 신봉하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바이러스를 막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의 위기에서 교회기독교 신자들은 예배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비밀리에 예배모임을 갖거나 집에서 온라인으로라도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한다는 두려움과 공포와 망상에 사로잡혀있다. 간단히 말해서,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종교는 사람들에게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의 의미와 생명과 죽음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의미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에서 내세적인 종교와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인간의 온전한 삶에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하느님과 그런 하느님을 향한 예배에 대한 원시적이고 비상식적인 믿음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교회기독교는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이후에 불량신학의 하느님 예수를 미련없이 떠나 보내고, 인간학의 참 사람 예수를 회복하고, 그가 가르치고 몸소 살았던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살아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의무이고 책임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실종되었거나 노숙자가 된 역사적 예수의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을 다시 일깨운 역사적인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해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음은 필연적이라고 예언했다. 이들 덕분에 현대인들의 의식 속에 인간이 하느님 보다 더 소중하고, 종교는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것이라는 인식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오늘날 가정과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여성과 남성, 이성애와 동성애, 인종들과 종교들 사이에 높이 쌓아놓은 분리벽의 경계 넘어 온전한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 관념적으로 하느님을 믿는 것 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 따라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의식과 참된 인간성이 절실히 필요하며 특히 종교체제에서 거룩한 신성(神性)을 떠나 보내야 한다. 오늘날 21세기에 전통적인 종교체제가 맹신하는 유신론적 하느님은 확실하게 죽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어떻게 죽어갔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1세기에는 물론 21세기에도 참 사람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의 핵심은 하늘 문을 두드리는 유신론적이고 내세적인 믿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무신론적이고 현세적인 삶이다.
세계를 장악하고 통제하던 유신론적 하느님의 설득력과 효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결정적인 동기는 코페루니쿠스(1473-1543)와 갈릴레오(1564-1642)가 천동설(움직이지 않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을 폐기하고 지동설(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돈다)을 발표한 것이다. 이후부터 교회의 삼층 세계관적 우주론은 심하게 흔들렸으며, 하늘 위에 존재하는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음이 시작되었다. 더욱이 생명과 인간과 하느님과 세계에 대해서 이전과 똑같을 수 없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찰스 다윈(1809-1882)의 진화론이었다. 지구의 생명체들이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서 변형해왔다는 다윈의 진화론은 계속해서 발전하여 이제는 지구를 넘어서 138억 년 전 빅뱅 이후 우주세계는 계속해서 팽창하고 진화하고 있다는 우주 진화론을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음이 가속화되었다. 우주진화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의 생명은 일회적이며, 이 세계 이외에 다른 세계는 없으며, 우주세계는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이 미리 설계한대로 더 이상 변하지 않는 완성품으로 고정시킨 것이 아니다. 우주는 출현한 이래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진화해왔으며,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계속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우주의 불확실성이라고 한다. 하느님은 내일을 모른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필수적으로 이해해야 할 근대사의 사상가들이 있다. 이들은 사람들의 자율적인 의식과 인간성을 폄하하는 인격신론의 초자연적 하느님의 죽음은 필연적이라고 예언한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현대 종교학의 창시자인 흄(David Hume, 1711-1776)은 자신의 저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고>에서 "영원한 자아 혹은 영원한 인격적 내지는 객체적 존재에 대한 개념은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결론지었다. 다시 말해 육체와 분리된 영혼은 인간의 망상이다. 흄은 유신론이 종교의 본래적인 모습도 아니고 가장 지고의 형태도 아니라고 밝혔으며, 종교는 인간의 무지에서 시작되어, 두려움으로 인해 동기가 유발되고, 원인을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상상을 투사함으로써 작동한다고 밝혔다. 흄 자신은 유신론자도 무신론자도 아니었다. 그는 결코 종교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고, 오히려 참된 종교가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했다. 즉 참된 종교는 외부적인 절대성을 인정치 않으며, 신적인 의식에 대한 참여를 거부하고, 죽음 후의 이분법적 상벌에 대한 인식을 주장하지 않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진리의 주장을 합리적 탐구와 인식에 넘겨줌으로써 영속적인 불확실성을 지니고 살아가도록 하는 삶과 생명의 종교이다. 원초적으로 종교는 보상심리의 조건부적인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특히 새로운 종교의 시대를 예언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k,1804-1872)는 마르크스, 킬케골, 니체, 프로이드, 부버, 하이데거와 같은 핵심적인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포이에르바하는 '과거의 세계는 머리 위에 몸을 두었지만, 새로운 시대의 세계는 몸 위에 머리를 둔다. 과거의 세계는 영을 물질의 근본으로 하였지만, 새로운 세계는 물질을 영의 근본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인간에서 나온 것이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란 인간이 되고 싶은 무엇이다. 하느님이란 참된 존재로 인식된 인간자신의 본질이며 목표이다. 인간의 신성화가 아니고, 하느님의 인간화 곧 유신론적 신학이 무신론적 인간학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포이에르바하에게 정신은 인간의 지고하면서도 가장 고상한 면으로서의 개념, 사상, 학문, 철학, 종교, 유신론, 하느님 등을 만드는 것이다. 즉 이 모든 것들은 인간들이 만든 작품들이다. 그는 종교와 하느님은 인간의 자의식의 표현이라고 밝혔다.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든 창조자이다.

