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특별기고] 해방도 통일도 못한 8.15 아침의 단상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본지 회장)

입력 Aug 15, 2020 07:52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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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세계YMCA회장을 역임한 본지 회장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

1945년 8월 15일, 만주의 산 언덕 위에서

1945년 8월 15일, 나는 우리 나이로 열다섯 살, 만주 본계호(本溪湖)라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군수공장과 철광 공업 도시에 일본인 노동자와 기술자들 자녀들을 위한 일본인 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이 도시에도 미국의 B-24 폭격기들이 가끔 날아와 공장지대에 폭탄을 투하하는 일이 있었지만, 일본이 시작한 태평양 전쟁의 치열함는 모르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1945년 들어서면서 그해 봄 학기는 학교에 등교하기 보다는 일본 군수공장에 소집되어, 이런저런 공장 안과 밖을 청소하는 둥 허들엣 일을 하면서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해 여름은 덥고 힘들었다. 8월이 되면서 라디오 방송에서는 미군 폭격기가 일본 수도 동경을 융단 폭격했다는 소식과 함께,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일본 전투기들이 가미까제 (神風: 신풍) 작전이라고 하면서 비행기를 몰고 미 해군 항공모함에 자살 폭발해서 격침하게 했다는 영웅담 기사가 신문지 1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 교회 전도사, 신사참배 거부로 압록강 근처 교회에서 추방당한 항일 투사 아버지는 이제 일본이 미국에 항복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좋아 하시고 있었다.

8월 6일 일본 땅 히로시마에 원자탄이라고 하는 무서운 폭탄을 미군 폭격기가 투하해서 그 도시 전체가 타버렸다는 뉴스가 라디오를 시끄럽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3일 후인 8월9일, 이번엔 일본 남쪽 섬 규슈에 위치한, 공업 항구도시인 나가사키에 또 한 방의 원자탄을 투하했다는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라디오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날, 라디오 방송은 소련 군대가 탱크를 몰고, 몽고와 만주 북쪽과 동쪽에서 일제히 한반도를 향해서 침공을 시작하면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요란하게 떠들고 있었다.

일본인 중학교 학생들은 모두 학교 뒷산에 소집되었다. 삽과 곡굉이를 들고 산 언덕에 올라, 구덩이를 파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판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소련 군대 전차들이 빠져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인 동기생 친구들은 담임선생의 설명과 명령을 들으면서 입을 비죽거리고 있었다. "아니 그래 우리가 판, 이 구덩이에 소련 전차가 빠진다고?" 그렇게 수군거리는 소리를 담임 선생님은 고함소리로 다스리고 있었다.

8월 15일, 날씨는 화창했지만, 무더위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우리 깎아머리 중학생들은 아침부터 산 언덕에 올라 삽과 곡굉이로 소련 전차 방어 구덩이를 힘 없이 파고 있었다. 12시 휴식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이 모두 모여 차려 자세로 기다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담임 선생님은 자기의 단파 라디오를 꺼내 들었다. 12시 시보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일본 천황의 음성이 들려 왔다. 감기에 걸렸는지, 어떤 일본 천황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망했고, 항복한다는 소리였다.

일본인 담임 선생님이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고, 나의 일본인 동기들은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소리 내서 울던 담임선생님이, 눈물을 닦으면서, "이제 집에 가서 짐을 싸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자,"그리고는 힘없는 소리로 "사요나라, 여러분"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 산 언덕을 뛰어 내려왔다.

광복도 해방도 아닌 분단과 전쟁과 갈등의 75년

항일 전도사 아버지는 자신이 개척한 개척교회를 사임하고 교인들과 눈물의 작별인사를 하고, 이삿짐 봇 다리를 메고 지고 조선땅으로 귀국하는 피난 기차에 올라탔다. 압록강을 넘어 안동과 신의주를 거쳐 평양에 도착했는데, 아버지는 기차를 갈아타라고 명령하셨다. 어머니와 4남 1녀의 대식구는 아버지 명령에 따라 기차를 갈아탔다. 평양역에서 북을 향해 평안북도 압록강 근처의 강계, 내가 태어난 고향 땅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평양역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으면, 우리를 태운 기차는 서울로 그리고 부산으로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다.

