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 반(反)동성애 운동의 전략(스압주의)
장동민·백석대 교수(교회사)

입력 Oct 08, 2020 08:00 AM KST

1. 포괄적 차별금지법 발의

2020년 6월 정의당 장혜원의원 등 10명이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하였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 시안을 마련하였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 이후 7번의 발의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무산되었었고, 8번째 만에 법안 발의에 성공하였다. 우리 헌법 제11조의 평등권 조항을 시대에 맞도록 확대한 것이다. 기독교계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가장 강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이 법이 결국 LGBTQ(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 성정체성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 등의 성적소수자)를 장려하고 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하게 됨으로 우리 사회의 삶의 양식을 비기독교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다. 이 법안의 '차별'에 해당되는 23 가지 사유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은 '성별',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 등 성정체성 관련 3 가지다. 또한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에 대하여서도 차별을 금지하는데, 만일 동성 간의 결혼이 인정되게 된다면 동성 커플에 대하여서 차별하는 것도 문제가 될 것이다.

이 법안이 태동되던 초기부터 보수적 기독교계에서는 지속적으로 강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었다. 각 교단들과 기독교 연합 단체에서 동성애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목회자들은 지역의 공무원과 정치인들을 위협하다시피하고, 관계 기관에 연명 탄원서를 제출하고 전화를 거는 등 의사를 표시하였다. (필자도 기독교인 교수들의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이에 더하여 십 수 년 동안 기독교가 주최하는 각종 집회나 기도회에 이 문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였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나 이른바 "생활동반자법"(동성 간의 혼인 허용)이 통과될지는 불투명하다. 21대 국회에서 장혜영 의원 등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이 통과되기는 어려워도, 처벌 조항이 약화된 국가인권위원회의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있다. 아니면 다수의 국민들이 동성애나 동성혼을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에 둘 다 통과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법이 통과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전반적으로 동성애와 동성혼을 허용하는 사회적 분위기이고, 우리도 바짝 뒤를 좇고 있는 실정이다.

 2. 전략적 접근

이 글에서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어떤 전략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할지를 다루려 한다. '전략'(戰略, strategy)이 무엇인가? 전략은 군사용어로서 흔히 전술(戰術, tactic)과 구별되는데, 전술이 특정한 전투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기술이라면, 전략은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전망을 포함하는 책략을 가리킨다. 전략을 세우기 위하여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현실을 넓게 아는 것이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전략적 목표를 세우기 위하여서는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와 군사력, 경제력, 역사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 우리의 현실을 무시한 채 이상(理想)을 앞세워 무리한 정책을 세운다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은 둘째 치고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고려해야 할 현실은 어떤 것인가? 한 마디로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크리스텐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법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세속국가(secular state)다. 이론적으로는 이를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반동성애 운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이 무엇을 함의하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듯싶다. 성경이 동성애를 반대하기 때문에 동성애를 허용하는 법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아이디어인데, 이게 바로 크리스텐덤 방식이다.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오해는 우리 기독교가 지나온 역사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연세 드신 기독교 지도자들은 우리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착각할 만한 시대를 살았다.