교회기독교의 유신론적 신학과 믿음이 잘못된 것을 경고한 흄과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인들에게 현세적인 참된 종교를 탐구하고, 세계를 통제하고 조정하던 유신론적 신학에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무신론적 인간학으로 방향을 전환하라고 도전했다. 오늘날 이들의 사상이 주류 신학계의 핵심이 되고 있다. 21세기 진화과학 곧 뇌과학(腦科學, Brain Science)과 진화심리학(進化心理學, Evolutionary Psychology)이 발견한 공개적 계시들은 흄과 포이에르바하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난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온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음을 가속화한 공개적인 계시(Public Revelation)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솔직하게 밝히고, 인간의 자의식이 어떻게 등장했고 앞으로 어떻게 진화해 갈 것인지에 대해 밝혔다.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인간 뇌는 인간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전체적으로 통괄하면서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고 보고 행동하는 것들을 통제하는 중추역할을 한다. 뇌는 인간의 본성이고 정체성이다. 인간의 뇌작용과 분리된 외부적이고 타자적인 존재들은 거짓이며 허상이다. 인간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건강은 뇌의 건강에 달려있다. 뇌의 작용이 중단하면 인간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뇌가 우주이다. 뇌와 분리된 영혼과 하느님과 세계는 없다. 하느님과 종교와 인간의 세계와 우주세계는 인간 뇌가 그려낸 그림들이다. 따라서 인간 뇌는 창조자이고 발견자이다. 이러한 과학적인 사실들은 21세기 현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의 기초가 된다.

138억 년의 장구한 우주진화 역사에서 4만 년 전에 최초로 언어를 사용하는 현대 인간이 출현했으며, 가장 최근 약 6천 년 전에 신(god)을 창조하고, 이에따른 종교체제와 전통을 만들었다. 인간은 하느님 보다 훨씬 먼저 있었고, 하느님은 나중에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간 뇌의 작용으로 138억 년의 우주진화 역사가 발견되었고, 우주 이야기가 세계관과 가치관과 윤리관의 기초가 되었다.

뇌과학에 의하면, 인간 뇌는 과거 어느 시점에 더 이상 변하지 않는 완성품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즉 초자연적인 신이 변하지 않는 영구한 뇌를 창조하지 않았다. 인간 뇌는 인간 생물종이 우연히 자연적으로 출현한 이래 적어도 260만 년 동안 끊임없이 진화해왔으며, 미래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또한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심리)을 진화론적 시각에서 탐구한다. 다시 말해 진화심리학은 왜 마음은 진화되었으며, 사람의 마음은 어떤 원인결과 과정을 통해 현재의 형태로 만들어지거나 빚어졌는지를 밝힌다. 유신론적 종교의 믿음체계는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의 시각에서 자신들의 전통과 신앙이 왜 무엇때문에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해하면 부족적인 종교의 사적인 계시(Personal Revelation)에 머물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개적 계시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으며,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신체적 부위들도 진화하고 있다. 특히 인간 뇌는 장구한 세월 동안 진화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화할 것이다. 그 진화가 어디까지 진행될지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인간 생물종이 살아있는 동안 인간과 생명과 세계와 하느님의 의미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발전해 왔듯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숙해질 것이다. 인격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느님에 대한 유신론이 쇠퇴하고, 신과 종교 없이도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무신론이 보편화되는 것은 인간 뇌의 진화과정이며 자연적인 현상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본성과 의식을 정직하게 밝혀주는 진화과학의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은 입증하기를 인간성과 의식은 인간의 소중한 정체성이며, 신성은 인간이 만든 부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이 거룩하고 초자연적인 신성 보다 필연적으로 더욱 소중하다. 21세기에 과학이 모든 삶의 영역들의 기초가 되고 있는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음은 자연적이고 필수적이다. 미래의 인류사회에서 더 이상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존재는 절대로 필요없다. 그대신 인간적이고 무신론적인 자유하고 통합적이고 우주적인 삶의 방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는 믿는 하느님 보다 솔직하고 이성적인 참된 인간이 필요하다. 오늘날 무신론적 인간성이 유신론적 신성 보다 더 설득력과 효력이 있다는 인식이 급증하고 있다. 첨단 과학시대에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는 기독교의 핵심은 유신론적 신학이 아니라 무신론적 인간학이다.

※ 이 글은 전 지질학자인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외부필자의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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