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기독교인의 구원은 참 사람 예수의 정신과 삶이다!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전직 지질학자

입력 Apr 09, 2021 10:52 P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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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사제관 앞 기도처에 서 있는 고난 받는 예수상.

1세기에 초대 기독교는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는 "예수의 현세적인 기독교" 곧 "예수 기독교"로 탄생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심각하게 변질되었다. 마침내 원초적인 참 사람 예수를 노숙자로 추방하고, 그대신 "만들어진 예수"를 성상의 자리에 앉히고 그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황금만능주의의 내세적인 기독교" 곧 "교회 기독교"가 등장했다.

교회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에서 가장 잘못된 것들 중 하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믿는 형이상학적인 믿음의 맟춤형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참 사람 예수의 "정신과 삶"을 불필요한 것으로 무시했다. 다시 말해 인간 예수를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 예수로 변형시켰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이 잘 알고 있듯이 325년에 로마제국의 정치적인 야욕의 꼭두각시가 된 교회 지도자들이 니케아 신조를 만들어서 참 사람 예수의 인간성(人間性)을 철저하게 말살하고, 만들어진 예수의 신성(神聖)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니케아 신조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었던 원초적인 초대 교회는 "예수의 의미"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다. 주류 신학계의 성서학자들은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들을 예수의 삶에 기초하고 있다는 데에 이의가 없다.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는 그의 삶에 기초하고 있으며, 만들어진 하느님 예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예수 부활 사건은 참 사람 예수의 가르침과 삶 곧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깨달은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이 부활한 놀라운 체험이다.

1세기에 예수가 죽은 후, 예수의 정신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부활한 사람들은 예수의 현세적인 삶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윤리관을 살아내었다. 예수의 죽음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인식하게된 혁신적인 사건이 되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예수의 몸은 영원히 죽었다. 예수의 죽은 몸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의 몸이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예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났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을 넘어서는 경이로운 체험이 자신들의 가슴과 머리에서 일어났다. 성서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기록된 주요 동기와 목적은 참 사람 예수의 생애와 예수가 가르치고 살아내었던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의 중요함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이 세계가 멸망하고, 최후의 심판에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구원의 확신을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찾으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을 예수의 십자가와 그가 흘린 피에서 찾는 것은 비상식적이고 불량한 신학이 만들어낸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술책에 불과하다. 예수 부활 이야기가 탄생하게된 원동력은 참 사람 예수의 삶과 정신이며, 이것은 원초적으로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다. 예수의 삶은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의 모범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삶을 거부하고 무시한체, 만들어진 예수에 대한 믿음을 맹종하면서 오직 죽음과 피에만 메어달리며,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거짓된 대속론의 꼭두각시가 되어 잘못된 교리에 세뇌되었다.

부활절의 의미는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1세기의 초대교회는 수백 년 동안 성탄절을 지키지 않았지만 부활절은 교회의 탄생부터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절기였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와 목적이 있다. 그러나 오늘 교회에서 원초적인 부활의 참된 의미와 기독교가 탄생하게된 원동력으로서의 부활이 왜곡되어 상업적으로 변질되어 그것때문에 교회가 죽어가고 있다. 부활은 대속론(代贖論)과 천국-지옥의 이분법적인 내세적인 구원론에 대한 교리가 아니다. 부활은 이 세상이 멸망하는 종말론에 대한 것도 아니고, 죽음 후에 천국으로 올라가 영원히 사는 내세론도 아니다. 성서가 선포하려는 예수 부활 이야기의 핵심은 성전종교와 로마제국의 불의한 세력의 탄압과 착취 아래에서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로 비겁하게 숨죽이고 움쿠리고 있던 인간의 의식과 인간성이 다시 새롭게 살아나서, 그것으로 이 세계가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예수가 죽은지 50년이 지난 후에 최초로 기록된 마가복음서의 부활절 이야기는 예수의 신성이나 대속론의 교리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하고 무시해버리는 로마제국의 제국신학과 예루살렘의 성전신학에 의해서 잃어버렸던 참된 인간의 사람다운 삶을 되찾은 이야기이다. 참 사람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난 기적이 아니라, 잊어졌던 예수의 가르침과 삶의 모습이 가슴과 머리에서 새롭게 깨어난 놀라운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가 가르치고 자신이 구체적으로 살아내었던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이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서 다시 살아나 그들의 비겁함이 용감함으로, 이기적이고 부족적인 생존의 두려움이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개방된 삶으로 부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실상 예수의 부활은 그들의 부활이었다.

성서의 예수 부활 이야기에 등장하는 '빈 무덤'은 헬라문화 속에서 살고있던 유대인들에게 보편적인 전설이었다. 고대의 영웅전들에서 영웅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빈 무덤을 남겨놓고 신들의 세계인 하늘 위로 올라갔다. 또한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복음서의 빈 무덤에 대한 기록은 후대에 필사가들에 의해서 사본에 첨가된 내용이며, 성서원본의 저자들의 생각이 아니다. 신약성서의 최초의 저자이고 예수 부활의 의미를 가장 심층적으로 증거한 바울은 빈 무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바울은 문자적인 빈 무덤이 부활의 진리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활은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었던 의식과 인간성이 되살아나는 새로운 각성, 깨달음 또는 거듭남이기 때문이다.