135년 전 기독교가 전파될 때, 단순한 외래 종교의 하나로서가 아니라 정신적·물질적으로 우리나라를 구원할 사회 이념으로 각인되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기독교는 반봉건·반외세 투쟁에 앞장섬으로 국민의 호응을 얻었다. 해방 후 반공과 산업화가 우리의 시대적 과업이었던 시절, 교회는 반공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이념을 최일선에서 구현하는 집단이었다. 교회는 정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고, 정부도 교회의 지지를 이용하였으며, 국민들은 기독교가 대표하는 미국에 열광하였다. 소위 '유사(類似) 크리스텐덤'을 경험한 것이다. 우리 기독교의 어르신 지도자와 성도들은 그 시절 교회의 메시지와 형태와 업적과 영광과 희망을 체득하였고, 지금도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가 하나님의 뜻대로 국가를 지도하는 지위에 있고, 국가가 번영하기 위하여서는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3. 유사 크리스텐덤은 지나갔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교회와 정부의 밀월은 끝났다. 87체제 성립 이후 우리의 사회적 의제는 민주화에서 양극화 해소와 평화로 계속 진화하고 있다. 반공·산업화 시대의 이념에 속박된 (아니 그 이념에 스스로를 속박시키는) 기독교는, 우리 시대를 이끌만한 이념과 인물을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다원주의 시대,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가 도래하였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펼쳐져야 한다고 믿지만, 세상은 기독교의 주장을 여러 이념 가운데 하나로, 그것도 한물 간 것으로 여긴다. 이런 시대 반(反)동성애와 같은 기독교적 가치를 법과 정책에 반영시키기 위하여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가 사회적 의제를 이끌던 크리스텐덤 시대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식과 포스트크리스텐덤 사회의 방식은 달라야 한다. 크리스텐덤 시대에는 교회가 가르치는 주장들이 그 사회에서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일관성 있게 구현되었다. 예컨대 칼뱅 시대의 제네바에서 동성애가 이슈로 떠올랐다 하자.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한 칼뱅은 동성애에 관한 성경구절을 찾아 이를 설교할 것이다. 또한 그 설교의 내용대로 동성애자에게는 성찬을 주지 말자고 당회에서 결의한다. 교회가 결의안을 시의회에 보내면, 시의회에서 논의한 후 동성애자의 공민권을 제한하자는 법률안을 통과시킨다. 시를 다스리는 행정관과 법원은 위반의 경중에 따라 동성애자에게 벌금형이나 태형을 가하고 치료를 강제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반(反)동성애 운동을 하는 많은 단체와 교회는 이런 형태의 투쟁을 마음에 두고 있다. 동성애와 동성 결혼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죄이므로 국회는 이 법을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반동성애 내용을 담은 설교를 하고, 교인들의 서명을 받아 지방 의회나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의원이나 정당 관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법안 통과를 막는 것이다. 지난 2007년 차별 금지법이 맨 처음 발의되었을 때 많은 기독교인들의 반대로 법률안을 무산시킨 전례가 있다. 2020년에도 꼭 같은 방식으로 투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법통과를 저지할 수는 없다. 교회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는 것은 자유이고 성도들이 그 설교에 동의할 수는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나도 그렇게 설교하였던 적이 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보면 차별금지법 반대 의견은 기독교라는 한 종교의 견해에 불과하다. 동성애를 금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장은 하나님도 성경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니다. 동성애 혐오의 주장이 가득 담긴 성명서를 발표하고 길거리 집회에서 큰 소리로 주장을 펴는 것은, 역설적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을 보여줄 뿐이다.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를 떨어뜨려 전도를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

패배주의에 빠져서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자는 것이 아니다. 바른 현실 인식을 가짐으로 효과적인 투쟁의 전략을 수립하자는 뜻이다.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 세속화된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반(反)동성애 운동을 펼쳐나가야 할까? 기독교계의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운동 전략의 주안점을 제안하려 한다. 첫째는 운동의 목표에 대하여, 둘째는 방식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4.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의 목표

무릇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한 사회운동은 타깃을 좁고 분명하게 잡아야 한다. 전선(戰線)을 너무 길게 늘여놓으면 전력이 분산되어 효율성이 떨어진다. 내가 보기에, 현재 기독교계의 반동성애 운동은 너무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주장하는 것이 문제다. 반동성애는 반(反)진보-반(反)시장경제-반정부-반문재인과 결합되고, 반(反)이슬람, 반북, 반중(反中)까지 더해진다. 반동성애 운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한다. '성(性) 혁명'에 대항하는 전략을 제시하는 『베네딕트 옵션』의 저자 로드 드레허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신중하고 성취 가능한 목표에 집중하라. 문화 전쟁 전체로 전선을 확장하지 말고, 희박한 정치적 자산을 의미 없고 쓸데없이 선동적인 표현으로 탕진하지 말라." 현재 기독교는 글자 그대로 이 충고와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기독교인의 최선의 목표는 물론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도록 하는 것, 혹은 통과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간통죄나 낙태죄 폐지와 같이 언젠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도 통과될 것으로 예상한다. 통과를 예상하면서, 그 과정에서 그 법의 조문과 적용을 상세하게 규정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차선책이다. 아니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5. 종교의 자유 (Freedom of Religion)

운동의 목표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살펴보자. 헌법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식도 배울 수 있다. 종교자유를 규정하는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다음과 같다. "①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우리 헌법의 조문은 1791년 통과된 미국 헌법 수정조항 제1조의 전반부를 약간 변형한 것이다.

