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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예수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반대하는 "무신론자"가 되었나?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전직 지질학자

입력 Dec 16, 2020 08:25 AM KST

138억 년 전 빅뱅으로 우주가 출현한 전후에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는 없었다. 물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21세기 과학시대에 유신론과 무신론 중에 누가 옳으냐 논쟁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시간과 물자 낭비일뿐이다. 인간과 분리되어 (하늘 위에) 존재하는 신은 삼층 세계관의 고대인들이 만든 창작품이다. 다시 말해 30만 년 전에 인간에게 자의식이 등장했고, 4만 년 전에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하늘 위에 존재하는 전지전능한 신을 만들었다.

우리가 속해있는 우주세계는 태초로부터 신 없이, 종교 없이, 무신론적으로 우연적이고 자연적으로 출현했다. 인간 생물종을 포함해서 우주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들은 어느 하나도 챠별되고 분리되지 않고,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이 우주의 법칙에 간섭하고 조정하는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는 고대 인간들이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부수적인 수단이었다. 그런데 인류역사에서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신은 이분법적인 차별주의와 우월주의로 사람들을 멋대로 간섭하고 통제하는 착취의 도구가 되었다.

인류역사를 뒤돌아볼 때, 오늘 현대인들에게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신은 거짓과 은폐의 수단이 될 뿐이기 때문에 절대로 필요없다. 이런 신을 믿음체계가 강요하는대로 억지로라도 믿는다해도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기적이 일어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죽은 후의 천국은 없다. 이제 인류는 인격신론의 유신론을 떠나보내야 한다. 이 유신론에 근거한 종교들은 인류역사에 수많은 피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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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사제관 앞 기도처에 서 있는 고난 받는 예수상.

역사적 예수는 이 우주의 법칙에 근거한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가르치고 자신이 구체적으로 살아냈다. 예수에게 하느님(god)이란 말은 신의 이름이 아니다. 예수의 하느님은 믿어야하는 객체적 존재가 아니다. 예수의 하느님은 삶의 방식이고,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사는 비전이다. 역사적 예수는 충실한 유대교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거부한 무신론자 유대교인이였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는 유대교를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는 성전종교(유대교)가 철저하게 신봉하던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반대했다. 유신론적 성전신학에서 맹신하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하늘 위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이고 인격적인 신이다. 유신론적 성전신학에 따르면, 하느님은 오직 선택받은 깨끗한 유대교인들만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날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의 용서와 축복과 보호를 받기 위한 반드시 필수조건들을 이행해야 한다. 즉 모든 사람들은 예외없이 성전에 희생재물과 십일조를 바쳐야 하며, 성전이 만든 법률들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98%의 민중들은 하루에 한끼 먹기도 어려운 극심한 빈곤과 질병 속에서 사람답지 못하게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에게 성전에 바칠 희생재물과 십일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했으며, 그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성전이 강요하는 613개 율법조항을 지키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더욱 괴상하게도 성전종교는 가난과 질병을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이라고 규정하고, 가진 것이 없고 병들고 힘없는 사람들은 더러운 죄인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밖으로 추방했다.

예수는 이러한 성전종교의 유신론적 신학에 철저하게 반대했다. 예수는 성전이 맹신하는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거부했다. 예수에게 하느님의 의미는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이고 진노하고 심판하고 징벌하는 잔인한 하느님이 아니었다. 예수의 하느님은 옹졸하지 않았고, 유대인들만 구원하는 부족적인 하느님이 아니었고,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지도 않았고, 어린이들을 업신여기지 않았고, 가난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들을 따뜻한 품에 안아 주었다. 예수는 계급차별, 성차별, 빈부차별, 인종차별, 종교차별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성전의 초자연적 유신론의 하느님을 완강히 거부했다. 따라서 예수의 목회현장은 성전이 아니라, 민중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성전종교는 유대교에 속한 유대인이 아닌 다른 모든 인종들과 민족들을 이방인으로 규정했다. 유대교의 하느님 즉 성전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마땅히 하느님의 징벌을 받아 지옥에 떨어진다고 굳게 믿었다. 예수는 이러한 성전의 하느님을 거부한 유대인 이방인이었다. 다시 말해 하늘 위에 존재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방인이며 이것을 현대어로 전환하면 무신론자이다. 오늘 현대교회는 성전종교의 불량 신학을 답습하여 교회에 나오지 않고,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이방인 내지는 무신론자로 정죄하고 있다.

