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모든 위로의 하나님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예레미야 31:10-14, 고린도후서 1:3-7, 마태복음 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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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요즘 한국은 트로트 전성시대라고 합니다. TV만 틀면 트로트 음악이 나옵니다. 트로트 음악의 붐은 '미스트롯'이 열고 '놀면 뭐하니 - 유산슬'이 끌고 '미스터트롯'이 열매를 맺었다고 말합니다. 50대 이상 중장년층만이 아니라 10~20대의 젊은 세대까지 열광한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왜 '흘러간 음악'이라 치부되던 트로트가 새삼 유행할까요? 그것의 시대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트로트의 유행은 요즘 사회문화 트렌드인 '복고'(復古), 즉 '레트로'(retro)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복고란 과거에 있었던 것의 반복이나 변형입니다. 복고의 특징은 '익숙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익숙한 것을 찾는다는 건 그만큼 지금 현실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보통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과거를 찾습니다. 불경기가 닥쳐오면 어느 사회건 복고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익숙한 것은 편안하고 위로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길을 가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새 일을 맡을 때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인간은 낯섬, 즉 익숙하지 않은 것을 접할 때 불편함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친숙해지려면 그만큼 에너지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낯선 것은 피곤합니다. 하지만 익숙한 것은 에너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익숙한 것은 낯선 것을 접할 때 생기는 경계심을 발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노력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래서 익숙한 것은 위로를 주고 쉼을 주고 새로운 힘을 줍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지금 트로트와 같은 레트로 문화가 크게 확산하고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주간 리포트, <2020 대한민국 트렌드>)

코로나바이러스로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 주요 14개국 국민 가운데 한국인들이 코로나 걱정을 '가장 많이' 한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국민일보, "코로나가 낳은 분노 · 낙인 찍기... 상호신뢰 바닥나는 한국,"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인터뷰 기사). 가장 성공적인 방역을 하고 있는데도 한국인이 '가장 불안'해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질병 그 자체보다도 확진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조사에서 '감염이 두렵다'는 응답자는 71.2%인데, '확진됐을 때 받을 사회적 비난과 피해가 두렵다'는 응답은 66.0%로 감염도 감염이지만 사회적 낙인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히 높게 나타났습니다. 감염이 되면 '왜 그렇게 처신했느냐'고 질타를 받을까봐 불안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말한 '정죄의 불안'입니다. 틸리히는 인간으로서 느끼는 본질적인 불안에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 '공허함과 무의미함의 불안,' 그리고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이 있다고 말했고, 이 세 가지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 실존 그 자체라 했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확진자'라는 용어를 쓴 적이 없습니다. 영어로는 "confirmed case"라고 하지만 우리말에서 확진자라는 용어는 '너 왜 감염됐어?'라고 책임을 묻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구별 짓고 배제하는 용어입니다. 감염되면 자신의 건강을 걱정해야 하는데 우리 국민은 남에게 '민폐를 끼칠까 봐' 걱정합니다. 따돌림을 당할까봐 두렵고 불안합니다. 그리고 이 '정죄의 불안'은 사회적 분노와 울분으로 이어집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많은 사람이 '코로나 블루'라는 우울감과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것이 길어지면서 우리 국민 절반 가까이가 만성적인 울분을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사회는 '울분(鬱憤) 사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코로나로 일자리를 잃은 실직자들, 취업 기회의 문이 아예 닫혀버린 2030 취준생(취업준비생)들, 독박육아를 하게 된 주부들, 그리고 거리두기를 '당해버린' 사람들, 즉 차별받고 배제된 낙인의 대상들에게서 매우 높게 울분이 나타납니다. 조사 결과 중증 울분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이 응답자의 11.9%로 이는 독일의 2.5%에 비교해 무려 5배나 높은 매우 우려할만한 수치입니다.