미국 헌법 수정조항 제1조는 크리스텐덤을 둘러싼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세속국가라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던 당시의 미국 건국지도자들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맨 먼저 천명하였다. 미연방의 차원에서는 이미 이때부터 미국이 세속국가였다. 비록 각 주정부와 국민 다수가 이를 받아들이는 데는 향후 20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였지만 말이다. 당시 미국교회도 세속국가의 이상을 받아들였다. 1789년 미국장로교회 창립총회에서는 1647년 영국에서 작성·반포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정하여 자신들의 신앙고백서로 채택하였는데, 다른 교리적인 부분은 그대로 수용하였고 단지 국가 공직자들이 교회 문제에 간섭할 수 있다는 조항을 배제하였다. 교회 편에서 포스트크리스텐덤을 인정한 것이다. 비록 미국교회는 200년이 지나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미국과 다르지만, 미국 연방헌법의 조항을 거의 그대로 채택함으로써 미국 건국 지도자들이 생각하던 세속국가의 이념을 따르고 있다.

미국헌법과 대한민국 헌법에서 공히 주장하는 것은, 국교(establishment of religion) 금지와 종교의 자유(freedom of religion) 두 가지다. 국교를 금지하면 모든 종교에 자유가 주어지니, 동일한 내용을 반복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이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국교 금지 조항은 다수파 종교의 횡포를 막기 위한 조항이고, 종교의 자유는 소수 종교를 보호하기 위한 조항이다. 만일 한 종교가 다수파라면 헌법 20조 때문에 제약을 받지만, 소수파 종교라면 보호를 받는다. 미국의 경우 이 조항에 근거하여 다수파 기독교의 권리 행사가 제약되고,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와 같은 소수 종파들이 혜택을 보고 있다. 기독교의 권리가 제약된다고 하니 너무 마음아파하지 마시라. 터키와 같은 이슬람이 다수파인 나라에서는 똑 같은 인권법에 따라 기독교가 혜택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계의 차별금지법 반대운동은 이 둘 가운데 어느 조항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우선 국교금지 조항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만일 기독교계가 기독교의 가르침을 근거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면, 즉 동성애는 성경에서 죄로 규정하고 동성혼은 창조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동성애를 찬동하는 쪽에서는 국교금지 조항에 근거하여 자신들을 변호하려 할 것이다. 다원주의 세속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가 자신의 가르침을 세속적이며 공적(公的)인 영역에 적용하려 한다고 말이다. 아마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기독교인들도, 우리나라가 기독교국가라는 생각, 혹은 기독교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크리스텐덤 이상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세속적 영역에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방식이다. 기독교인의 바람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기독교국가인 적이 없었던 세속국가이며, 기독교는 경쟁하는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집중해야 할 조항은 바로 헌법 20조 ①항에서 말하는 "종교의 자유"다. 우리는 기독교가 우리나라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이며, 소수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때 집중해야 할 목표는, 차별금지법 때문에 기독교의 신앙, 예배, 신앙교육, 포교(布敎) 등이 보호 받고 위축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차별금지법이 시행된다면 우리 신앙의 어떤 부분이 위축될 것인가? 첫째, 예배는 아닐 것이다. 설교 도중 동성애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하면 벌금을 물고 감옥에 갈 것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는 모양인데, 이는 한 마디로 공포를 조장하는 가짜뉴스다. 동성애 반대를 설교하는 목사를 잡아넣는다는 것은 대단히 강한 전체주의 정부에서 가능한 일인데, 자신의 성별(性別)을 마음대로 택할 수 있는 사회는 전체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회다. 그러니 예배 시간에 동성애를 금지하는 설교를 못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가짜 뉴스에 기대어 논리를 전개하면 양식 있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고, 정작 일말의 진실을 말해도 양치기 소년 취급을 받게 된다.

둘째, "재화·용역·시설 등의 공급이나 이용"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은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예컨대 신앙을 이유로 제과점에서 동성 간 결혼식에 쓸 케이크를 안 만들어주는 경우다. 사기업의 경우는 이런 문제로 소송을 당하더라도 재판에서 종교의 자유 조항에 호소하여 다퉈볼 수 있을 것이다. 기성 제품을 팔지 않으면 법에 저촉되겠으나, 자신의 예술적 가치가 포함된 작품이라면 만들기를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동성 부부도 자신들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만든 케이크를 꼭 사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 공산품의 상행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인데, 예컨대 기독교인들이 낙태를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태한 사람에게 물건 파는 일을 거부하지는 않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공공의 영역에서는 문제의 소지가 많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 국선변호인이 동성혼 부부를 대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나, 군목이 동성혼 주례를 거부하는 경우, 구청 공무원이 동성혼 부부의 혼인신고를 받지 않는 경우 등이다. 공직에 근무하는 사람이 종교의 자유에 호소하여 자신들의 업무를 거부할 수 있을까? 신앙과 양심에 어긋나는 업무를 거부할 수 있는 양심에 따른 기피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신앙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고 대체복무를 택하는 것과 유사하다. 지금은 기독교인들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제를 가장 앞장서 반대하지만, 언젠가 기독교인들이 종교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 조항의 혜택을 받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차별금지법 반대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정교한 논리를 만들어야 하는 부분 중 하나다.

