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어린이주일설교] 믿음을 살피라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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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잠언 11장 24-28절, 시편 112편 1-10절, 히브리서 11장 1-7절

[믿음장과 종교적 인간]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장"으로 불리고, 고린도전서 15장이 "소망장"이라고 불리듯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장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0장에서 그 유명한 하박국의 말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합 2:4)는 구절을 인용하면서(히 10:38) 11장에 와서는 아벨과 에녹, 노아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등 창세기의 원역사부터 출애굽 사건의 주인공들, 사사들과 왕들, 예언자들까지, 믿음의 조상들을 일일이 나열하면서 믿음이 무엇이며, 믿는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히브리서의 본문에는 믿음에 관하여 중요한 몇 구절이 나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라는 1절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라는 6절의 구절이 그러합니다. 지금 설교를 듣고 계신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진심으로 믿고 계신가요?

오늘날 전 세계 76억 명 중 어떤 종교도 갖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약 8억 4천만 명(11%) 정도에 이르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전체 인구의 52%나 되는 사람들이 무신론자 아니면 불가지론자로서 종교가 없다고 응답했습니다.(2020년 인구주택총조사)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감소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비율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이 발달하기 전 고중세 사람들은 인간과 자연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기가 쉬웠지만, 관찰과 실험이 가능한 세계를 합리적 인과관계로 설명해 내는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형성된 근현대 세계에서는 하나님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매우 상식적인 인간관계에 기반한 유교의 전통이 강하고, 절대적이며 인격적인 유일신을 거부하는 불교 전통도 매우 오래도록 우리 삶에 녹아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한국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종교성은 바로 무교(巫敎)입니다. 무교의 특성은 대체적으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문제와 고통을 해결하고 일상에서 복을 누리는 삶을 추구하는 것(除災招福)입니다. 신내림을 받은 무속인들은 특별한 의례와 능력으로 상담을 받는 이들의 한을 풀어주기도 하고, 무속인들이 모시는 신들의 명령에 따라 고운 맘을 쓰라고 하고, 저마다 지키는 원칙들이 있지만, 그것이 인류 모두가 따라야 할 윤리적이고도 철학적인 사유로 이어지거나, 과학의 발전을 도모하지는 않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일상의 삶은 대개 유교의 상식을 바탕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지향하고 추구하는 것을 따라가는 모양새를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 것도 아닙니다. 경쟁이 일상이고, 이긴 자가 많은 것을 차지하며, 가진 자들이 언제나 더 유리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어하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숱하게 들리는 자살 소식, 연애와 결혼, 출산의 포기에서 시작하여 많은 것을 포기하고 무력하게 지내는 "N포 세대"라는 말,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묻지마 폭력"과 혐오 언어들은 모두 자본주의 세상에서 생겨나는 부정적 부산물들이고 찌꺼기들입니다. 돈과 권력을 지향하는 이 세상에서 기득권을 차지하지 못하거나, 삶의 우여곡절 속에서 한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고비와 위기를 맞이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종교를 찾습니다. 즉 위기의 순간을 넘어서려고 초월적 힘에 기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방식이 무교의 특성입니다.

무속의 특징은 인간의 깊은 내면의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외래종교인 불교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고, 한국의 개신교인들의 상당수도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다지만 실제로 하는 행동과 신앙의 양태를 보면 무속신앙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양상은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비슷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야훼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신앙의 공동체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곳에는 이미 다산과 풍요를 약속하는 바알 신앙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내 이 바알 신의 유혹에 말려듭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이런 가장 원초적인 종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류가 지구에 태어나 지금까지 늘 자연과 싸우며, 생존의 위협과 숱한 고비들을 넘겨왔습니다. 자연현상이 보여주는 거대한 힘들 앞에서, 저 초원의 맹수들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를 갈망해 왔고, 모든 것을 통제하여 자신의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자신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그것을 넘어서는 힘을 추구해 왔던 것입니다. 이런 인간을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실로 종교적 인간입니다. 쉽게 말하면 힘을 추구하는 인간이고, 자신이 보다 더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 목표가 되는 이기적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앙은 이것과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힘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합니다. 자기 맘대로 살고 싶어서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지배하려는 사람들에 맞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함께 사는 삶, 서로 평등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며 돕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닌다는 것은 종교적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을 극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자신이 곤궁할 때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과 남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 고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참된 믿음을 향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찾는 이가 상을 받는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우리들의 삶에서 실제 보이는 것으로 실현시키는 사람들, '하나님이 없다'하는 이들에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에 어떻게 이를 수 있을까요? 오늘 저는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믿음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사도신경" 강해가 우리 교회 유튜브에 업로드 됩니다. 그 강의 영상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를 매우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오늘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대해 한 두 가지만 함께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는 합니다. 종교적 인간을 넘어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믿음이라는 것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믿음이어야 하며,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이 추구했던 믿음의 모양이어야 합니다.