지금은 위로가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은 위로가 필요한 때입니다. '위로'(慰勞, comfort)란 다른 사람의 괴로움이나 슬픔을 달래 주려고 베푸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입니다. 성서에는 위로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서에는 위로받기를 거절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슬픔과 고통이 너무 크면 어떤 위로로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예레미야 31:15, 마태복음 2:17-18). 야곱의 아내 라헬(Rachel)은 자식을 잃고 위로받기를 거절했습니다. 사실 야곱도 사랑하는 막내아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갔으나) 들판에서 짐승에게 잡아먹혔다는 말을 듣고 절망 속에 위로받기를 거부했습니다.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창세기 37:35). 아무리 애써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해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이사야 57:6)라고 주변의 모든 위로를 거부했습니다.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떠나서 거짓을 고집하며 돌아오기를 거절하는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예레미야 8:18)라며 슬피 울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글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환난 속에서 아무도 위로할 자가 없어 탄식 속에 마음이 병들어가는 예레미야의 슬픈 노래, 즉 예레미야 '애가'(哀歌)입니다. 여러분도 성서의 이 사람들처럼 어떤 위로도 받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으셨지요?

하나님은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편 86:17)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교독문에서 시편 기자가 최종적으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의 죄악이 너무 깊어 어떤 위로도 받기를 거절했던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성서에서 가장 깊고 가장 높은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한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이사야 40:1) 제2이사야(이사야 40~55장)는 이렇게 입을 엽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그러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이사야 40:6-8) 풀과 같은 백성들 앞에서 실망했으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에서 근원적 위로를 찾은 이사야는 거기서새 힘을 얻고 드디어 메시아가 오실 것은 예언합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이사야 40:10-11). 비로소 이사야의 입에서는 기쁨의 노래가 터져 나옵니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이사야 49:13).

메시아 대망(大望)을 이어받은 제3이사야(이사야 56~66장)는 예수 그리스도(메시아)의 하실 일과 사명(mission)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예언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을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1-3/ 누가복음 4:18-19). 메시아는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선포입니다. 마음 상한 자를 고치고,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시는, 그래서 재를 뒤집어쓰고 슬피 우는 자에게 꽃으로 만든 관[화관(花冠)]을 씌워주시는 분이 메시아라는 선언입니다. 이런 사명을 가지고 오시는 목자와 같은 메시아는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이사야 66:13-14)라고 이사야는 자신의 예언을 끝맺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딸이라 불렀던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다시 그들을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들을 지키실 것이라 예언하며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예레미야 31:13)고 선포합니다. 성서는 이 세상에서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던 사람들에게서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하시는 목자와 같은 하나님, 메시아의 오심을 기대하는 소망이 터져 나온 책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쾰른의 어느 어둡고 습한 지하 동굴에 누군가 새겨놓은 글이 발견되었습니다. 나치는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지만, 연합군의 무차별 공습과 융단폭격 아래서 어둡고 습한 지하 동굴에 숨은 독일인들은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 하나님이 침묵 속에 계시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입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태양은 있습니다. 사랑이 느껴지지 않아도 사랑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져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하나님이 지켜주심을 믿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환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고 인도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 내가 지금 행복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나에게 고통이 없다는 뜻은 정말 아닙니다 / 마음의 문 활짝 열면 행복은 천 개의 얼굴로 / 아니 무한대로 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합니다 / 어디에 숨어 있다 고운 날개 달고 살짝 나타날지 모르는 나의 행복 / 행복과 숨바꼭질하는 설렘의 기쁨으로 사는 것이 오늘도 행복합니다." 이해인 님의 시 <행복의 얼굴>입니다. 행복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천 개, 아니 만 개의 얼굴을 가진 행복의 얼굴을 보셨습니까? 힘든 삶 속에도 행복이 있고, 행복 속에도 고통이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을 이항대립적으로 나누는 우리 생각의 습관이 불행의 시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 문 활짝 열면 우리는 행복과 숨바꼭질하는 설렘으로 오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릴 적 술래잡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가 보시기에는 금방 잡힐 곳이지만 아이들은 뻔한 곳에 숨어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며 하루 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행복은 그런 숨바꼭질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을 산다는 게 문득 외로워져 / 집을 나와 겨울거리를 걸어보니 / 차가운 바람에 한기를 느끼며 / 그동안 나의 몸을 따스하게 감싸주던 / 두터운 외투에게 고맙고, / 외투가 없으면 춥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내 몸에게도 고맙다 // 사랑에 실패한 후 /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해준 / 이별에게도 고맙고, / 쓰린 이별 덕분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 아직도 내 머리 위에서 / 무너지지 않고 든든하게 서 있는 / 푸른 하늘에게도 고맙다 //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가 / 문득 흐려져,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을 느끼며 / 인생을 산다는 건 / 행복하다가도, 문득 흐려질 수 있다는 것을 / 몸소 알려준 하늘에게 / 다시 또 고맙고 / 그걸 느낄 수 있게 /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주신 / 하나님께도 감사한다 // 고맙다 고맙다 / 다 고맙다 / 이 세상을 고마운 것투성이다." 김종원 님의 시 <고맙다, 고맙다, 다 고맙다>였습니다.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하루는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사는 게 힘이 들 때 이 말을 떠올립니다. 내가 불성실하게 보낸 오늘이 어제 죽은 이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간절한 내일'이라는 생각을 하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사실 내가 오늘을 산다고 해서 오늘이 나의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공유한 한 조각 빵처럼 서로 나누고 쪼개어 분배받은 것이며, 어제 죽은 이들이 그나마 채 먹지도 못하고 내게 알뜰히 남겨주고 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오늘입니까? 그렇습니다. 오늘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오늘이라고 해서 나의 것이 아닙니다. 어제 죽은 이들의 고귀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 선물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또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하루는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정호승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오늘이라는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 오늘을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게 하는 게 인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고 싶을 때 멈추게 하고, 멈추고 싶을 때 가게 하는 것이 인도입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잘못된 길을 갈 때 멈추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 생명의 길이 낯설어 뒤돌아 설 때 그 길로 과감히 나아가게 하심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2013년 4월에 영국에서 5천 명이 참가한 큰 마라톤 대회가 열렸을 때의 일입니다. 1등을 제외한 2등 이하 4,999명이 실격 처리되는 전대미문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1위로 선두를 치고 나간 선수 뒤를 따르던 2등 선수가 어느 지점에서 경로를 이탈하여 뛰게 되었고 그 뒤를 따르면 3등, 4등을 비롯한 나머지 모든 선수가 그 사람을 따라 뛰었던 것입니다. 실격 처리된 선수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결승점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자신이 잘못된 길을 달려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정말 맞는 길입니까? 지금 그 길로 계속 가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로마서 9:28)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계십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 땅 종 되었던 곳에서 구출하여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고(신명기 5:6, 민수기 15:41, 시편 78:14), 오늘 찬양대가 아름답게 노래해주신 것처럼 지금도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시편 23:2-3). 우리를 "고통에서 건져"(시편 107:28) "마땅히 행할 길로"(이사야 48:17), "샘물 근원으로"(이사야 49:10), 그리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요한복음 16:13) 인도하십니다. 성서의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우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요한계시록 7:17)을 약속합니다. 그렇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습니다]"(시편 6:8).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입니다. 그러므로]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올 것입니다]"(시편 30:5). 그러므로 성서가 말합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명기 31:6).