예수가 죽은 후에 유신론적 성전종교에서 퇴출당한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가 가르쳐준 새로운 의미의 하느님, 다시 말해, 종교체제가 만든 교리적인 율법조항들을 필수조건으로 믿을 필요가 없는 무신론적 하느님을 공동체적 생활 속에서 살아내었다. 원초적으로 초대 교회의 하느님은 참 사람 예수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무신론적 하느님이었다. 성전과 결별한 처음 기독교인들의 하느님은 믿어야만 하는 유신론적 즉 객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예수가 살아내었던 삶과 생명 그 자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3세기가 지난 후에 로마제국의 폭력적인 황제의 명령에 굴복한 교회는 역사적 예수를 배반하고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유신론적 하느님으로 변질시켰다. 이것이 니케아 신조의 탄생이었으며 오늘까지 교회는 유신론적 예수, 하느님 예수를 맹신하고 있다. 또한 유신론을 반대하는 무신론은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을 면치 못한다는 불량 믿음으로 세뇌되었다.

그러나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이래 지난 4세기 동안 인류역사는 급격한 미래의 물결에 휩쓸렸다. 또한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잠자고 있던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이 용솟음쳐 깨어났다. 특히 첨단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들이 확장되면서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음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21세기 과학시대에 하느님을 유신론적으로 믿는 시대는 끝났다. 오늘 존재론적 하느님 개념이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으며, 인격신론의 하느님이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비상식적인 징표는 교회의 안밖에서 드러나고 있다.

결국에 하느님이 죽어가는 원인은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의 의식과 지식 수준이 넓어지고 깊어졌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더 이상 지구가 평평하다는 삼층 세계관이 현대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윤리관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몸과 영혼, 이 세계와 다른 세계, 천국과 지옥, 물질의 세계와 영의 세계 등의 이원론적 분리도 비상식적인 말이 되었다. 무엇보다 진보적인 신학자들의 역사적 예수 탐구가 오랜 세월 과거의 패러다임에 젖어있던 인습적인 기독교인들의 눈과 귀를 열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은, 오늘 세계적으로 기독교를 주도하고 있는 성서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성서비평 연구에 따르면, 원초적으로 참 사람 예수에게 하느님의 의미는 신의 이름도 아니고, 믿음의 객체적 존재도 아니고, 다만 경계 넘어 만인 평등과 조건없는 사랑과 공평한 분배의 정의였다. 다시 말해 역사적 예수는 믿어야하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배척하고, 살아내는 무신론적 하느님을 선포했다. 더욱이 예수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의 신성을 주장하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를 유신론적 하느님으로 믿도록 강요하는 교회는 예수가 성전을 향해 경고한대로 "회칠한 무덤"과 같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유신론적 하느님과 무신론적 하느님을 분별해야 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잘 모른다. 하느님이란 믿음과 불신의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참 사람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아내었던 무신론적 하느님은 우주를 구성하는 개체들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상호의존관계를 살아내는 삶의 방식이다. 역사적 예수는 참된 인간성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예수는 부족적이고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과 그런 하느님을 인간 보다 더 소중하게 숭상하는 유신론적인 종교를 거부한 무신론자였다. 반면에, 예수가 철저히 반대했던 성전종교의 유신론적 하느님은 인간과 이 세계와 분리되어 외부 즉 다른 세계(하늘 위)에 타자로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신이다. 유신론적 하느님의 특징은 부족적이며 자신의 부족만을 보호하며, 비단 자신의 부족 내에서도 복종하지 않으면 징벌이 따르고, 순종하면 축복을 내리는 이분법적인 심판자이다.