셋째, 기독교 관계기관에서의 채용 문제다. 기독교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준(準) 공공기관의 성격을 띤, 방송사, 신문사, 복지기관, 교육기관 등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이 중 교육기관의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 학교에서 교직원을 채용할 때 동성애를 찬동하는 지원자에게 "기회를 주지 아니하거나 제한하는 행위"는 차별금지법 위반이 될 소지가 있다. 채용에서 차별을 허용하는 정당한 사유도 있는데, 반드시 그런 특징을 가진 사람을 뽑아야만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경우다. 예를 들어 여성이라는 이유로 검사 임용을 거부하면 차별이지만, 남자 교도소의 직원으로 여성을 뽑지 않아도 차별이 아니다. 이를 기독교학교에 적용시키면, 기독교학교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아마도 기독교학교에서 단순 사무업무를 보는 직원을 뽑을 때는 동성애 여부를 물으면 차별금지법에 저촉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직무나 사업수행의 성질상 그 핵심적인 부분"을 수행할 교사나 교수를 뽑을 때는 동성애자를 뽑지 않도록 허용될 것이다. 기독교인 법률가들이 이 부분에 논리를 개발하고 판례를 찾아야 한다.

넷째, 교육기관에서의 교육 내용이다. 내 생각에 차별금지법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차별금지법 제32조는 교육내용에서의 차별금지를 명문화한다. 기독교 사립학교 교사가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고 가르치거나, 채플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면 차별금지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는 의미다. 다투어볼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우리 헌법에는 차별금지법의 근거가 되는 평등권(제11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별금지법과 충돌하는 여러 조문들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제20조) 뿐 아니라, 양심의 자유(제19조), 표현의 자유(제21조), 학문의 자유(제22조), 교육의 자주성과 대학의 자율성(제31조 4항) 등이다. 교사나 교수가 양심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라는 기본권에 근거하여 동성애를 반대하는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차별금지법을 반대운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국내외 판례 가운데 이런 케이스들을 수집하고, 타협할 것은 타협하고 반대할 것은 반대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립학교(혹은 사립대학)는 매우 특이한 위치에 있다. 모든 초중등 사립학교 재정의 99%가 국가의 지원금이고, 대학의 경우도 정부의 보조가 없으면 운영이 어렵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교육부에서 재정 지출 뿐 아니라 교육과정도 통제하고 있다. 더욱이 다수의 평준화 지역 초중등학교는 학생모집도 뜻대로 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사립학교가 공교육 시스템에 완전히 편입되어 있어, 사립학교로서 학교의 설립이념 구현이 불가능하다. 임의 배정된 중고등학생이 채플에 의무적으로 들어가 종교를 강요당하는 것은, 학생의 입장에서는 인권의 문제다. 사립대학의 경우 학생이 대학을 선택하여 입학하였기에 종교 교육이 가능하긴 하지만, 역시 교육부의 평가 시스템에 의하여 평가를 받아야 하기에 자유롭지 못하다.

교육의 공공성과 학생 인권이라는 명분이 너무 강하여, 사립학교의 자율성이나, 교육 주체로서 부모나 교사의 권한이나, 학교 설립자의 포교의 자유와 같은 또 하나의 중요한 헌법적 가치들은 무시되고 있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나는 학생이나 학부모의 선택권이 없는 상태에서 국가가 교육내용을 통제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여러 가지 인권에 대한 침해라고 생각한다. 초중고 사립학교나 사립대학에 주는 보조금은 교육부가 내리는 시혜가 아니다. 교육부는 국민이 낸 세금을 나누어주는 기관에 불과하다. 그 세금이 기독교계 사립학교와 기독교 부모와 학생들을 위하여 공정하게 사용될 수 있는 법적 제도의 마련이 시급하다. 예컨대 사립학교가 자율적으로 학생 모집을 하고, 교육부가 학생 개인에게 들어갈 교육비를 학교에 지원하는 바우쳐(voucher) 제도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학생 개인의 인권이 무시되지 않으면서 교육 내용을 학교의 자율에 맡길 수 있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기독교인의 최선의 목표는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도록 하는 것, 혹은 통과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다. 그러나 간통죄나 낙태죄 폐지와 같이 언젠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도 통과될 것으로 예상된다. 통과되는 과정에서 그 법의 조문과 적용을 상세하게 규정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차선책이다. 나는 그런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염려하는 것의 상당 부분이 해소될 것으로 믿는다. 이 논의는 세세한 법적 논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전문가의 영역이다. 종교의 자유나 대학에서의 학문의 자율성에 관한 많은 국내외 판례들이 있다. 신학자와 법학자, 목회자와 기독교인 법조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야 한다. 교회의 재산권 관련 소송에 매달릴 것이 아니다.