코로나에 감염되면 긴급히 도움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가족 빼고 1, 2명'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은 '아무도 없다'였다고 합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심히 고립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포용과 연대, 사회적 지지와 신뢰가 무너진 우리 모습입니다. 차가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삶속에 내던져진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세상은 '만인(萬人)에 대한 만인(萬人)의 투쟁의 장'처럼 되었습니다. 그 누구라도 확진자가 될 수 있는 시간, 우리는 '정죄의 불안'에 시달립니다. 구약성서의 욥처럼 "이웃에게 웃음거리[와] 조롱거리"(욥기 12:4)가 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떱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는 모든 정죄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바울의 말입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이사야 50:8-9). 이사야의 담대한 선언입니다. 그렇습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겠습니까]"(로마서 8:31-34a).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5-39).

"등 뒤에 살짝 안는 이 누구신가요? / 설레는 마음에 뒤돌아보니 / 산모퉁이 돌아온 가을 햇살이 / 아슴아슴 남아 있는 그 사람 되어 / 단풍 조막손 내밀며 걷자 합니다." 오광수 님의 시 <가을 햇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가을에 청명한 하늘과 선선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 그리고 샘나게 고운 단풍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등 뒤를 살짝 안으시고 손 내밀며 함께 걷자 하십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의 신약서신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고린도후서 1:3-4)십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의 위로로 이 환난을 이기시고 그 위로의 힘으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데살로니가후서 2:16-17). 아멘. (20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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