1945년 9월, 나는 강계 중학교 3학년 가을 학기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일본인 선생들은 온데 간데 없어졌고, 조선인 교사들이 우리말로 조선말 교과서도 없이 힘겹게 국어와 국사와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만강을 건너 소련 군대가 함경도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리고, 소련 군대는 야만 군대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먹는 빵를 벼개 삼아 베고 자다가 더러운 손으로 뜯어 먹는다든가, 거리에 지나가다 손목시계를 보기만 하면, 무조건 빼앗아 자기들 손목에 몇 개씩이라도 차고 다니며 자랑한다느니, 해괴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우리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한 해방군으로 환영해야 한다는 환영대회가 평양 광장에서 열린다는 소문만 듣고 있는 가운데,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항일 투쟁을 하던 김일성 장군이 38선 이북의 조선을 공산주의로 통치한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이에 반대하는 중학생들이 평안북도 도청소재지인 신의주에서 소련군대와 김일성을 반대하는 시위를 했고, 많은 학생들이 김일성 공산정부의 경찰에 의해 희생됐다는 무서운 소식을 듣고 있었다. 강계중학교에서도 우리 몇 사람이 이에 호응하는 시위를 준비하다가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겨울 방학으로 시골집으로 피신하였다.

전도사 아버지는 만주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審陽)의 피난 신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강계에서 장로교 서북노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강계시에서 동북 쪽으로 하루종일 버스로 깊은 산골길을 가야하는 후창(厚昌)이라는 동네의 교회 목사로 부임하셨다. 화창한 날이면 저 멀리 하얀 눈이 덮인 백두산을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우리 목사 아버지가 이 두메산골,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에 부임 하시자 마자, 김일성 공산정권이 시작한 토지개혁이 시작되었다. 1946년 3월이었다. 농토를 가지고 소작인들에게 농사를 시켜 부자가 된 지주들에게서 농토를 몰수해서 소작인들에게 주어, 농사를 짓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소작인이 땅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고, 나라가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 토지개혁의 바람이 불면서 이른바 "악덕 지주"들이 인민재판을 받고 소작인들의 손에 매맞고 죽어 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지주들은 야밤도주해서 땅과 집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 남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 교회 장로님들 가운데도 땅 마지기라고 소유하고 있던 집 가족들도 목사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일성의 기독교 목사들과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선거인가 하는 나라의 일이 있을 때마다, 일요일에 전 인구와 학교 학생들을 동원하면서 주일 예배를 방해하였다. 그리고 김일성의 친척 되는 강양욱 목사를 내 세워 기독교도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기독교는 공산주의 이념과 정부 정책에 동의하고 동참하고 지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목사들의 가입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우리 목사 아버지에게도 가입 종용과 압력과 함께 공산주의 정부에 협력하라는 명령과 강압이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교인들의 권유로 목사 아버지는 다시 짐을 싸들고 야밤중에 교인이 운전하는 트럭 짐차 위에 올라타고 강계까지 기서, 겨우 평양행 기차를 탔다. 그해가 1948년이었던가? 김일성이 평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설립하고 주석으로 군림하는 해였다.

38선 이남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한 날이 1948년 8월 15일, 김일성의 공산당 단독정부 수립을 선포한 날이 같은 해 9월 9일이었다.