 6. 공적(公的) 영역에의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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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사진 = 이활 기자 )
▲성소수자 축복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기감 소속 이동환 목사가 교단 재판에 기소되자 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기감 본부가 있는 광화문 동화빌딩 앞에서 열리던 모습.

여기까지 읽으면서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널리 펼쳐져야 할 텐데, 종교의 자유에 호소하여 기독교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만족하자는 것은 너무 소극적이지 않나? 세속화된 사회를 전제로 하고 이미 권력은 저쪽으로 넘어갔으니 거기에 적응하면서 조용히 살라는 것인가? 기독교 학교에서 기독교 교사가 기독교적 진리를 가르치는 것까지는 좋은데, 정작 그 진리를 배우고 세상으로 나간 학생들은 또 다시 믿는 사람끼리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결국 기독교 학교를 세워 거기서 마음 놓고 성경의 진리를 외치라는 것일 뿐, 타락해 가는 세상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일종의 패배주의가 아닌가?

이미 세속화된 세상에서도 기독교인이 공적 영역에 참여하여 영향을 줄 수 있는 길이 있다! 우리는 앞에서 '국교'(國敎, establishment)의 방식으로 참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죄악으로 달려가는 세상을 그대로 방치하자는 것은 아니다. 한 시민으로서,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의 자격으로, n분의 1의 지분을 가지고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정치와 종교가 칼로 무 자르듯 분리되지는 않는다. 정교분리에도 여러 방식이 있다. 정치와 종교 사이에 가능한 한 '담'(wall)을 높이 쌓아야 한다는 '분리주의'(separationism) 입장도 있고, 서로 협력할 부분을 협력하자는 '조화주의'(accommodationism) 입장도 있다. 대한민국은 후자의 입장을 취하여 왔다. 교육, 복지, 군목 등에서 오래 전부터 서로 협력관계를 맺었다. 기독교인이 혹은 교회가 공동선(共同善, the common good) 구현을 위하여 공공 영역의 각 분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목소리를 낼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공적인 일에 참여하고,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막을 수 있는 것은 막아야 한다.

예를 들어 교육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앞서 기독교계 학교의 경우 "종교의 자유"에 근거하여 채용과 교육 내용에서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렇다면 공립학교의 경우는 어떠한가? 공립학교는 동성애가 아무런 제재 없이 가르쳐지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 영역인가? 기독교인 공립학교 교사들 가운데서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전제들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교육부의 위탁을 받아 초중등 교육과정을 만드는 학자들 가운데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여성가족부의 정책 입안자 가운데 성차(性差)가 후천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 아닌가? 기독교인 학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이 반(反) 기독교적 성 교육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기독교인 납세자들은 자신들이 낸 세금이 자신들의 신념에 반하는 교육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에 항의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이들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다! 이들이 속한 종파에서도 자신들의 교리에 따라 의견을 진술할 권리가 있다. 공립학교에서 일하는 기독교인 교사가 자신의 신앙에서 나온 견해를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적 성(性) 개념이 공립학교에서 하나의 견해로서라도 가르쳐 지는 것이 금지되어서도 안 된다. 교육 현장에서 동성애자를 차별하고 혐오하지는 말아야 하겠지만, 동시에 동성애를 반대하는 견해가 있다는 사실도 알려져야 한다. 학교가 여러 의견들이 편견 없이 공평하게 논의되는 "공론장"(公論場)이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는 과거 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적 윤리를 강요하는 것과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n분의 1에 해당하는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가톨릭도, 불교와 원불교도, 무신론자도, 여성주의자도 같은 지분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진정한 다원주의 아니겠는가?

