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성경이 말하는 방언(19)
김승진 침신대 명예교수(역사신학·교회사)

입력 Dec 21, 2020 09:51 AM KST

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VIII. 고린도전서 14장에서의 방언

c. 14장 13-19절

김승진
(Photo : ⓒ 침례교신학대학교)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사도 바울의 인간관에 의하면 영과 혼과 몸은 분리되어서 따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몸"(體, soma, body)은 인간의 육체를 의미하고, "혼"(魂, phuske, soul)은 인간의 정신작용 즉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성적 활동을 하는 영역이고, 그리고 "영"(靈, pneuma, spirit)은 하나님과 교통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이해하는 영적인 영역이라고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이 셋이 따로따로 제각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혼 그리고 몸과 영이 분리되는 것을 성경은 육체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your whole spirit and soul and body-KJV)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온"(whol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영과 혼과 몸의 통합적 속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셋은 상호 통합이 되어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형성합니다. 인간은 "전인적 존재"(全人的 存在, the whole being)입니다. 영과 몸, 혼과 몸이 분리되어 활동할 수 없듯이, 영과 마음이 분리되어서 영 따로 마음 따로 활동한다는 생각은 기독교적인 인간관이 아니라 바로 이교도들의 인간관이라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몸과 영과 마음을 통전적(通典的)으로 이해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ta somata 'umon, your bodies-NIV)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ten logiken latreian, spiritual act of worship-NIV)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tou nous, mind-NIV)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면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kardia, heart)과 목숨(phuske, soul)과 뜻(dianoia, mind)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마 22:37-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en 'ole te kardia sou, with all your heart-NIV) 목숨을 다하고('en 'ole te phuske sou, with all your soul-NIV) 뜻을 다하여('en 'ole te dianoia sou, with all your mind-NIV)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인간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ablity to think)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인간들에게는 자유의지(free will)를 선물로 주셔서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들이 타락함으로 그러한 능력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향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이끄시면 여전히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藏)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에는 자연적인 영역(natural sphere)과 초자연적인 영역(supernatural sphere)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이성(超理性, super-reason)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faith)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성(理性 reason, 마음 mind)을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성(靈性, Spirituality)은 이성(마음)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이성(마음)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초이성적(超理性的)이지만 비이성적(非理性的)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이성인 믿음도 필요하지만 이성이라는 생각과 마음의 활동도 필요한 것입니다. 성서적인 믿음은 초이성적이지만, 비성서적인 미신(迷信, superstition)은 비이성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UT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비이성적이며 비성서적인 미신이나 이교도적인 신비주의 신앙행습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b, 'o de nous mou 'akarpos 'estin, but my understanding is unfruitful-KJV, but my mind is unfruitful-NIV)는 말씀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UT방언에 대한 입장과 속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14절의 내용을 필자의 설명을 곁들여 다시 한번 더 인용합니다:

(고전 14:14) "(그러한 UT방언 기도는 내가 하지도 않지만), 내가 만일 UT방언으로 기도한다고 한다면 (UT방언을 말하는 너희가 주장하듯이)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러나(그렇지만, de, but) 나의 마음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해."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열매"는 희랍어로 카르포스(karpos, fruit)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열매"(갈 5:22, karpos tou pneumatos, the fruit of the Spirit-KJV, NIV)에 관해서 언급할 때에도 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단어 앞에 부정(否定)을 의미하는 접두사('a)를 붙여서 형용사 "열매 없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akarpos, unfruitful)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은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모욕을 줄 때 쓰는 매우 강렬한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UT방언에 대해서 쓰면서 "내가 만약 UT방언 기도를 한다고 하면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자책(自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은 자신이 한 모든 기도의 수고가 "헛 일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중얼하는 UT방언 기도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헛 일이다, 아무런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UT방언 기도의 유익성을 그렇게나 강조하는 UT방언 주창자들은 사도 바울 자신의 이러한 진실한 고백을 어떻게 듣고 계십니까?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시는 예수님도 잎만 무성한 채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향해 어떻게 책망하고 저주하셨는지를 복음서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막 11:12-14, 20-2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마 7:15-20)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사도 바울은 UT방언 기도를 아무리 오랜 시간 동안 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영과 혼(마음, 정신, 이해력, 건전한 이성적 활동)이 분리된 채 "영으로 기도한다"고 주장하는 고린도교회 일부 교인들(UT방언 주창자들)을 향해서 그러한 기도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는 헛수고에 불과하다고 질책(叱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이어서 바울 자신은 이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나는-필자 주)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나는-필자 주) 영으로 찬송하고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ti oun 'estin, What is it then?-KJV, So what shall I do?-NIV)라는 번역이 별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4절의 내용("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을 이어받아서, 사도 바울은 "그러면 도대체 이게 뭐지?"(What is it then?-KJV)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지?"(What, then, does this mean?)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David E. Garland, I Corinthians, 657.]. UT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마음과 정상적인 생각과는 동떨어진 채)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라는 UT방언 주창자들의 주장에 대해 "도대체 이게 뭐냐"고 힐문(詰問)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나는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나는 영으로 찬송하고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b)고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14절은 UT방언 주창자들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고 15절은 바울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 말입니다. 바울 자신은 영과 마음이 합일된 상태에서, 다시 말하면 제 정신으로 자신의 언어로 전인격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오늘날의 UT방언 주창자들은 기도를 할 때 UT방언 기도와 정상적인 언어로 하는 기도를 번갈아 가며 섞어서 하는 것으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구요셉, "방언이란 무엇인가?: 성경으로 살펴 본 올바른 방언과 예언의 의미,"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qPAzx6HQ69w&t=2s, 2019년 4월 20일 접속.]. 기도하는 중에 어떨 때는 중얼중얼 UT방언으로 기도하고 또 어떨 때는 맨 정신으로 한국말로 기도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지금 영과 마음이 하나된 상태에서 "정상적인 언어로," "제 정신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하고 찬양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전인격적인 인간관(人間觀)에 입각한 기도요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영과 마음이 서로 연결된 상태 즉 "정상적인 언어로, 그리고 제 정신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14:16-17)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누군가가 축복의 말을 할 때에 "아멘"으로 화답하려면, 그 말을 알아듣고 이해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들"(불신자들이나 초신자들, those who do not understand-NIV)은 그 축복의 말을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뜻 모를 UT방언으로 축복하거나 감사를 한다고 하면, 그 뜻과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덕 세움을 주지도 못하고 덕 세움을 받지도 못한다고 바울은 비꼬며 비난하듯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David E. Garland, I Corinthians, 640-3.].

사도 바울은 자신이 "내가 너희 모든 사람들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I thank my God, I speak with tongues more than ye all-KJV)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8절에 나오는 방언은 복수형으로서 LT방언(외국어 혹은 언어, glossais lalo, speak with tongues-KJV, speak in tongues-NIV)입니다. 오늘날의 UT방언 주창자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사도 바울이 중얼거리는 소리로서의 방언(UT방언)을 더 많이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LT방언(glossais, 언어 혹은 외국어)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비롯해서 헬라어, 라틴어, 다소(Tarsus) 지역의 사투리 방언 등 다양한 외국어들(LT방언들)을 말할 수 있는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러 차례 소아시아 지역과 마게도니야 지역과 남부 그리이스 지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LT방언의 은사를 고린도교회의 어느 성도들보다도 자신에게 더 풍성하게 주셨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절에서 언급된 "일만 마디 방언"이라는 단어는 단수형, 즉 중얼거리는 UT방언입니다:

(고전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UT방언, 'he murious logous en glosse, ten thousand words in an unknown tongue-KJV)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다섯 마디 말"은 예언을 가리킨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의미 없이 중얼거리는 소리인 UT방언으로 하는 일만 마디 중얼거리는 소리(voice)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그것을 남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하는 다섯 마디 예언의 말들(speeches, words)이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만"(murious)으로 번역된 단어의 원형은 "무리오이"(murioi)인데 이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양(量)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영어로 myriad(무수한, 일만)라는 말이 이 단어에서 왔습니다[Arndt and Gingrich, ed.,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529.]. 그러니까 단순히 "일만 대 오"(10,000:5, 즉 2,000:1)라는 숫자적 비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UT방언으로 아무리 셀 수 없이 많은 소리(immeasurable number of voice)를 발설한다고 해도 교회에서는 전혀 무용지물이고, 오히려 혼란과 무질서로 교회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과장해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섯 마디 예언을 말하거나 다섯 마디 통역된 LT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리며 내는 UT방언 소리보다 더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UT방언은 소리를 내는 것이지 말(의사소통, 대화)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감정주의(self-centered emotionalism)의 발로이고 자신의 육감적인 욕구(fleshly desire)를 발산시키는 행동이고 자기만족감(self-satisfaction)을 충족시키는 이기적인 종교행습이지, 성령으로부터 연유한 참 은사가 아니라고 바울은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David E. Garland, I Corinthians, 642.]. 결국 UT방언으로는 말하지도 말고 기도하지도 말라는 훈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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