목사 아버지는 평양에 있는 교회를 맡으시면서, 일단 평양에 있다가 기회가 되는 대로 월남하게 되면 그때 가서 결정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 "그때"가 되기 전에 6.25가 터졌다. 우리 목사 아버지는 6.25가 터진 그날, 주일날, 교회 설교를 하시면서, 김일성이 뭘 모르고 남침을 했는데, 이제 곧 국군과 미군이 인민군을 몰아내고 평양을 해방시킬 것이고, 남과 북이 통일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한국민족을 절대 버리지 않으신다는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목사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셨다. 교인들 말로는 우리 동네 교인 댁 심방에 나섰다가 인민군에 끌려 가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목사관 마루 밑에 판 방공호 겸 피신용 구덩이에 숨어 있다가 잠깐 교회 마당에 산보 나갔다가, 인민군에게 끌려 갔었다. 뜻하지 않게 신체검사장에서 인민군 군의관이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떼어 주는 바람에 인민군으로 낙동강 전선에 끌려 와 국군의 손에 죽게 되는 숙명을 피하게 되었다. 나의 바로 아랫 동생은 그 신체검사장에서 우리 생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 목사 아버지는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그해 9월 서울을 탈환한 미군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군과 대한민국 국군 해병대가 10월 어느 날 평양에 쳐 들어 와 인민군을 몰아 내고, 평양 시민들이 어설프게 그린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를 흔들면서 환영대회를 하고 있을 때, 우리 아버지 교회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아버지 시체를 대동강 강가 언덕에서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갔다. 아버지는 다른 교회 목사님 4명과 함께 밧줄에 묶여, 인민군 따발총에 맞아 피범벅이 된 채 누어계셨다. 나는 터져 나오는 분노로 아버지 얼굴의 핏자국을 만져드리면서 통곡하였다. 그리고 대동강이 멀리 내려다 보이는 평양 남쪽 교회 뒷산에 묻어 드리고, 미군이 평양으로부터 철수하는 피난민 화물차에 올라 탔다. 그리고 부산에서 대한민국 해군 소년 통신병으로 지원해서 입대했다. 1951년 1월, 부산항의 바닷바람이 유난히 매섭게 추운 날 저녁 늦게, 부산 항구에서 대한민국 해군 함정에 올라 타고 진해 만에 도착했다.

제2차 대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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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지유석 기자)
▲철원 평화전망대에 전시된 탱크 모형.

1953년 7월, 내가 미국 해군 종합학교에서 교육 훈련을 받고 있는 동안, 한국전쟁이 잠시 휴전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미 해군 친구들이 이 소식을 나에게 전하면서, "휴전협정이라는 걸, 미국과 중국, 그리고 북한 장군들이 싸인을 했는데,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거부하는 바람에 싸인하지 않았다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쉰다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일본이 제2차 대전에 패전해서 항복한 지 75년이 지나갔고, 광복도 아니고 해방도 아닌, 8.15에 뭣도 모르고 대한독립 만세, 해방 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외친지도 75년, 어연 4반세기, 25년이 모자란 100년이 되어 오고 있다. 해방도 아니고 독립도 못하면서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전쟁으로 금수강산을 잿더미로 만든 625전쟁이 터진지도 70년이 되었다. 1919년 3.1 독립 만세를 눈물나게 외치고 일본 제국주의 경찰 손에 속절없이 목숨도 잃고 나라도 강탈 당한지도 100년이 지났다.

돌이켜 보면 나는 전쟁세대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식민지로 침략한 것도 모자라, 만주로 쳐들어가 괴뢰정부 만주국을 세운해, 1931년에 태어나, 내가 일본말을 강요하는 조선 소학교에 입학하는 1937년, 일본군대가 중국 본토 청도(靑島: 친따오)에 상륙작전으로 침공하였다. 그리고 1941년 겨울, 일본 함대가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폭격으로 침공하면서 미국과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다. 결국 1945년 미국의 원자탄으로 일단 일본이 항복하면서 재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세계 역사상, 아니 인류역사상, 가장 살상적이고 파괴적인 원자탄으로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가 왔다고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은 새로운 전쟁의 시대가 원자탄 투하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제2차 대전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원자탄 투하로 시작된 핵 무기 개발은 제2차 대전 이후 계속 나라마다 경쟁적으로 개발되어 왔고, 한국전쟁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핵폭탄 투하를 다른 곳도 아니고 한반도 위에서 위협하고 있는, 무서운 현실이다.