 7.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의 방식: 정치를 통한 변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기독교가 신(神)의 이름으로 기독교적 가치를 강요한다고 해서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가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0년 10월 한 정당의 청년 위원 중 한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나라, 자유보수정신의 대한민국"이라는 카드뉴스를 자신의 SNS 올렸다고 해서 그 당에서 면직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국민정서에 맞지 않기 때문에 서둘러 조치를 취하였다고 보여 진다.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특히 기독교는 신앙과 이념을 동일시한 역사가 있어, 젊은이의 치기로 보아 너그럽게 넘겨주지 않는다. 정치권 인사들이 표를 의식해서 편파적으로 교계의 주장을 들어주는 경우가 있는데, 일반 시민들은 이를 매우 불편하게 지켜본다. 대한민국은 좀 과하게 말하면 기독교를 혐오하는 사회이고, 아무리 좋게 보아도 기독교에 특혜를 줄 수 없는, 여러 종교와 이념이 경쟁하는 세속 사회다.

우리 사회에서 법이 제정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법이 바뀌는 통로는 정부나 국회일 경우도 있고, 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새로운 법 해석일 수도 있는데, 결국 이들은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하는 기관들이다. 법을 제정하는 국회의원들은 당연히 국민 다수의 뜻에 민감할 것이고, 법을 발의하는 정부도 결국은 국민이 뽑은 대통령의 공약을 이행한다. 대법관이나 헌법재판소 재판관들도 역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판결이 국민의 법 감정과 배치되면 교체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요컨대 지금 우리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2015년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의 간통죄 폐지나 2019년 낙태죄 헌법불일치 판정의 과정, 그리고 지금 합법화 과정에 있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등을 보라. 진보적 정당에서 논의를 이끌고, 법원에서 소수의견이 나오고, 보수적 정당도 몇 년 후 다수 국민의 뜻이므로 어쩔 수 없다며 마지못해 동의하고, 마침내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가 종지부를 찍는다. 이런 프로세스를 이해하면, 성(性) 윤리와 관련된 변화의 속도를 늦추거나 방향을 바꾸기 위한 지금의 운동 방식이 효과가 없음을 알게 된다.

또 한 가지, 대한민국 기독교는 미국의 기독교를 많이 닮아 있고 또 닮으려 고 노력한다. 교회의 문화나 신학 뿐 아니라 대사회적 의제(아젠다) 설정까지도 미국의 것을 수입하며, 투쟁 방식도 미국을 바이블이나 되는 것처럼 미국의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문제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큰 미국의 상황과 기독교가 여러 종교 중 하나인 우리의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며, 더 큰 문제는 그런 미국에서도 도도한 성혁명의 물결을 막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는 지난 수십 년에 걸쳐 낙태, 안락사, 동성애 등의 문제를 놓고 투쟁하였는데, 주로 정치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기독교인들이 단합하여 공화당 정치인을 당선시키면 변화의 물결을 막을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시차가 있었을 뿐 공화당은 이들의 합법화를 막지 못하였고, 2015년 "오버거펠 대 호지스" 사건으로 결국 동성 간의 결혼마저 합법화되고 말았다. 2016년 미국의 대선은, 성(性) 문제에 대하여 진보적인 민주당 후보와, 복음주의의 가치에 대한 일말의 헌신도 없으면서 이를 지켜주겠다고 허언을 남발한 공화당 후보 간에 선택을 해야 하는 선거였다. 정치를 통한 방식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배웠을 법도 한데 여전히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을 보면, 미국의 보수 교회도 별 대안이 없는가 보다. 복음주의 기독교가 트럼프를 당선시킬 만큼의 힘을 가진 미국에서도 사정이 이와 같다면, 기독교의 신뢰도와 영향력이 약화되어가는 한국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8. 폭력과 혐오 조장은 안 된다