참 사람 예수는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성전종교가 더러운 죄인으로 정죄하고 배척한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셨다. 예수는 소위 더러운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이것을 목격한 소위 깨끗하고 경건한 유신론자들은 예수에게 항의하고 비난하자, 예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재물이 아니다' 라고 기록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배워라..." (마태복음서 9:9-13, 20-22a, 10:1, 5-8) 2천 년 전이나 오늘도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의 참된 신앙은 유신론적 믿음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무신론적인 삶 그 자체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지식의 발달은 전통적인 하느님 개념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시켰다. 즉 하느님은 하늘 위에 또는 하늘 밖에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자기멋대로 인간 세계에 개입하고,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고 보상하고, 징벌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우주과학과 뇌과학과 컴퓨터공학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유신론적 종교를 거부하고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떳떳하게 천명하는 기독교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무신론자 기독교인은 부족적이고 제도적인 교회가 맹신하는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이란 필요없다고 인식한다. 따라서 유신론을 부정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무신론자 종교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종교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다. 많은 현대인들에게 하느님의 의미에 대한 종교체제 내지는 믿음체계에서 주장하는 유신론적 정의는 설득력과 신뢰를 잃었다. 기독교 교회는 유신론의 정의와 하느님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왜곡하기 때문에 단순히 비유신론자(nontheist)를 무신론자(atheist)로 단정해 버린다.

쉽게 말해, 유신론을 거부하는 것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무신론자로 치부한다. 그러나 138억 년의 우주역사에서 신(god)은 약 5천 년 전에 인간 사회에 등장했다. 교회 안에서는 지적 설계와 창조론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오직 교회 내부에서 통용되는 부족적이고 이기적인 주장일뿐 오늘 세계를 변화시키고 인류사회의 밝은 미래를 위해 장애물이 된다. 지난 수세기 동안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새롭게 인식하고, 교회의 유신론적 믿음체계를 떠나 인도주의를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이 급증해왔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다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이들 무신론자 인도주의자들이다.

하느님에 대한 유신론적 정의는 정확하게 말해서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성과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의 표현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불안을 극복하고, 욕심을 보호하고 안정을 찾으려는 수단으로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상상하고, 하느님의 보호와 축복을 보장하는 종교체계와 이에 따른 믿음체계를 창작했다. 이렇게 인간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신론으로 하느님을 개념화해서 자신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해소하고,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망상의 노예가 되었다. 1세기에 예수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등장했을 때 성전종교는 유신론적 하느님의 이분법적 통제와 착취가 극에 달했다. 따라서 민중들은 가난과 질병과 절망 속에서 살았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의 참된 인간성에서 성전종교의 유신론적 하느님과는 180도로 다른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를 이해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체험한 하느님은 무신론적 하느님이었다. 예수에게서 발견한 무신론적 하느님은 불치병자들, 가난한 사람들, 무식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여인들과 아이들, 이방인들과 소위 죄인들 등 종교와 사회에서 버림받고 쫓겨난 사람들을 포용하고 조건없이 사랑하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하느님이다.

고대인들의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에서 생겨난 유신론적 하느님을 현대 교회에서 여전히 맹신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21세기 과학시대에 하느님의 참된 의미는 실제적인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떨쳐버려야 할 망상이다. 종교(religion)는 하느님의 존재론적인 믿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계론적인 삶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유신론적 하느님을 떠나보내도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삶의 핵심은 신의 존재에 대한 교리적인 믿음이 아니었다. 오직 예수는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의 본성을 성전의 하느님 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 따라서 힘없는 민중들을 멸시하고 박대하고 탄압하고 착취하는 성전종교의 유신론적 하느님을 철저히 반대했다. 그리고 유신론적 성전신학에 정반대되는 생명과 삶의 철학 즉 신의 존재와 아무 상관없이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무신론적 삶에 대해 가르치고 자신이 몸소 살아냈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의 핵심은, 인간은 초자연적인 신 없이, 자율적으로 선할 수 있고, 창조적으로 의미있게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이렇게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사는 온전한 삶 그 자체가 하느님이다. 따라서 예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무신론자가 되었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교회 안밖에서 무신론자 기독교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적 예수의 참된 인간성에서 하느님에 대한 무신론적 의미를 인식하고, 예수가 산 것처럼 인도주의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무신론자들이 인류의 밝은 미래의 희망이다.

※ 이 글은 전 지질학자인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외부필자의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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