제2차대전 끝자락에 일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게 뻔 한 상태에서 미국이 왜 원자탄을 일본사람들 머리위에 그것도 한발 정도가 아니라 두발이나 투하했을까? 왜 독일에 원자탄을 투하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안 하고 아시아의 황인종 일본 사람들과 한국인 징용노동자들이 운집한 군수공장 도시에 투하했을까? 나는 아직도 이 질문에 스스로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유럽에서는 독일이 미국과 소련, 영국 등 참전국에 의해서 분할 통치 되었는데, 왜 태평양 전쟁에서의 패전국인 일본 열도가 연합군, 즉 미국, 소련, 영국 장개석의 중국 등에 의해서 분할 점령되지 않고, 오히려 한반도가 38선에서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는가? 한반도가 분단 된지 75년이 되는 오늘까지도 이 질문은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나아가서, 제2차 대전이 끝나면서 인도를 포함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이 유럽 백인들의 제국주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어 독립을 선언하고 "아시아인의 아시아 수립"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을 선언했지만, 한반도의 한국전쟁은 미국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에 의한 분단은 고착화 되었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친 월남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끝나 남북 월남이 통일 된지 이미 40년이 되어 가고 있다. 유럽의 공산주의 동독과 민주공화국 서독이 1990년 전쟁 없이 "경제적 흡수통일"을 하게 된 지 30년이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생명과 평화의 지구촌: 8.15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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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사진 = 지유석 기자 )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본지 회장). 지난 제67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제67회 총회에서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 30주년을 맞는 소감을 밝히고 있는 모습.

우리 남북한 분단 정부들도 분단과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를 향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유신정권, 1972년의 7.4 공동서언을 위시해서, 1987년 전두환 정권을 민중의 힘으로 묺어 뜨리고 대한민국의 헌법을 개헌한 1988년 올림픽 대통령,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에서,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 아니라 통일을 향한 동반자라고 선언한데 이어, 남북 고위급회담을 통하여 1991년에는 남북기본 합의서에 북조선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명을 받기도 하였다. 동독과 서독이 통일하는 것을 뉴스로만 지켜 보고, 그 다음해 1991년 겨울에는 소련의 공산독재가 쓰러지는 세계사적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을 향한 남한의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평화 공존 정책을 발표하고 21세기가 열리는 2000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평화회담 끝에 이른바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한데 이어, 2007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역시 남북 분단의 휴전선을 걸어서 도보로 건너 특별 열차로 평양에 도착해 환영을 받으며 10.4 공동선언에 서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회담을 통해 남과 북의 예술인들의 교환이 있었고, 금강산에 남 쪽에서 건설한 숙박시설에 한국 관광객들이 방문하게 되고, 개성에는 북한의 노동자들이 일하게 되는 공장을 남쪽 기업이 건설하고 사업을 하게 되고, 남과 북의 적십자사를 통해서 6.25 전쟁으로 남과 북으로 흩어진 고령화 된 이산가족들을 찾아 금강산 호텔에서 만나게 하는 일들이 있었다. 바로 재작년 겨울 2018년 강원도 평창에서 개최된 세계 동계 올림픽에 북한 선수들이 참가하면서 북조선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등 북한 대표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같은 해, 4월 27일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나 회담 끝에 4.27 판문점 선언에 서명했고, 9월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9.19 평양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남쪽 방문단과 함께 김정은 위원장의 안내로 백두산에 올라 손에 손잡고 한반도에 핵무기가 필요 없는 평화와 공동 번영의 시대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모두, 이제 싱가포르와 하노이에서 열리는 북미 회담에서 미국과 중국, 그리고 남 북한, 625 전쟁 당사국 군사대표들이, 판문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서명한 그 테이풀에 다시 모여 앉아, 한국전쟁의 정신적 종전을 선포하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포함한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믿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전쟁광들과 무기 장사들의 방해로 우리의 꿈과 희망은 묺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제2차 대전이 원자탄으로 끝난, 바로 그날부터 시작한 핵전쟁과 그 위협은 아직 진행중에 있다.