그동안 한국 개신교가 비뚤어지고 타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믿음에 대해 정직하게 묻고 그것에 대해 가장 올바른 답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신학자들조차도 그러했습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던 대로 보통 사람들은 삶의 고난을 피하기 위해, 아니면 초월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 묻지 않고, 어느새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었던 것이고, 그냥 그 때의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습관적으로 교회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사업이 잘되었다거나, 병이 나았다거나, 위로를 받았다거나, 감동을 받았고, 인맥을 넓힐 수 있었다거나 하는 유익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말씀 드린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 삶의 여러 어려운 고비들을 넘기고, 보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문제로 삼는 것은 이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거 진지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 묻고 얻은 결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믿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묻고 그 답을 찾아가려는 자기 고민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길을 갈 때에도 자신에게 큰 해가 없으면 괜찮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곧 코로나 19 상황과 같은 위기가 되었을 때에 신앙인들과 교회가 우왕좌왕 하고 잘못된 판단들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바람이 불고 물결이 넘쳐흐르면 쉽게 무너지는 신앙이 되고 만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코로나 19라는 이 상황이, 밀려오는 4차 산업혁명으로 엄청난 변화가 예상되는 지금이 다시금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인가를 묻고 올바른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뿌리가 얕고 잘못된 기초위에 교회를 세운 곳에서는 많은 잡음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추구하면서도 교회에는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적게는 100만에서 많게는 300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누군가 교회에 가고 싶다고 말할 때, 자신 있게 이 교회 가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잘 몰라서이기도 합니다만, 제 적은 경험만으로도 보면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하여,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며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고, 또 있다 하더라도 이들이 자신들을 잘 이끌어 주는 목사를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믿음음 물음으로부터]

저는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인간의 종교적 욕망이라는 헛된 기대와 소망 위에 선 교회가 아니라 교인 한명 한명이 진지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묻고 정직한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간직하고 성찰하는 바탕 위에 선 교회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모두가 부지런하게 묻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게을러서, 또는 믿음이 삶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기 때문에, 때로는 삶 자체가 녹록치 않아서 당장에 급한 것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어느새 그리스도교 신앙을 묻고 배우는 일은 뒷전으로 처집니다. 따라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겠다는 다짐을 하고 실천을 해야 합니다.