진정으로 변화를 주고 싶다면 소리만 요란할 뿐 아무 결과를 내지 못하는 정치 운동 대신 국민의 의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더딘 것 같지만 이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아마도 유일한 방법이다. 우선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싫어하는 방식을 피해야 한다. 우리 국민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폭력과 혐오조장이다. 2008년 여름 광우병 쇠고기 문제로 시작된 촛불시위가 정권 퇴진을 주장하기까지 확대된 적이 있었다. 몇 사람의 과격분자가 경찰차를 부수는 등 시위가 폭력으로 변질되었고, 폭력에 반대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거세어져 얼마 못 가 소멸되고 말았다. 여기서 교훈을 얻은 2016년 겨울의 촛불혁명은 전혀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문화제 형식의 집회로 진행되었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우리 국민은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지 폭력을 싫어한다. 신체적 폭력은 물론 언어적 폭력도 싫어하고, 검찰이나 경찰 등 권력기관이 행사하는 물리력 사용에 과민하게 반응하고, 위계에 의한 갑질과 성폭력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전광훈목사와 일부 극우파 신도들이 주도한 집회가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집회의 방식과 그 집회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는 반동성애 집회나 강연에서, 혐오를 조장하는 폭력적 언사가 난무한다. 이런 폭력과 혐오로 얼룩진 발언은 차별금지법이 필요성을 증명할 뿐이다. 국민 정서에 부합하지 않는 이런 투쟁 방식은, 반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카타르시스는 될지언정, 어떤 유의미한 결과도 얻어내기 어려운 방식이다. 단언컨대 지금과 같은 무모한 투쟁 방식으로 성(性) 혁명의 물결을 막을 수 없는 것은 물론,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점점 더 시대에 뒤떨어진 광신자로 여겨 질 것이다.

 9. 신뢰 회복이 우선 되어야

국민 대중에 호소하여 그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한 적극적 방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합리적 설득의 과정이다. 선동적 여론 몰이에 넘어가는 세상이 아니다. 동성애와 동성 결혼을 반대하는 논점을 분명히 하고 정확한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 성경에 그렇게 써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안 되고, 비신자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논리로 설득해야 한다. 동성애와 관련하여 비신자들과의 대화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된 예를 하나 들라면 바로 "동성애는 죄이다."라는 명제다. 기독교인들에게 '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sin)라면, 이를 듣는 비기독교인은 감옥에 가야 하는 '범죄'(crime)를 떠올린다. 목사님들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면 감옥에 가야 한다는 가짜 뉴스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처럼, 비신자들은 동성애자를 감옥에 보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여서 무서워한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기독교인들이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 (creation ordinances)에 어긋난다고 말하는데, 이를 혼인과 가족제도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한다는 헌법 제36조 ①항의 언어로 바꾸면 어떨까 싶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창조질서'가 의미 있는 말이지만, 비기독교인은 창조질서에 기초하여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와 인류 보편적인 혼인제도 등에 호소하는 편이 낫다.

또한 과학적으로 입증된 부분에 대하여서는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칫 사이비 과학에 기대어 강변하다가는 완전히 따돌림 당한다. 진지한 자세로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상대와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진지하고 긴 글을 싫어하지만, 진지하고 긴 글을 읽은 사람의 말은 신뢰한다.

둘째, 세련된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 기존 질서를 뒤엎는 상상력은 예술과 문화로부터 출발한다. 할리우드 영화가 성 개방 혹은 성 혁명에 준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동성애자의 차별 문제를 다룬 거의 첫 영화인 "필라델피아"(1993년)가 나온 이후, "브로크백 마운틴," "패왕별희," "해피 투게더" 등의 외화와 "쌍화점," "친구사이," "왕의 남자" 등의 방화가 동성 간의 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지금 방영되는 미드들에서는 LGBTQ가 일상화되어 있고, 최근 큰 인기를 얻었던 한국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도 트랜스젠더가 차별을 극복하는 스토리에 많은 젊은이들이 공감하였다. 이들의 문화적 공격에 대하여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어 영화를 가위질하거나 상영중지 가처분신청을 내는 방식을 통하여서는 이들을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성 혁명에 의하여 만들어진 개인의 삶과 사회가 얼마나 공허한지 진실을 알리는 부정적인 문화 콘텐츠를 생산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성경이 말씀하는 성(性)과 가정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성을 둘러싼 전쟁은 정치 전쟁이 아니라 문화 전쟁이다!

셋째, 말보다 실천이 앞서야 한다. 사람들은 완벽한 논리로 무장한 사람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사람을 신뢰한다. 자신이 믿는 바를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이다. 반동성애 운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신뢰를 얻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동성애를 죄(罪)라고 규정하면서 다른 성적인 죄에 대하여서는 관용적 자세를 가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동성애보다 이혼에 대하여 성경이 더 많이 말하고 있지만 이혼에 대하여서는 관용한다. 낙태를 반대하지만 싱글맘을 돌보려 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서 키울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자는 것을 사회주의적 발상이라 하여 반대한다. 간통죄 폐지를 반대하면서 성범죄를 저지른 가진 (대형) 교회 지도자들을 단죄하지는 않는다. 교회가 동성애자를 포용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례를 별로 보여주지 못한다.