부활(resurrection)이란 말의 의미는 숨이 끊어져서 죽었던 몸이 생물학적으로 다시 소생하는 것 (resuscitation)이 아니다. 신약성서를 최초로 기록한 바울과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 부활 이야기에서 빈 무덤을 문자적으로 소개하지 않았다. 성서가 밝히는 예수 부활의 의미는 예수가 죽은 후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의식과 인간성에서 잊어져던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이 활화산이 폭발하듯이 용솟음쳐 올라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의 삶이 용기와 희망과 생기가 넘치는 사건이다.

현대 기독교인들도 자신들의 삶 속에서 부활의 체험이 가능하며, 참 사람 예수의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 비전을 인식하며,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세상의 비전을 가지고 매일매일 심층적으로 의미있고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삶, 새로운 패러다임을 두려워 하기보다는 온갖 경계들 곧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인종차별, 종교차별, 빈부차별을 넘어서서 참된 인간으로 보다 성숙하게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입으로만, 머리로만, 수동적이고 관념적으로 믿기 보다는 몸으로 구체적으로 사는 부활의 삶이다.

기독교인들의 핏 속에는 역사적 예수의 정신이 흐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가까이에는 자신들의 가정과 사회와 멀리는 지구촌에 살고 있는 모든 동료 인간들이 불공정한 분배의 불의와 불평등 속에서 탄압과 착취를 당하지 않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교회가 만든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이고 우월적인 교리들을 페기처분하고 온갖 경계 넘어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며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지구촌의 빈곤과 전쟁과 테러와 생태계의 파괴를 막고 온 인류의 웰빙을 위해서 헌신하며 살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북한 동포들을 주적으로 삼지 않고, 불교인들과 회교도들과 무종교인들을 배척하지 않고, 그들을 존중하며 조건없이 사랑하며 살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두려움과 편견과 미움과 원한을 조장하는 인격신론의 유신론적이고 내세론적인 믿음체계를 거부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부활은 과거에 단 한 번 있었던 사건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 자연의 법칙이 깨어진 기적이 아니다. 첫 번째 부활은 1세기에 예수의 제자들의 삶 속에서 일어났지만,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성스러운 생명이며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이 확장되고, 불완전한 상태에서 온전한 상태로의 긍정적인 변화의 부활은 오늘 우리의 사회에서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그리고 생태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고, 자연의 법칙이고, 진화의 법칙이다.

부활은 지금 여기 이 세계에서 순간순간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의 참된 인간으로 새롭게 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부활의 참된 인간은 각 사람이 따로 분리되어서 홀로 외롭게 살기 보다는, 사심없이 사랑하고 용서하고, 서로 존중하고 돌보면서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성숙한 공동체생활을 공유한다. 참된 인간은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벗어 버리고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만족하게 행복하게 산다. 참된 인간은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나는 내세를 맹신하지 않고, 인간은 일회적인 것을 인식하고 지금 여기에서 사는 것이 영원함을 사는 것임을 인식하고 매일매일 새롭게 즐겁고 자유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간다. 참된 인간은 자율성과 창조성과 잠재력과 가능성이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항상 생명력이 넘친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생애 가운데 마지막 날들에 관해서는 익숙하게 알고 있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이후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슬픔과 절망 속에서 예수의 죽음을 정신적으로 어떻게 정리했는지, 어떤 깨달음에 근거해서 예수의 삶을 새롭게 이어가기로 결단했는지,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 경험은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 좋은 예를 들자면, 신자들이 대단히 소중하게 여기고 예배에서 빠지지 않고 암송하는 사도신경은 예수의 탄생에 이어서 그의 삶은 완전히 삭제된체 곧바로 죽음과 부활로 넘어간다. 특히 교회가 상업적으로 만든 대속론에 세뇌되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십자가 보혈이라고 고백해왔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만 중요했지, 예수의 정신과 삶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예수의 정신과 삶을 도외시한 결과, 로마제국도 죽이지 못했던 예수의 개혁적 정신과 비전을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이 죽이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의 죽음에만 메어달리며,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비상식적인 대속론의 교리에 정신병적으로 세뇌되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죄의 용서라는 괴상한 논리는 우주진화 세계관과 가치관이 교육과 종교와 철학의 기초가 되고 있는 21세기의 주류 사회에서 설득력과 신뢰를 잃었다. 과학시대의 현대인들은 원시적인 대속론을 이해하기 대단히 어렵다. 무엇보다고 참 사람 예수의 정신과 삶이 교회 안에서 침묵당하기 때문에, 예수에게 솔직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은 교회가 가르쳐왔던 십자가에 달린 유신론적 예수를 떠나 우주적이고 무신론적인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는 길을 찾아나서고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는 참 사람 예수의 정신과 예수가 가르치고 살아내었던 새로운 의식과 인간성이 소중함을 선포하는 것이다. 1세기에 예수가 죽은 후, 예수의 정신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부활한 사람들은 예수가 말한 것처럼 말하고, 예수가 산 것처럼 살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모습에서 그들을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불렀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죽음이나 부활을 믿어야만하는 교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1세기에나 21세기에 기독교인들의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보혈을 관념적으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세속적인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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