한편 믿음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때에도 때때로 진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믿음의 습관이 우리 안에 깊숙이 박혀 있고, 이것을 빼내는 것은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참된 믿음을 보겠냐고 한탄하셨고, 언제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다수이기보다는 소수입니다. 그러나 그 소수가 결국은 큰일을 해내고, 작은 겨자씨에서 온갖 새들이 깃들 나무가 나오듯, 진짜 신앙을 가진 이들을 통해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튼튼하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에 집중하여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일구려는 이들이 우리교회에 몰려오고, 참된 믿음에 서기 위한 일련의 배움 과정에 충실한 분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참된 믿음에 대해 몇 가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믿음 하나를 가지고도 다양하게 물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무엇을 믿는가?' '누가 믿는가?' '언제 어디서 믿게 되었나?' '왜 믿나?' '어떻게 믿어야 잘 믿는 것인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믿음의 내용과 다른 종교가 말하는 믿음의 내용은 어떻게 다른가?' '이 세상 사람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이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가?' 우리는 실로 많은 물음을 물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두 가지만 말하려고 합니다. 즉 '믿음이란 무엇인가?' 와 '무엇을 믿는가?'입니다. 우선 영어에서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는 동사는 17세기 이전에는 사람을 대상으로만 쓰였고, "내가 너를 믿는다." "믿음직스럽다"와 같은 신뢰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믿음이란 오래도록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신뢰관계라는 것입니다. 제가 저를 처음 보신 분께 느닷없이 한 100만원만 꾸어 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당연히 그 분은 거절할 것입니다. 저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저를 오래도록 보아오고, 알고 있는 제 친구에게 부탁을 한다면 아마 기꺼이 꾸어 줄 것입니다. 오랜 시간 만나고 사귀면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두터워졌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사귐의 과정을 통해 서로를 어느 정도 알고 그 과거의 앎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상대가 믿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뢰관계가 형성되려면 반드시 상대에 대한 앎이 필요합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자연스런 행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지식 정보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만. '앎'에는 몸으로 겪어서 아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려면 하나님에 대한 앎도 필요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겪었던 체험도 필요한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우연으로 보이지만 신앙인들이 자신의 삶을 반추했을 때 마치 하나님의 뜻과 이끄심으로 여겨지는 경험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반드시 앎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한편으로 앎을 넘어섭니다. 상대에게 돈을 꾸어 주었지만, 그가 갚을지, 갚지 않을 지는 아직 모릅니다. 확실히 갚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확실히 갚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100% 확실한 앎은 아닙니다. 저를 믿고 돈을 빌려 준 친구는 나를 어느 정도 알지만, 갚으리라는 것에 대하여 여전히 모름이 남아 있습니다. 그 때에 믿음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친구는 돈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음에도 믿음을 가지고 빌려 준 것이고, 이렇게 믿음에는 반드시 앎과 모름, 그리고 아직 알지 못할 때에도 과감하게 행동하는 모험의 요소가 반드시 포함됩니다. 즉 적당한 앎과 모름을 간직한 채 작동되는 믿음은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이제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믿음을 다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면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지적인 측면을 영어로 belief(믿음)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으면서 알게 된 하나님을 머리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믿음에는 감정적 신뢰가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깊어지면 마음에서부터 저절로 믿어지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trust(신뢰)라고 합니다. 머리로도 이해가 되고 가슴으로도 믿어지면 그에 따른 행동이 이어져 옵니다. 이것을 영어로 act(행위)라고 쓸 수 있겠지요. 그리스도교의 고전적 언어로는 commitment(헌신)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하나님과 미래는 언제나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되고 가슴으로 믿어지고 그렇게 알고 믿는 대로 살아도 언제나 하나님은 더 넓고 더 깊고 더 크신 분입니다. 동시에 우리 인간의 삶 또한 고정되거나 완결되지 않기에 얼마든지 예측 불가능한 사태가 발생하고 알 수 없는 우연의 연속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런 측면을 영어로 mystery(신비)라고 합니다. 이 신비를 여전히 간직하는 것 또한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앙입니다.

이해를 동반한 믿음(belief), 오랜 사귐에서 비롯된 감정적 신뢰(trust), 알고 신뢰하기에 행하는 헌신(act, commitment), 그럼에도 여전히 모름을 간직하며 겸손하게 맞이하는 신비(mystery). 이 네 가지를 간직한 신앙이야말로 삶으로 이어지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불충분합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 "무엇을 믿는가?"에 답할 차례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다른 신이나 이념, 물건이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답은 다시 묻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또 한참을 얘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이렇게 고쳐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배후에 세상의 근원이 계시며, 시공간에 자리한 눈에 보이는 수많은 것들 뒤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유한한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무한한 실재가 계시고, 무한한 실재는 바로 이 유한한 사물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태초에 온 우주를 만드실 때부터 가지셨던 그 뜻과 계획에 대하여 우리는 "예"라고 대답함으로써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뜻에 우리를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보이는 세계를 통하여 오히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이 보이는 세계를 살아갈 때 의연하게 대처할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현재 경험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향해 나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아는 세상의 심판 이후에 새롭게 창조될 의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구원의 방주를 지었습니다(히 11:7).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나라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히 11:10). 그래서 어디로 갈 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긴 여행을 떠났던 것입니다.(히 11:8-12).