오해할까 싶어서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합리적인 언어로 말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기독교적 정체성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는데, 이를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또한 그들이 볼 수 있는 실천으로 표현하자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가톨릭교회가 귀감이 된다. 가톨릭교회는 이전부터 성(性)과 가정에 대하여서는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최근 2020년 9월에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이 대단히 균형 잡혀 있어서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 보아도 쉽게 이해가 된다. 차별금지법 자체에 대하여 찬성하고 동성애자 개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반대하면서도, 가톨릭의 가르침(개신교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분명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개진한다. 무엇보다도 그 동안 보여 준 가톨릭교회의 성과 가정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 민주화 운동을 비롯한 정의와 평화와 환경 보호 운동, 그리고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 때의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등 때문에 그들의 말을 신뢰한다. 최소한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데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여 대놓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10. 같은 주장을 하는 세력들과의 연대

이상한 것은 대한민국에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기독교만 반동성애 운동에 앞장서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2019년 대한민국에서 동성애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전 인구의 44%라 한다. 이는 2002년의 25%에 비하여 19%가 증가한 수치로, 대한민국은 미국(19%)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상승세를 보이는 국가다. 2019년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동성 커플의 합법적 결혼에 관하여서는 찬성 25% 반대 56%로 나타났다. 줄잡아서 아직도 50% 이상의 국민이 동성애나 동성 간 결혼에 대하여 반대한다는 말이다. 바로 이들이 기독교계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저지하기 위하여 호소하고 연대해야 할 국민들이다.

문제는 그 연대를 어떻게 이끌어내느냐 하는 것이다. 일단 가장 먼저 해야 일은 개신교의 여러 목소리를 단일 창구로 집약하는 것이다. 개신교는 가톨릭과 달리 수십 개의 교단이 있고, 진보와 보수가 혼합되어 있으며, 여러 단체와 개인들이 개별적으로 목소리를 낸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몰락한 후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이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계를 대표하고 있으니, 한교총을 중심으로 논의를 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두 번째는 각 종교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가톨릭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성과 가정 문제에 관하여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중앙집권적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또한 민주화에 참여한 이후 여러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그들의 입장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기독교계에서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일은 가톨릭과 대화하고 연대하는 일이다. 정교회(正敎會, Orthodox Church)는 일반적으로 성 문제에 대하여 보수적인 입장이므로, 한국정교회와도 연대할 수 있다. 개신교 내에서도 NCCK에 속한 진보적 교단들은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찬성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과연 그 찬성의견이 충분한 토의를 거쳐 모든 목회자들이 동의하는 의견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교단의 사무국과 지도부는 일선 목회자들보다 진보적인 성향을 띤다.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들과도 연대하여야 한다.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종지협)에 가입된 7개 종단(불교, 기독교, 천주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민족종교 등) 기독교 지도자들을 두루 만나 의견을 나누고 연대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종지협의 주요 설립취지 중 하나가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의 도덕성 회복이므로, 설립취지에도 부합한다. 2010년 종지협이 낸 성명서에서는 "사회적 소수자 인권보호를 빌미로 '동성애차별금지법'과 같이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사상적 근간과 사회적 통념을 무너뜨리는 입법에 대해서는 적극 반대한다."고 천명한 바 있다. 그 후 불교와 원불교 등의 입장이 동성애 찬성 입장으로 돌아서기는 하였지만 다수의 지도자들은 아직도 보수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다른 종교와 협력하고 연대하는 데 대하여 부담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면 전혀 이상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과거 여러 차례 종교 간 연합운동을 통하여 우리 사회에 비전을 준 일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1919년 3.1운동이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의 대표자들이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단순한 독립운동을 넘어선 민권운동의 시초이고, 대한민국을 이루게 한 이념의 시작점이다. 놀랍게도 이 운동을 가능하게 한 것이 종교 간 연합이다. 이후에도 민주화운동, 환경운동, 통일운동 등에서 종교 간 연대가 여러 번 있었다. 특히 오늘날처럼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가 바닥을 치고 있을 때, 기독교가 반(反)동성애 내지 반(反)차별금지법의 주도세력으로 각인된다면, 반동성애 운동에도 또한 기독교의 미래에도 결코 도움을 주지 못한다.

※ 이 글은 장동민 백석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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