나를 포함한 늙은이들, 특히 일제 강점기를 죽기 살기로 생존한 세대, 한국전쟁을 몸으로 체험한 세대, 열전과 냉전을 포함한 살벌한 죽음과 암흑의 역사를 몸에 지니고있는 전쟁세대들은 물러나야 한다. 옛날, 유대 기독교의 경전에 기록된 해방자 모세의 이야기처럼, 이집트의 노예로 몇백년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이집트로부터 끌고 나와 40년 동안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사막에서 고생하다가, 그 고생 끝에 가나안 복지가 멀리 보이는 시점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신인 야훼 하느님이, 늙은이 모세, 전쟁세대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죽어간다. 전쟁세대, 노예세대는 새로운 나라, 가나안 복지에 들어 갈 자격이 없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 새세대 광야에서 태어난 젊은 세대, 여호수아가, 젊은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 가게 된다.

2020년, 제2차 대전 종전 75년, 우리가 광복도 해방도 독립도 통일도 평화도 경험하지 못한 인고의 75년을 맞이 하면서, 우리 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직면하게 된 코로나 팬데믹, 암흑과 죽음의 무서운 세력 앞에 숙연해 질 수 밖에 없다. 우리와 같은 늙은 전쟁세대의 의식과 생각과 패러다임으로는 도대체 어떻게 코로나 팬데믹의 위기를 극복하고 옛날처럼 살아 갈 수 있을까 하는 심각한 인류와 인류 역사의 질문 앞에 대답할 지식도 지혜도 과학도 철학도 신학도 내 놓을 것이 없다. 여기에 더하여, 엣날 구약성서시대의 노아의 홍수, 40일 밤 낮으로 퍼부운 비 때문에 생긴 노아 홍수 때 보다 더 오래, 더 많은 지역과 나라, 세계 5대양 6대주에 퍼붓는 비로, 그 비 때문에 묺어 지는 홍수 조정 댐들과 산사태에 파괴되는 산과 비탈들과 도로들, 그리고 집들이 홍수에 떠내려 가면서 강과 바다에 쌓이는 쓰레기 산덤이들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구약성서의 노아처럼 무슨 이름의 방주를 짓고 홍수에 대비하고 있는 것일까, 한숨과 함께 같은 질문을 하면서도 대답이 들리지 않고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치른 전쟁들, 아니 지금도 더 무섭게 전쟁을 하고 있고 준비하고 있는 각종 전쟁, 핵전쟁, 경제전쟁, 이념전쟁 등이 만들어 놓은 지구의 황폐화와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류 멸망의 위기를 가져 왔고, 지구 온난화라는 기후변화로 인한 수해와 태풍과 지진으로 지구촌을 위협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구상의 한 지역의 문제도 아니고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온 지구가 함께 동시에 당하고 있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 들인다면, 앞으로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이 대결해서 죽기 살기로 싸우는 전쟁이나, 전쟁을 막는다고 국가 안보를 위해서 새 무기를 만들어야겠다는 문제가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에 직면한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위시하여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더 무서운 바이러스와 평화를 이룩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극의 빙산들이 녹아 내려 지구상의 기후가 변하고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하고 바닷물이 육지에 올라 오고 바닷물이 뜨거워지면서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되는 마당에, 우리 인간들은 아직도 우주와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점령하고 지배하면서, 창세기 1장에 창조주가 명령한, "창조세계의 관리자" 역할, "창조세계와 싸워 지배하고 파괴하는 정복자"가 아닌, 관리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뼈저린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자연과의 전쟁을 멈추고, 자연과 화해하고 우주와 생태계와의 평화 레짐을 만들어 내야 하겠다. 이 엄청난 일은 한 나라나, 한 대륙이나, 한 민족이 혼자 경쟁적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팬데믹인 전 지구적인 재앙이라면 이를 극복하는 일 역시 전지구적, 전인류가 함께 힘을 합해서 공동으로 이룩해야 할 우주적이며 역사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팬데믹 이후의 젊은 여호수아들이 해 내야 하는 지혜이며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새 하늘과 새땅, 하나님 나라의 꿈울 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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