오늘 잠언의 말씀에는 믿음의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에게 나누어 주는데도 더욱 부유해 지는 사람,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마실 물을 주며, 좋은 일을 애써 찾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믿었기에 오히려 참된 삶의 의미와 근심 걱정 없이 사는 법을 익히고 주면서 얻는 기쁨과 풍성함을 누렸습니다. 시편이 말하는 믿음의 사람도 그러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고, 복을 받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그의 옳음이 영원토록 칭찬을 받았으며, 어둠 속에서도 빛이 비쳤습니다.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삶이 되었고, 두려움 없는 삶을 살면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 악인들처럼 헛된 욕망에 자신의 삶의 뿌리를 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주 동안 한국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씨의 수상 소감이 한국인들뿐 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 회자되었습니다. 저 또한 크게 감동을 받았는데 특히 이 부분이 그러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경쟁을 믿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글렌 클로즈를 이기겠어요? 글렌 클로즈 같은 배우를 넘어서겠어요? 전 그녀의 여러 연기들을 보아왔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후보들, 5명의 후보가 각자 다른 영화의 수상자들입니다. 우리 모두 다른 역할을 연기했어요. 그러니 서로 경쟁을 할 수는 없는 거예요. 오늘 이 자리에 제가 서 있는 건 제 생각엔 약간의 행운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보다 좀 더 행운이 따라줬나봐요."

(see, I don't believe in competition. How can I win Glenn Close? win over Glenn Close? I have been watching her so many performances, so this is just... all the nominees, five nominees, we are the winner for the different movies. We played different roles, so we cannot compete with each other. Tonight I'm here is that just because of a little bit of luck, I think. Maybe luckier than you.)

저는 윤여정 배우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잘 모르고, 또 그녀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이 수상 소감은 그리스도교의 신앙 정신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교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 우주 곳곳에 숨어 있고 새겨 있습니다. 윤여정 선생님의 말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드라마 속에서 각각 제 역할들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경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우리들 자신이 주님께만 충실하다면 그 뿐입니다.

오늘 저는 저와 여러분이 자신의 믿음을 살펴서 진짜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올바르게 믿으시길 빕니다. 매주 금요일 업로드 되는 사도신경 강해가 여러분의 믿음을 더 단단히 하고, 깊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옳게 믿어 여러분의 삶이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은총이 언제나 가득하시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주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신앙의 유산들이 대대손손 이어가게 하소서. 우리 어른들이 먼저 참된 신앙을 회복하게 하시고, 믿음의 본을 보여 자연스럽게 어린이 청소년들이 배우게 하여 주소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따라 살지 않게 하시고, 스스로 물어가며 올곧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종교적 욕망을 채우는 것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우리의 믿음으로 갖게 하여 주소서.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사역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재현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참된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하나님! 오월을 열며 감사의 예물을 드립니다.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작은 정성을 모읍니다. 주님께서 받아 주소서. 주님께 드리는 이 예물을 마련하기 위한 우리의 노동이 진실하게 하시고, 주님께 기쁨으로 드리게 하여 주소서. 삶의 보람을 누리며, 이웃과 나눌 때에 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며, 주어진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게 하여 주소서. 주님께 드리는 손이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진리를 위하여, 더 큰 사랑을 위하여 과감하게 놓을 줄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자신을 드림으로서 더 큰 사랑과 믿음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시고, 우뚝 솟은 산처럼 믿음직한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생명사랑 신앙공동체를 통한 모든 주님의 사역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게 하여 주소서.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참된 믿음을 회복하십시오. 믿음 없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으로 늘 푸른 나뭇잎처럼 풍성한 삶을 누리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믿음을 굳건히 하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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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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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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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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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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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